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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뚝은 독특한 우리문화의 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굴뚝은 오래된 마을의 가치와 문화, 집주인의 철학, 성품, 그리고 그들 간의 상호 관계 속에 전화(轉化)되어 모양과 표정이 달라진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오래된 마을 옛집굴뚝을 찾아 모양과 표정에 함축되어 있는 철학과 이야기를 담아 연재하고자 한다. - 기자말
  
용문면사무소 앞 정경  사괴당 변응녕이 심은 네 그루 느티나무 중 한 그루만 살아남아 마을을 지킨다. 느티나무 그늘 아래 낡고 삭고 나이 들어가는 키 작은 건물들은 7,80년대 언저리에 나를 데려다 놓았다.
▲ 용문면사무소 앞 정경  사괴당 변응녕이 심은 네 그루 느티나무 중 한 그루만 살아남아 마을을 지킨다. 느티나무 그늘 아래 낡고 삭고 나이 들어가는 키 작은 건물들은 7,80년대 언저리에 나를 데려다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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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방앗간, 삭은 슬레이트지붕, 먼지 쌓인 점포, 한적한 이발소... 500년 묵은 느티나무 아래 드리운 경북 예천 용문면사무소 앞 풍경이다. 70, 80년대에 멈춰버린 풍경들, 바로 곁에 둔 오래된 마을 금담실마을을 닮아가고 있다. 겨우내 매서운 바람을 머금은 송림은 살랑살랑 봄바람을 뱉어내고 낡고 삭은 구조물은 날선 마음을 늘어지게 한다. 나른하고 평안하다. 용문은 예로부터 전란과 역병으로부터 안전하다는 십승지의 하나라더니 말뿐만은 아닌 것 같다.
  
금당실 송림 수해와 매서운 북서바람을 막으려고 심은 마을 숲이다. 서쪽의 사악한 기운을 막는 비보숲으로 지금은 마을사람들 쉼터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 금당실 송림 수해와 매서운 북서바람을 막으려고 심은 마을 숲이다. 서쪽의 사악한 기운을 막는 비보숲으로 지금은 마을사람들 쉼터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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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가마을에 뿌리내린 성씨들

예천권씨, 안동권씨, 함양박씨, 원주변씨, 의성김씨, 내로라하는 성씨들이 저마다 사연을 달고 살기 좋은 용문에 모여들어 마을을 일궜다. 면사무소에 바짝 붙어 있는 금당실마을을 시작으로 동쪽 고개 너머 큰맛질, 작은맛질, 맛질마을과 금곡천 건너 서쪽에 대수마을, 대수마을 남쪽 귀퉁이에 구계마을까지 금당실을 중심으로 10리 안에 네 마을이 들어섰다.

금당실과 작은맛질, 구계마을은 사위가 처가마을에 들어와 뿌리를 내린 마을이다. 기존 마을사람들과 마찰이 상당히 심했으리라 짐작되지만 조선중기에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남녀차별 없이 재산을 균등하게 분배한 분재기(分財記)를 살펴보면 조선중기 사회상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는 있다. 작은맛질의 입향조, 권의의 분재기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재산일부를 따로 떼어놓고 나머지 재산을 7남1녀에게 균등하게 분배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사위가 처가 재산을 물려받아 마을을 번성시키는 것이 당시에는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우리 동네 둥구나무에 추억 한 가닥 안 걸린 사람은 우리 마을사람이 아녀"라고 듣고 자란 나에게는 외지인, 특히 다른 마을에서 이사 온 뉘 집 사위나 타성(他姓)에 대한 배타 감정이 지금이 훨씬 심한 것처럼 보인다.

이 네 마을은 안동을 매개로 인맥과 혈맥, 학맥으로 얽혀 있다. 대수마을은 예천권씨가 세거한 마을로 마을 중심인물, 권문해는 안동 내앞마을 의성김씨 학봉 김성일과 교유하였다. 이런 연으로 김성일의 동생, 남악 김복일(1541-1591)은 권문해의 누이와 결혼하여 구계마을에 남악종택을 짓고 세거하였다. 구계는 예천권씨 대수마을의 사위마을인 셈이다.
  
금당실마을 전경   금당실마을 뒷산, 오미봉에서 내려다본 마을 전경이다. 용문면사무소에서 시작하여 오미봉 바로 아래 금곡서원까지 둥근 터에 자리 잡았다. 서쪽에 금곡천이 흐르고 바로 곁에 마을 숲, 송림이 마을을 감쌌다.
▲ 금당실마을 전경  금당실마을 뒷산, 오미봉에서 내려다본 마을 전경이다. 용문면사무소에서 시작하여 오미봉 바로 아래 금곡서원까지 둥근 터에 자리 잡았다. 서쪽에 금곡천이 흐르고 바로 곁에 마을 숲, 송림이 마을을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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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계마을 남악종택 사랑채인 가학루가 안채와 문간채에 비해 크게 지어졌다. 휜 통나무를 기둥으로 그대로 사용하여 자연미를 살렸다. 그 위용이 대단하여 멀리서도 눈에 띈다.
▲ 구계마을 남악종택 사랑채인 가학루가 안채와 문간채에 비해 크게 지어졌다. 휜 통나무를 기둥으로 그대로 사용하여 자연미를 살렸다. 그 위용이 대단하여 멀리서도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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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당실은 500년 전 애초 감천문씨가 터 잡고 살던 마을이었다. 문씨 문중에 아들이 없자 두 사위를 불러들였다. 큰사위는 함양박씨 박종린(1496∼1553)이고 둘째사위는 원주변씨 변응녕(1518-1586)이다. 그 후 금당실은 두 성씨의 집성마을이 되었다.

작은맛질은 문경송씨가 살고 있었으나 후손이 없자 사위인 밀양손씨에게 터전을 물려주었다. 그러나 밀양손씨에게도 손이 없자, 사위 안동권씨 권의(1475-1558)가 들어와 마을을 일궜다. 큰맛질은 함양박씨의 후손, 박세주가 1650년 금당실에서 이사와 세거한 마을이다.

금당실마을

마을의 역사에 비해 금당실은 추원재, 반송재고택과 사괴당고택 말고는 이렇다할 오래된 집이 없다. 그나마 볼 만한 집은 우천재, 광서당, 진사당, 김대기가옥, 유촌초옥, 월당화옥, 금곡초당, 경담재, 오미서소, 덕용재다. 지은지 그리 오래되지 않아 대접을 제대로 못 받고 있지만 오래된 집터에 저마다 속 깊은 내력을 달고 있다.
  
금곡서원 정경  오미봉 바로 아래에서 마을을 빛낸다. 고려후기 문신 박충좌, 금당실 입향조, 박종린의 아버지 박눌, 마을의 인물 박손경을 기리는 서원이다.
▲ 금곡서원 정경  오미봉 바로 아래에서 마을을 빛낸다. 고려후기 문신 박충좌, 금당실 입향조, 박종린의 아버지 박눌, 마을의 인물 박손경을 기리는 서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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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당실 마을담 초가집, 기와집의 흙돌담과 돌담은 굽고 펴기를 반복하여 온 마을을 휘 젓더니 마을담이 되었다.
▲ 금당실 마을담 초가집, 기와집의 흙돌담과 돌담은 굽고 펴기를 반복하여 온 마을을 휘 젓더니 마을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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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담은 돌담과 흙돌담이 번갈아, 굽었다 폈다 하며 오미봉 아래까지 이어진다. 예전에는 마을길이 미로처럼 얽혀 길을 찾기가 어려웠다 하나 지금은 예전 모습을 많이 잃었다. 한때 새우젓장사가 외상값을 받으려다 길을 제대로 찾지 못해 돌아섰다는 얘기도 들린다. 마을 가운데 길은 꽤 넓지만 양 옆으로 지게 하나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은 지겟길이 벌어 있다.
  
금당실 지겟길 “차량은 지게에 양보하세요.” 남북으로 차 한 대 다닐 정도 마을길이 나있고 양쪽에 발채를 얹은 지게 하나 겨우 지나갈 만한 좁은 지겟길이 벌었다.
▲ 금당실 지겟길 “차량은 지게에 양보하세요.” 남북으로 차 한 대 다닐 정도 마을길이 나있고 양쪽에 발채를 얹은 지게 하나 겨우 지나갈 만한 좁은 지겟길이 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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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깊숙이 있는 추원재와 사당은 입향조 박종린을 기리고 금곡서원은 함양박씨 집안을 빛낸다. 함양박씨 문중에 눈에 띄는 인물이 있다. 이상정, 최흥원과 함께 영남삼로로 추앙받는 남야 박손경(1713-1782)이 이 마을에서 태어났다. 마을 동쪽 끝에 남야선생 사당이 있다. 이 마을사람은 아니지만 문경에서 태어나 일왕을 살해하려다 미수에 그친 박열(1902-1974)은 박종린의 직계손이다. 최근 영화로 만들어져 새롭게 주목받는 독립운동가다.

반송재고택의 '도깨비 굴뚝'
  
반송재고택 사랑채 굴뚝 반송재고택은 사랑채에 후원이 조성되어 있는 점이 특이하다. 이 후원에 두 기의 굴뚝이 사랑채 벽에 낮은 자세로 붙어있다. 이끼가 덮여 있어 불김이 사라진 지 오래돼 보이지만 그리 허망해 보이지 않는다.
▲ 반송재고택 사랑채 굴뚝 반송재고택은 사랑채에 후원이 조성되어 있는 점이 특이하다. 이 후원에 두 기의 굴뚝이 사랑채 벽에 낮은 자세로 붙어있다. 이끼가 덮여 있어 불김이 사라진 지 오래돼 보이지만 그리 허망해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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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송재고택은 마을 한가운데 있다. 남악 김복일의 증손, 김빈이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하여 17세기 말엽에 지은 집이다. 이후 이유인이 매입하여 1899년에 현 집터로 이건하였다. 사랑채 뒤에 후원이 있는 점이 특이하다. 둥글둥글한 자연돌로 이층화계를 쌓고 두 기의 굴뚝을 세웠다. 사랑채 벽에 바싹 붙어 있는 굴뚝은 이끼가 두둑하다. 굴뚝에 이끼가 끼면 죽은 굴뚝으로 간주되지만 황토칠을 한 새로 만든 굴뚝에 비해 그리 허망해보이지 않는다.

안채굴뚝은 연가 모양이 우스꽝스럽다. 사악한 기운을 막으려는 벽사(辟邪)의 의미로 도깨비를 표현하려 한 것인지 양쪽에 뿔이 튀어나와 있다. 경복궁 자경전이나 아미산 굴뚝에도 귀면을 새긴 벽사상이 있는 걸 보면 영 동떨어진 얘기는 아니다. 암막새를 두 개 연결하면 이런 뿔 모양이 되는데 이 굴뚝연가는 수키와에 암키와를 덧대 만들었다. 청송 송소고택 별당 굴뚝연가와 똑같이 생긴 걸 보면 적어도 멋만 내려고 한 연가는 아닌 듯싶다.
  
반송재고택 안채 굴뚝 뿔이 나있는 연가는 도깨비처럼 보인다. 굴뚝을 만들 때 벽사의 의미로 귀면을 새기는데, 도깨비 형상 연가는 벽사의 의미 아닌가 싶다.
▲ 반송재고택 안채 굴뚝 뿔이 나있는 연가는 도깨비처럼 보인다. 굴뚝을 만들 때 벽사의 의미로 귀면을 새기는데, 도깨비 형상 연가는 벽사의 의미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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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락부자의 몰락

사괴당고택은 용문면사무소 남쪽에 붙어있다. 원주변씨 입향조, 사괴당 변응녕(1518-1586)의 집이다. 현재 집은 18세기말~19세기초에 지은 것이다. 사랑채는 헐리고 'ㄷ' 자 모양의 안채만 남아 집안이 썰렁해 뵌다. 집 앞에 커다란 연못을 만들어 느티나무 네그루를 심었다 하는데 세 그루는 죽고 방앗간 앞 한그루만 남아 마을을 지키고 있다.
  
사괴당고택 안채 사랑채는 헐리고 ㄷ 자 모양의 안채만 남았다. 대문과 안채 사이가 휑하게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집터는 감나무와 대나무가 지킨다더니 감나무, 대나무만 남아 이 큰 집을 지킨다.
▲ 사괴당고택 안채 사랑채는 헐리고 ㄷ 자 모양의 안채만 남았다. 대문과 안채 사이가 휑하게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집터는 감나무와 대나무가 지킨다더니 감나무, 대나무만 남아 이 큰 집을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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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괴당고택 동쪽에 붙어 있는 터가 한때 99칸 대저택이던 이유인 집터다. 너른 집터에 소나무 두 그루가 이 집안의 흥망성쇠를 지켜보고 있다. 이유인의 행적이 요상하다. 그의 감투나 행적을 감안하면 생몰미상이 납득이 가지 않는 데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는 행적을 알 수 없다. 그가 쓴 감투만 해도 열거하기 어렵다. 파주목사, 양주목사, 법무대신에 경상북도 관찰사를 지내고 사이사이 구속과 석방, 유배와 해배, 복직을 반복하였다.

대략 알려진 얘기는 명성황후의 신임을 받던 무당 진령군(신령군)이 이유인을 아들로 삼고 진령군이 인사권을 휘둘러 이유인을 고관대작 요직을 두루 거치게 했다는 것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국정농단을 일삼은 신령군 밑에서 승승장구하여 벼락출세를 한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얘기가 황현의 <매천야록>에 기록되어 있다. '이유인은 명성황후의 총애를 받던 무녀 진령군과 가까이 하여 양주목사 직을 얻었다.'

이유인의 99칸 집은 벼락출세로 얻은 막대한 자금으로 지은 것으로 보인다. 유사시 이궁(移宮)을 하여 고종을 여기에 모시려했다는 말도 떠돈다. 마을사람 말로, 이유인이 집을 짓는데 인부를 반강제적으로 동원시킨 데다가 게으름을 피우면 매질까지 했다 하고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인부가 기둥을 거꾸로 세웠다 한다. 기둥을 거꾸로 세우면 집안이 망한다는 속설이 있어서인지, 그 후 점차 가세가 기울어 집이 헐렸다는 얘기가 전한다.
  
이유인 집터 애초 99칸 집으로 지어졌다는데 흔적 없이 사라졌다. 집주인의 행적과 더불어 대저택이 사라진 이유가 궁금하다.
▲ 이유인 집터 애초 99칸 집으로 지어졌다는데 흔적 없이 사라졌다. 집주인의 행적과 더불어 대저택이 사라진 이유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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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칸 집이 왜 흔적 없이 사라졌을까? 벼락부자는 왜 흔적 하나 남기지도 않고 몰락을 하였을까? 이유진의 반일행적과 함께 이궁을 꿈꾼 것과 관련 있는지, 아니면 당대 세도가에 대한 민심의 이반인지 궁금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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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不自美 因人而彰(미불자미 인인이창),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무정한 산수, 사람을 만나 정을 품는다

오마이뉴스 에디터.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은경의 그림책 편지',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를 연재합니다. 2017년 그림책에세이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를 출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