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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꿈세상을바꾼는꿈이 지난달 28일 개최한 "불법촬영물 SNI차단 머리를 맞대보아요." 공론장에 시민 40여명이 참여해 관련 문제에 대한 토론과 숙의를 진행하고 있다.
▲ 불법촬영물 SNI차단 머리를 맞대보아요 바꿈세상을바꾼는꿈이 지난달 28일 개최한 "불법촬영물 SNI차단 머리를 맞대보아요." 공론장에 시민 40여명이 참여해 관련 문제에 대한 토론과 숙의를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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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은 지난달 28일, "불법촬영물 SNI차단 머리를 맞대보아요 공론장을 개최했습니다. 공론장에 참여한 시민 40여명이 토론과 숙의의 결과로 만들어진 내용을 3명의 참가자 후기로 전합니다.

'더 큰 문제'와 사이버성폭력 (나한지)

2015년 '소라넷' 폐지운동을 계기로 사이버성폭력에 대한 한국사회의 인식은 큰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그 전까지 '몰카'나 '야동'이라고 불려오던 사이버성폭력은 대한건아들의 참을 수 없는 성적욕구 때문에 벌어진 안타까운 일에 불과했으나, 불법촬영물 게시물이 올라오는 사이트를 샅샅이 찾아 모니터링하고 신고하고 공론화했던 사람들로 인해 '몰카'는 많은 사람들에게 성폭력으로 인식 될 수 있었다. 또한 인터넷이라는 아무것도 잊혀지지 않는 공간에서 끊임없이 피해를 받고 있음에도 사이버성폭력에 맞서 자신의 삶을 살아내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이 운동은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불법촬영물은 촬영되고 유포되고 소비되며 많은 이들 입에 가십으로 오르내린다. 이 변함없음에 분노한다. 얼마 전 가수 승리와 정준영 등이 불법촬영물을 촬영하고 유포한 성범죄사실이 알려졌다. 어떤 이들은 그 연예인들의 '일탈'이 언론에 많이 나오는 것은 더 큰 문제를 축소할 수 있다고 얘기한다. 정말 '더 큰 문제'는 축소되었나?

이 남성들은 자신의 알량한 남성성을 과시하고 인정받기 위해 사이버성폭력을 저질렀다. 사이버성폭력을 통해서 그들은 하나가 되고 '남성'이 된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그들은 다시는 방송인으로서 재기할 수 없는 끔찍한 범죄자이자, 인간성이 결여된 존재로서, 사회와 격리시켜 재교육받아야 하는 사람으로 인식되지 않는 것일까. 그 모든 '더 큰 문제'보다도 타인의 인간성을 파괴하며 즐거워했다는 것이 가장 큰 범죄로 인식되지는 않는 것일까?

이것은 그들의 범죄를 축소하는 것일까. 나의 고민과는 상관없이 그들의 사이버성폭력이 밝혀진 직후 불법촬영물이 실시간검색어에 오르며 한국사회의 변함없음을 증명해냈다. 아 대단한 사회다. 한 치의 반성도 없는 끔찍한 이 대한의 건아들은 불법촬영물을 소비하는 것이 너무나도 쉽다. 그것을 보는 것이 그들이 그렇게 욕하는 가수 승리와 정준영이 저질렀던 범죄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존엄성을 조각내고 파괴하는 일임을 잘 알면서도 불법촬영물을 소비하는 범죄를 일말의 수치심 없이 해낸다. 오히려 다들 하는 일을 그 연예인들이 조심성이 없어서 한심하게 잡혔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 사회는 가수 승리와 정준영이 존재하는 것이 당연한 공간이다.

여성단체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거냐는 게으른 비난은 지금 이 순간에도 바위같이 단단한 남성사회를 부수고자하는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이하 한사성)'와 같은 단체에도 여지없이 적용된다. 한국사회 안에 공기같이 흔한 승리들과 정준영들을 제재하고 사이버성폭력 피해자와 함께 하지만, 그런 것은 비난하는 이들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모양이다. 그들의 비난과는 다르게 한사성과 다른 여성단체들은 바위조차 깎아내는 파도처럼 그 운동을 멈춘 적 없다. 그래서 결국 이 여성단체들은 국가가 임시적으로나마 불법촬영물 사이트를 차단할 수 있는 기술을 사용하도록 만들었다. 비로소 사이버성폭력문제는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국가가 책임지고 관리해야하는 위법 행위임이 인터넷을 사용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가시화된 것이다.

#불법촬영물_SNI차단이라는 공론장 사업에 참여하기로 했을 때, 나는 이 공론장이 당연하게도 지금의 불법촬영물 사이트 차단에 대해 어떤 식으로 보완할 것인지, 앞으로는 어떤 방식으로 이 운동을 이어나갈 지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라고 상상했다.

SNI차단이라는 기술을 잘 알지 못해 검색해보니, 불법촬영물(사이버성폭력) 사이트를 우회하여 접속하는 방법이 아주 쉽게 정리되어있는 게시물들을 찾을 수 있었다. 찾고자 함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많은 '잠재적 범죄자'들을 보게 되었고 답답함을 느끼며 공론장을 찾았다.

사회자의 말과 함께 행사가 시작되었을 때 의문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의 상상과는 전혀 다른 논의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발제자는 한사성의 서랑님과 진보네트워크의 미루님이셨다. 한사성 서랑님의 발제는 예상했듯이 사이버성폭력과 SNI차단 시행과 관련한 내용이었고, 미루님의 발제내용은 SNI차단의 한계와 정보인권의 중요성에 대한 내용이었다.

서랑님은 SNI 차단이 사이버성폭력근절의 근본적인 대책이 아님과 준비하고 있는 다른 대책들을 말해주셨다. 반면 미루님은 이때까지 국가가 일방적으로 인터넷사이트를 제재했었던 다른 사례를 들어 SNI차단 정책에 우려를 표했지만, 이것이 피해자의 구제와 대립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셨다.

사회자와 발제자들은 계속해서 이것은 한 쪽으로 결정지어 논의할 필요가 없으며, 사이버성폭력제재와 정보인권은 서로 대결하는 개념이 아님을 밝혔다. 하지만 그것을 강조할수록 이 주제로 함께 얘기한다는 것에 이질감이 느껴졌다. 서로 대립하는 개념도 아니고 사이버성폭력을 근절하고자 하는 공동의 목적을 이야기하고자 함도 아니라면, 어째서 한사성과 진보네트워크가 투톱발제자인 공론장이 만들어진 것인가. 

#불법촬영물_SNI차단이라는 공론장은 진보네트워크를 발제자로 배치하면서 국가가 시민을 대상으로 SNI차단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경계와 우려를 표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이것을 굳이 사이버성폭력 문제와 함께 논의해야만 했던 걸까? 다시 말하자면 국가의 정보인권침해문제를 우려하며 경계하고자 함에 여성의제를 끼워 넣어야만 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SNI차단이 사이버성폭력을 막을 수 있는 실효성이 있을지, 기술적인 한계로 임시적인 조치에 불과한 SNI차단을 사이버성폭력을 끝장낼 정부정책으로 들고 온 이유는 뭔지, 정부는 이미 작년 5월부터 이야기된 SNI차단을 왜 지금 불법촬영 문제와 함께 엮어서 발표하는지 등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정부의 정보인권침해에 경계해야 한다는 미루님의 주장을 들을수록 이 공론장의 구도가 어색해보였다. 

애초에 불법촬영 문제와 얽혀서 토론이 될 사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불법촬영 문제 해결을 위한 불충분하고 미심쩍은 정책을 발표하는 정부도, 그들에게 '저의'가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이를 비판하기 위해 불법촬영 문제를 배치하는 이번 토론회도 실제 여성과 사이버성폭력 피해자의 심정 따위는 고려하지 않은 듯했다.

각 단체가 주장하는 가치와 의제가 아주 중요한 한국사회의 문제이며 사회자와 발제자들이 재차 강조했듯이 서로 대결하거나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라는 것에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한다. 각각의 의제는 하나의 단일하고 개별적인 문제가 아니며 다양한 것들과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여성의제 또한 다른 의제와 같은 무게를 가질 수는 없는 것일까. 그렇게 다양한 것들이 연결되어있다면, 그 많은 것과 연결되어 더 어렵고 무거운 불법촬영물(사이버성폭력)문제가 단 하나의 공론장 사업으로 존재할 수 없었던 것일까.

여성(문제)은 늘 왜 '배치'될까. 우리는 더 큰 상상력을 발휘할 수 없을까? SNI차단이 문제라면 시민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불법적으로 촬영을 하고 유포하는 남성들의 강간문화는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공동체 안의 승리들과 정준영들을 해체하고 또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고민과 분노로 글을 마무리하게 된다. 어쩌면 나와 같은 조에 앉아 바들바들 떨며 '이 얘기하는 것이 화가 난다'고 말하고 입을 닫았던 조원의 마음은 나와 같았을 수도 있겠다.
 
"SNI 차단을 통한 불법촬영물 규제"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내용 정리
▲ SNI 차단을 통한 불법촬영물 규제 "SNI 차단을 통한 불법촬영물 규제"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내용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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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더 이상의 지연된 정의는 지겹다. (홍기정)

정부의 에스엔아이(SNI) 차단을 막는 기술표준이 논의 중이다

2019년 방송통신위원회가 에스엔아이(Server Name Indication) 기술의 한계를 이용한 HTTPS 프로토콜에 대한 차단 기술을 실시했다. 전례 없던 조치의 결과 21만여명의 누리꾼이 청와대 국민청원에 참여해서 장관급인 이효성 방송통신위원장이 답변했다.

위원장의 답변은 현재 정부의 입장을 잘 요약해주고 있다. 위원장은 헌법 제17조, 제18조의 기본권을 존중하고 표현의 자유는 정부의 국정철학이라고 했다. 그리고 통신비밀보호법상 법원영장 없는 감청은 불법행위라고 했다. 그러나 국회, 언론, 국민이 최근 HTTPS 관련 대책을 요구했다고 말했다. "도박과 몰카(불법촬영물) 등 불법성이 명백한 콘텐츠는 국내에서 볼 수 없게 하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방통위는 이번에 "도박 사이트 776 곳과 불법촬영물이 있는 음란사이트 96곳의 차단했다"고 한다. 위원장은 정보통신정책학회장 숙명여대 강형철 교수가 "이번 일은 인터넷 시대 국가규제의 딜레마가 드러났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앞으로 규제의 필요성, 정당성, 문제점과 대안을 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해외 국가간 논의도 더 필요하다고 했다. 창과 방패의 싸움처럼 우위 기술이 있어도 피해자 방치는 안된다고 덧붙였다.

이번 사태에 대해 데일리안의 의뢰로 전국 성인남녀 1003명을 대상으로 RDD 자동응답 방식 여론조사가 있었다. 찬성 36.6%, 반대 39.3%, 모름 24.1%로 비율은 비슷했다. 진보층, 중도진보층, 여성일수록 차단 찬성이 높았고 20대와 60대 반대율이 높았다.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은 ±3.1%p다.

2018년은 미투운동을 비롯한 페미니즘 운동이 일어났다. 웹하드 카르텔 주요 가담자도 처벌받았다. 2019년에는 가수 정준영이 불법촬영물을 촬영하고 유포해서 공론화 되었다. 3월 28일 창비 서교빌딩에서 열린 '불법촬영물 SNI차단 머리를 맞대보아요' 토론회에서 발제자인 서랑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부대표는 불법촬영물의 확산을 막는데 에스엔아이 차단이 실제로 효과적이라고 말했다.

웹하드 카르텔 사건 이전에는 국내 웹하드 업체에 삭제 공문을 보냈지만 이제는 미국의 서버를 이용해 유포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기타 국가들도 미국 서버를 주로 이용한다고 했다. 그런데 미국 서버 운영사는 삭제에 응하는 경우가 적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고 했다. 미국은 주 법으로 비동의 포르노를 차단하고 있는데 연방법이 없어서 미국의 비영리단체인 사이버시민권리구상(CCRI: Cyber Civil Rights Initiative)이 입법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양당이 모두 우호적이라서 조만간 통과될 것 같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차단 중인 온라인 도박 사이트는 미국도 연방법과 주 법으로 규제하고 있다. 그러나 신용카드사를 통한 규제가 주를 이룬다. 도박업체들은 다른 업체를 통해 대신 송금 받는 등의 방법으로 회피하고 있다. 그리고 미국 법은 해외로부터 미국 내로 송금되는데 대한 규제는 약하다. 최근에는 암호화폐를 비롯한 다양한 지불방법이 등장해서 규제가 더 어려워졌다.

정보인권과 불법촬영물에 대한 관심을 일으킨 에스엔아이 차단 기술. 그러나 이 기술의 유효기간은 한시적이다. 현재 암호화된 통신인 HTTPS는 인터넷 트래픽의 80% 정도를 차지한다. 에스엔아이는 HTTPS가 많이 쓰이지 않던 시절에 나온 기술이다. 현재 HTTPS 프로토콜의 명세서인 TLS 1.3 표준 알에프씨 문서에 따르면 암호화된 에스엔아이(ESNI: Encrypted SNI)가 논의 중에 있다.

서버 제공사인 클라우드플레어가 제안했고 관련 업체가 참여하고 있다. 전자프론티어재단(EFF)는 이에스엔아이를 환영했다. 이에스엔아이는 인터넷 주소를 알려주는 디엔에스 서버에서 비대칭암호화를 이용해 에스엔아이를 감추는 기술이다. 현재 파이어폭스 웹브라우저가 시범적으로 이에스엔아이를 도입했다. 크롬이나 엣지 브라우저에도 언젠가는 도입될 것이다. 사실 HTTPS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도 미국 국방부 엔에스에이는 반대했지만 지금은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권장되고 있다. 세계적 암호학자 브루스 슈나이어는 미국국립표준기술연구소(NIST)와 엔에스에이가 HTTPS에 사용되는 난수 생성 부분에 취약점이 있도록 만들어서 백도어와 같다고 말한 적도 있다.

이에스엔아이에 사용되는 비대칭암호화에 쓰이는 공개키기반구조(PKI)도 전적으로 신뢰하기는 어렵다. HTTPS 기술은 이론적으로 중간자공격(Man In the Middle)이 가능하고 실제로도 가능하게 하는 소프트웨어가 나와서 각국 정부가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또, 에드워드 스노든은 미국 대기업들이 미국인과 타국의 정보인권을 침해하며 미국 정부에 협력하고 있음을 폭록했다. 한국에서는 공개키와 비밀키를 서비스하는 루트인증기관(Root CA)도 공공기관인 한국인터넷진흥원(KISA)가 관리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에스엔아이가 보편화되면 방통위는 어떤 대응을 할까?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온라인 규제를 담당할 정당성이 없다. 망중립성, 모욕죄, 명예훼손죄, 국가보안법, 차별금지법, 청소년보호법, 임신중단 등에 대한 다양한 시민의 뜻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고 행정부의 권력을 대리하는 기구일 뿐이다. 규제 이유와 절차도 자의적이고 불투명하다.

진보네트워크센터 정책활동가 미루는 모든 검열이 없는 세상을 바란다고 말했다. 대안을 제시하라는 질문을 많이 받지만 대안 제시는 우리의 의무가 아니라고 말했다. 소크라테스, 예수, 간디, 단테,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브루노, 토머스 모어, 존 로크, 스피노자, 볼테르, 하이네, 톨스토이, 맑스, 루소, 박지원, 정약용… 이들은 모두 검열의 희생자다. 이제 스노든이 이 장구한 검열의 역사를 써나갈 위인들의 블랙리스트에 막 추가되었다. 오늘 우리가 과거의 이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우리의 미래상을 그려볼 수 있다. 이제 더 이상의 지연된 정의는 지겹다.
 
SNI 차단을 통한 불법촬영물 규제 문제를 다룬 진보넷 내용
▲ SNI 차단을 통한 불법촬영물 규제 문제 SNI 차단을 통한 불법촬영물 규제 문제를 다룬 진보넷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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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I 차단, 이거 왜 논의해야 하나요? (추재훈)

두 명이 모종의 오해 때문에 싸우고 있다. 둘을 떨어뜨려놓아야 하나? 강압적으로라도 주먹질을 막아야 하나? 일시적으로나마 더 큰 폭력으로 제지해야 하나? 오해를 푸는 데 도움을 주어야 하나? 둘이 스스로 오해를 풀도록 지켜봐야 하나? 결자해지라며 기다려야 하나? 어떤 방법을 어떤 순서로 취해야 할까?

해결책은 아주 많다. 기본적으로, 문제부터가 복잡하기 때문이다. 원인은 무수하고, 양상도 그때그때 제각각이다. 다양한 해결책이 제시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무수한 해결책 중 무엇이 가장 효과적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가뜩이나 문제가 어려운데, 해결책이 단일하지 않으니 이것도 문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해결책의 형태가 크게 두 개로 간단히 분류된다는 점이다. 근본 원인을 제거하는 것으로 원인요법, 드러나는 증상을 치료하는 것으로 증상요법이 있다. 두 명이 오해때문에 싸울 때, 원인요법은 어떻게든 오해를 푸는 데 집중하는 것이다. 싸움이 격하다면, 우선 떨어뜨려놓는 증상요법이 필요하다.

SNI 차단 방식을 둘러싼 쟁론은 증상요법에 대한 것이었다. 한사성이 SNI 차단에 찬성하면서 근본 해결책이 아니라고 못박은 것도, 진보넷이 SNI 차단에 반대하면서 당장의 불법촬영물 문제를 외면하는 게 아니라고 강조한 것도 같은 이유다.

둘은 원인요법을 등한시하지 않았다. 원인요법은 불법촬영물 문제가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뿌리를 뽑아버리는 것이다. 방법은 간단하다. 불법촬영물의 주 생산자·유통자·소비자들 (주로 남성들)이 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하고, 더 이상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것이다. 교육이 대표적인 방법이다.

그런데 무슨 여유가 있어 교육으로 사회가 변화길 기다리고 있겠는가. 교육으로 바뀌기나 하겠는가. 지금 당장 고통받고 있는 피해자는 어떻게 할 것인가. 당장 5분 뒤에 새로운 피해자가 생긴다면, 어떻게 이를 막을 수 있나. 원인요법이 중요한지 증상요법이 중요한지 따질 계제가 아니다. 당장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지 정해야 한다. 생산·유통·소비자를 처벌하는 것은 범죄 발생 가능성을 없애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증상요법이다. SNI 차단 방식도 마찬가지다.

SNI 차단을 사이에 둔 한사성과 진보넷의 토론은 반드시 필요하다. 논의해야 할 주제가 불법촬영물 제작·유통·소비를 어떻게 근절할 것인가 뿐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두 단체는 불법촬영물 문제를 원천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근원적인 해결을 모색해야 한다는 데 이견이 없다.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가 근원이자 핵심이라는 점은 당연하고, 이를 재생산하는 주체가 대부분 남성이므로 남성사회의 본질적 개선이 필요하다는 점도 당연하다. 다만 시간이 오래 걸리므로, 당장의 긴급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책이 필요하다는 점도 당연하다. 그렇다면 그 방법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SNI 차단이라는 방법은 어떤가. SNI 차단 방식에 대한 논의는 지금 당장 발생하고 있는 범죄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를 다룬다는 점에서 중대한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다.

이건 명백하게 중요한 문제다. 여기까지가 공론장에 참여하기 전의 생각이다. 공론장은 이게 무슨 문제인지, 중요한지 아닌지를 함께 찾아나가는 장소였다. 틈틈이 "왜 이 문제를 논의해야 할까" "우린 무슨 논의를 해야 할까" "무엇이 중요한 문제일까"라는 의문이 제기됐다. 즉,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아나가야 할지 드러난 증상부터 해결해야 할지를 묻는 자리였다. 두 건의 후기도 마찬가지였다. 한 분은 우리가 왜 SNI 차단을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한 분은 우리가 왜 근원적인 문제부터 짚어야 하는지를 강조했다. 다만 주어진 시간이 짧아 물음에서 그쳤다. 접점을 찾을 시간이 부족했다.

접점을 찾으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오해 때문에 발생한 싸움을 해결할 방법과 그 순서를 정하려면, 알아야 할 것들이 많다. 둘의 관계, 오해의 강도, 오해의 주제, 갈등의 배경, 싸움의 심각한 정도 등이다. 이걸 파악해야 원인요법과 증상요법 중 무엇이 우선되어야 할지 결정할 수 있다. 만약 두 명이 서로를 죽일 듯이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당장 떼어내야 한다. 그런데 오해가 3초만에 해명될 수 있는 것이라면 굳이 떼어내지 않아도 된다. 두 명이 서로 아끼는 관계고 싸움의 정도가 심하지 않다면, 당장 떼어내기보단 진정시키고 대화를 시도할 수 있다. 그런데 오해가 몇 년 동안 켜켜이 쌓인 것이라면, 우선 떼어놓는 것도 방법일 수 있다. 근본을 찾을지, 증상을 돌볼지 정한다면, 해결 방법을 비교적 용이하게, 그러면서도 섬세하게 설계할 수 있다.

SNI 차단 방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불법촬영물 문제가 사회적으로 어떤 영역까지 퍼져있는지, 각 영역의 특성은 무엇인지, 각 영역에서 발생하는 갈등의 양상은 어떠한지, 이런 것들이 사회적으로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 불법촬영물의 피해가 심각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으나, SNI 차단을 통해 문제가 어느 정도로 해결될 수 있는지, 부족하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SNI 차단이 감청이라면 어느 정도로 심각한 수준인지, SNI 차단으로 어떤 부작용이 발생할지, 이들의 경중을 잴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해야 한다. 배경을 면밀하게 고려하지 않으면 알맞은 해결책을 도출할 수 없다.

'배경'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 '배경지식'이 필요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경중을 따질 판단의 기준과 그걸 설득력으로 제시할 근거가 있으면 된다. 그 근거는 지식일 수도 있지만, 사례일 수도, 자신의 세계관일 수도, 중시하는 사회적·도덕적 가치일 수도 있다.

한사성과 진보넷은 배경을 면밀하게 고려해 자신의 주장을 세웠다. 한사성은 지금 당장 발생하는 불법촬영 피해자를 구제하는 게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고 말한다. 때문에 SNI 차단이 미봉책이라도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필요하다. 진보넷도 당장의 피해자를 구제하는 게 중요하다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SNI 차단 방식으로는 불법촬영 피해자 구제라는 득보다 소수자에 대한 새로운 탄압이 강화되는 실이 더 크다고 말한다.

공론장에선 이들의 주장을 바탕으로, 우리가 왜 이 문제를 논의해야 하는지 토론이 진행됐다. 그 다음엔 SNI 차단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SNI 차단이라는 증상요법을 긍정적으로 평가할지 부정적으로 평가할지, 그 근원에 있는 불법촬영물 범죄를 해결할 장기적 방책은 무엇인지 논의되었을 것이다. 진보넷 미루 활동가의 말처럼, 비판을 위해 대안을 제시해야만 하는 건 아니다. 불법촬영물 문제의 시급한 해결을 위해 어떤 현실적인 방책을 세워야 할지 끊임없이 논의하는 게 중요하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논의의 기반을 고찰하는 좋은 시작지점을 함께 모색하려 했으나, 논의 시간이 부족해 거기에서 끝났다는 것이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정신과 의사이자 심리치료사인 고든 리빙스턴은 심리치료중에 내담자에게 자주 이런 질문을 던진다. 변화를 목표로 적극적으로 행동을 변화시켜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적극적인 행동이란 미봉책일지라도 시급한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는 것이며, 이런 작은 발걸음을 통해 삶의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것이다. 공론장은 '해결책'을 찾는 곳이 아니다. 두 명의 싸움조차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사회적 문제는 말할 필요도 없다. 해결책을 찾지 못할 가능성이 더 크다. 다만 해결책을 찾기 위해 언제나 적극적으로 행동할 수는 있다. 어쩌면, 그 행동이 해결책이다. 이번 공론장에서 실망한 사람이 많이 눈에 띄었지만, 수많은 실망 속에 해결책의 씨앗이 싹틀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바꿈 홈페이지 중복 게재됩니다.


태그:#공론장, #민주주의, #인터넷, #SNI,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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