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파도치는 땅> 포스터

영화 <파도치는 땅> 포스터 ⓒ 전주국제영화제


최근 문성(박정학 분)은 일상이 힘에 부치기만 하다. 운영하던 학원 사업은 실패하여 여기저기에 돈을 구하러 다니는 상황인데 아들 도진(맹세창 분)마저 미국 유학을 포기하고 연상의 싱글맘 윤아(양조아 분)와 결혼을 하겠다며 고집을 부린다. 어느 날, 소식을 끊은 채로 지내던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는다.

오래전에 간첩 조작 사건에 연루되어 옥살이까지 한 아버지는 최근 무죄 판결을 받고 국가보상금으로 상당한 유산을 남겼다. 오랜만에 고향 군산에 내려간 문성은 그곳에서 아버지를 간병하는 은혜(이태경 분)를 만난다. 그녀는 아버지를 빨갱이로 밀고했던 자의 손녀다. 아버지의 보상금을 노린다고 생각한 문성은 은혜와 다툼을 벌인다.

영화 <파도치는 땅>은 간첩 조작 사건에 연루된 가족의 고통이 대물림되는 연대기를 소재로 삼았다. 연출을 맡은 임태규 감독은 전작 <폭력의 씨앗>에서 군대와 사회로 순환되는 폭력을 조명한 바 있다. <파도치는 땅>은 역사의 상흔이자 국가의 폭력인 1967년 납북 어부 간첩 조작 사건을 다룬다. 어떻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까? 임태규 감독은 한 장의 사진에서 영화가 출발했다고 이야기한다.

"지난해 초 <폭력의 씨앗>을 편집하고 있던 당시 주간 잡지 <한겨레 21>에 실린 납북 어부에 대한 특집 기사를 굉장히 인상적으로 읽었다. 한 피해자가 법원 앞에서 울먹거리며 찍힌 사진에서 여러 가지 감정이 느껴지더라. 그리고 그분뿐만 아니라 그분 가족의 인생이 무척 궁금해졌다. 아마 그 아들은 40~50대 즈음의 중년일 테고, 그 사람에게도 자식이 있을 텐데, 삼대의 마지막 자식까지고 온전히 국가폭력의 피해가 전이됐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2018년 5월 23일 <씨네21> [전주에서 만난 감독들③] <파도치는 땅> 임태규 감독, "우리가 해야 할 일에 방점을 찍고 싶었다")
 
 영화 <파도치는 땅>의 한 장면

영화 <파도치는 땅>의 한 장면 ⓒ 전주국제영화제/투영2필름


<파도치는 땅>은 전작 <폭력의 씨앗>과 마찬가지로 '국가폭력'을 사유하지만, 영화의 스타일에선 많은 차이를 드러낸다. 먼저, 공간은 구체화하여 의미를 얻는다. 영화는 후반으로 갈수록 군산의 풍경을 많이 담는다. 영화의 주요 무대인 군산은 과거에 실제로 간첩 조작 사건이 발생한 지역이다. 역사의 상처는 아물지 않은 채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영화는 군산의 변한 풍경과 사는 사람들을 화면에 담아 과거와 현재를 중첩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저' 살아갈 뿐이고 세상은 '여전히' 좋아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임태규 감독은 <파도치는 땅>이란 제목을 붙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야기를 군산으로 정해서 찍은 이유도 그곳에 어떤 현대사의 찌꺼기들이 여전히 남아 있는데 그런 것들이 수면 위로 잘 드러나지 않고 덮여 있는 느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바다들이 땅으로 변했는데 그 땅 아래에는 실제로 파도가 치고 있지는 않겠지만, 가려진 어떤 것 밑에는 우리가 갖고 있는 상처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2018년 12월 3일 < NOW > [인터뷰] '우리가 밟고 있는 땅에서 파도 소리가 들린다면' _<파도치는 땅> 임태규 감독)
 
 영화 <파도치는 땅>의 한 장면

영화 <파도치는 땅>의 한 장면 ⓒ 전주국제영화제/투영2필름


<폭력의 씨앗>은 인물을 가까이에서 포착하는 거친 핸드헬드 촬영으로 만들었다. 반면에 <파도치는 땅>은 고정된 카메라와 롱테이크 위주로 화면을 구성한다. 전작이 4: 3 화면비를 사용하여 갇힌 정서를 전했다면, 이번엔 구도를 통하여 갇힌 느낌을 낸다. 초반에 나오는 아파트 복도, 자동차 안, 문 등을 쓴 장면이 대표적이다. 후반으로 갈수록 풍경을 활용하여 화면은 점차 넓어진다. 마치 인물의 변화처럼 말이다. 인물이 거울 속에 나오는 장면도 많다.

"프레이밍을 사용해서 그 상황에 맞게 인물 관계나 상황들을 보여주자고 생각했다. 특히 거울을 이용해서 찍은 이유도 그 상황에 인물들이 느끼는 마음을 직접 보기 싫어서였다. 조금 더 멀리서 보는 느낌이었다." 2018년 12월 3일 < NOW > 인터뷰.

거울의 이미지는 다른 기능도 갖고 있다. 바로 자신을 비추는 거울상이다. 은혜는 앞선 세대의 상처를 치유하고 아버지와 화해한다. 은혜와 윤아를 감싸 안는 도진은 깨진 가족의 복원을 의미한다. 은혜와 도진은 과거, 그리고 현재의 문성이 그렇지 못했음을 비추는 거울상인 셈이다.
 
 영화 <파도치는 땅>의 한 장면

영화 <파도치는 땅>의 한 장면 ⓒ 전주국제영화제/투영2필름


<파도치는 땅>은 간첩 조작 사건과 함께 세월호 참사가 영화 곳곳에 나온다. 영화 후반부엔 간첩 조작 사건 영상과 세월호 참사의 영상을 교차 편집으로 보여준다. 영화는 간첩 조작 사건과 세월호 참사 희생자의 가족들이 기다리는 모습을 통하여 이들은 피해자이며 지금도 국가폭력은 자행된다고 고발한다. 임태규 감독은 "대한민국이란 땅 아래 가려져 파도치듯 일렁이는 아픔을 말하고자 했다"고 설명한다.

"삼대의 이야기를 통해 공적인 역사에 가려진 이름 없는 사람들의 생존 이야기를 하려 한다. 과거의 부조리한 삶이 여전히 동시대적인 삶이라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고, 게다가 우리는 국가의 폭력과 다름없는 구조적 문제를 지닌 재난 참사를 겪었다. 이제는 그 아픔의 현장을 넘어 '생존'하기 위해 숙명적으로 불편할 수밖에 없는 아버지와 아들의 화해를 기대해 본다." 임태규 감독이 밝힌 <파도치는 땅> 연출 의도.

영화 속에 새해를 맞이하는 장면이 나온다. 새해를 기다리는 마음처럼 임태규 감독은 내일을 긍정하는 시각으로 영화를 마무리한다. 도진은 윤아의 딸을 만나 함께 놀아준다. 아이는 배를 만들고 있고 머리엔 노란색 리본이 달려있다. 그런 모습을 거울 속에 비친 문성이 지켜보고 있다. 문성은 비로소 화해란 거울상을 만난 것이다. 그렇게 희망은 싹이 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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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당 24프레임의 마음으로 영화를 사랑하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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