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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이 촛불혁명의 승리로 우리 사회 민주화의 새로운 전기를 맞은 해였다면 올해 2019년은 3.1혁명(3.1운동) 100주년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를 기념하여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유산을 많이 가지고 있는 서울 동작구를 '동작 민주올레'라는 이름으로 구석구석 탐방하면서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되새기는 시간을 갖고 있다. 탐방은 총 여섯 개 길(대방길, 노량진길, 흑석길, 신대방길, 상도길, 현충원길)로 나누어 진행하며, 코스별로 6~7회에 걸쳐 연재한다. '대방길'과 '노량진길' '흑석길' '신대방길'에 이어, 이번에는 '상도길'이다. - 기자 말

▶ 코스안내 : ①숭실대학교 - ②부부독립운동가 박영준·신순호 집 터 - ③김영삼대통령기념도서관과 사저 - ④상도동 철거투쟁의 현장 - ⑤현대판 송덕비 <동작을 빛낸 인물> - ⑥복개천(상도천, 대방천) - ⑦장승배기 장승 - ⑧'원충연 반정부음모 사건'과 우덕주 대령 
 
우덕주 대령의 아들 우종범 씨는 동작공동체라디오 동작FM의 <낭만과 전설의 동작구>158회 - "원충연 반정부음모 사건과 우덕주 대령"편에 출연하여 아버지 우덕주 대령이 상도동에서 장기간 가택연금 생활을 했다는 사실을 증언하였다.
▲ 동작공동체라디오 동작FM에 출연하여 <원충연 반정부음모 사건>을 증언하는 우종범(왼편) 우덕주 대령의 아들 우종범 씨는 동작공동체라디오 동작FM의 <낭만과 전설의 동작구>158회 - "원충연 반정부음모 사건과 우덕주 대령"편에 출연하여 아버지 우덕주 대령이 상도동에서 장기간 가택연금 생활을 했다는 사실을 증언하였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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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실대에서 시작된 동작 민주올레 상도길 탐방은 장승배기 장승을 만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하지만 미처 말하지 못한 이야기가 있다. 박정희 정권 시절 상도동에서 독재자 박정희에 의해 14년간 가택연금 상태로 생활했던 우덕주 대령(1922~2002) 이야기다.

상도동에서 가택연금 당했던 인물하면 누구나 쉽게 상도동계를 이끌며 김대중 전 대통령(DJ)와 더불어 야당을 이끌던 김영삼 전 대통령(YS)를 떠올리게 마련이다. 우덕주 대령은 당연히 낯선 인물이다. 그는 누구이고, 무슨 이유로 박정희 독재 정권 시절 상도동에서 무려 14년간 가택연금을 당하며 살아야 했던 것일까?

5.16쿠데타 세력, '반혁명음모 사건'을 만들어 비주류를 제거하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박정희는 1961년 5월 16일 새벽에 노량진에서 한강대교를 건너 육군본부와 중앙청을 장악하고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설치해 권력을 손에 넣었다. 박정희와 김종필은 이를 '구국의 결단'이라고 했고 스스로를 '혁명주체'라고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 쿠데타 세력은 무슨 뚜렷한 목표 의식을 가진 혁명세력이기는커녕 군 인사에 대한 불만, 자신들의 출세욕과 권력욕 때문에 쿠데타에 가담했다. 그런 관계로 쿠데타 직후부터 논공행상이나 자리다툼을 비롯한 내부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이에 대한 박정희 세력의 해결 방법은 이른바 '반혁명 사건'을 조작한 후, 그것을 핑계로 반대자들을 제거하는 일이었다.

5.16쿠데타에 성공한 이후 1963년 12월 17일 박정희가 5대 대통령에 취임하기 전까지 발생한 '반혁명사건'이 무려 13건이나 됐다. 물론 대부분은 쿠데타 주도 세력 내부의 권력 다툼이나 야당 죽이기, 중앙정보부의 업적 과시용으로 조작된 사건이었다.

제일 먼저 5.16쿠데타 이후 불과 두 달만에 장도영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반혁명 사건'으로 제거됐다. 이때 쿠데타 핵심 세력으로 군부대를 동원했던 육사 5기 문재준 헌병감, 박치옥 공수단장 등도 김종필을 중앙정보부장 자리에서 몰아내려 한 사건이 확대돼 장도영과 함께 제거됐다. 이 사건은 쿠데타 세력 내 평안도 출신을 제거했다는 점에서 '텍사스 토벌작전'으로 불리기도 했다.

'원충연 반정부음모 사건'과 원충연 대령
  
원충연, 박인도, 이인수, 우덕주 등이 관련된 <원충연 반정부음모 사건>은 원충연과 박인도가 사형 선고를 받는 등 형량도 대단히 높았고, 다른 '반혁명 사건'과 달리 실체가 있는 사건으로 인식되어 왔다.
▲ <원충연 반정부음모 사건> 1심 재판 결과를 전하는 동아일보 기사(1965. 7. 31) 원충연, 박인도, 이인수, 우덕주 등이 관련된 <원충연 반정부음모 사건>은 원충연과 박인도가 사형 선고를 받는 등 형량도 대단히 높았고, 다른 "반혁명 사건"과 달리 실체가 있는 사건으로 인식되어 왔다.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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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반혁명 사건' 중에는 1965년에 벌어진 '원충연 반정부음모 사건'도 있었다. '원충연 반정부음모 사건'의 주범 원충연 대령은 재판정에서도 자신이 왜 박정희를 제거하려고 했는지 당당히 주장해 다른 '반혁명 사건'과 달리 최근까지도 실체가 있는 사건으로 인식되고 있다.

원충연 대령은 1961년 5.16쿠데타 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실장을 맡았다. 나름 요직에 있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5.16쿠데타에 가담한 인물은 아니었다. 원충연 대령이 주서독대사관 초대 무관으로 부임해 임기를 마치고 귀국한 직후 5.16쿠데타가 일어났다.

원충연 대령에 따르면 쿠데타 세력이 자신을 찾아와 혁명공약을 보여주면서 함께 하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군의 정치개입에 대해 옳지 않다고 생각해 거절했지만, 더 이상의 혼란이 있으면 안 되겠다 싶어서 민정이양을 약속한 혁명공약을 믿고 가담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하지만 가까이에서 본 박정희는 민정이양 약속은 계속 미루고 권력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고, 크게 실망한 원충연은 1년 만에 공보실장을 그만두고 군에 복귀했다.

그런데 박정희가 "2년 뒤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군에 복귀하겠다"고 한 혁명공약을 어기고, 군복을 벗고 스스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당선하는 걸 보면서 용납할 수 없었다고 했다. 결국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동료들과 박정희를 몰아내는 '혁명'을 일으키겠다는 구상을 하게 됐단다.

다만, 구체적인 실행 단계로 발전하지 못한 상황에서 계획이 발각됐다. 1965년 5월 원충연 대령을 비롯한 현역 군인 16명과 민간인 3명이 국가보안법과 군형법 위반 혐의, 내란음모 혐의 등으로 육군 방첩부대에 붙잡혔다. 그러면서 '원충연 반정부음모 사건'이 알려지게 됐다.

이 사건이 사전에 발각된 데에는 육군 방첩대 소속 이상열 중령이 원충연 대령과 여관방에서 나눈 대화 녹취록이 핵심 역할을 했다. 이에 대해서는 사건 당시에도 한지로 발령난 이상열이 이를 만회하기 위해 유도해낸 결과물이라는 지적이 있었다. 이상열은 한참 후인 1979년에는 파리에서 벌어진 '김형욱 실종사건'에도 깊이 관여한다.

사형을 선고받은 원충연 대령은 얼마 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받아 복역하다가 1969년에는 15년형으로 감형됐다. 그리고 1981년에야 특별 사면으로 감옥에서 나오게 된다.

원 대령은 이력이 좀 특이하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주오대학을 다녔고, 해방 이후에는 서울대 대학원을 1회로 졸업하고 서울대 정치학과에서 전임강사를 지냈다. 육사 출신은 아니었다. 원충연의 증언에 따르면 그가 군에 들어간 것은 1948년 11월 여순사건이 터지면서 군의 정신무장이 필요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당시 그는 서울대 강사 2명, 졸업생 10명과 함께 정훈 1기로 군에 투신했다고 한다. 원 대령은 1981년 특사로 나온 직후 <중앙일보>와 한 인터뷰에서 "대학 강단에 서서 민주주의를 가르치고 민주주의를 지향하던 내가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일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원충연 반정부음모 사건'은 원 대령이 2004년 사망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묻히는 듯했다. 그런데 2014년 유족들이 재심을 청구했고, 법원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다시 한 번 여론의 주목을 받는다.

유족들은 "원충연 대령이 '대한민국의 기본 질서를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군사정권을 몰아내고 진짜 민주주의를 실현하고자' 쿠데타를 계획했으니 무죄"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담당 판사의 판단은 달랐다. 

법원은 "원충연 대령과 동료들이 계획대로 군 병력을 동원해 국방부 장관, 중앙정보부장 등 정부 요인을 체포하고 박정희 대통령 하야와 국회 해산까지 추진한 점은 국가보안법 위반"이라고 판결했다. 현역 군인들이 쿠데타를 모의한 것이 사실이므로 "군형법도 위반했다"라고 인정했다.

하지만 재심 결과는 무죄 선고를 기대했던 유족들에게는 실망스러운 결과였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라면서 쿠데타라는 방법을 쓴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취지의 판결을 한 것이다.

우덕주 대령, '원충연 반정부음모 사건'에 휘말리다

'원충연 반정부음모 사건'에 연루된 인물 중에는 우덕주 대령도 있었다. 우덕주 대령은 당시 육군본부 정보참모부 기획관리과장으로 있었다. 그는 '육사 8기 특기' 출신이었는데, 원충연 대령과는 고향이 같았다. 함경남도 출신이었다.
  
우덕주 대령은 박정희가 '혁명공약'을 위반하여 군대로 돌아가지 않은 것에 대해 강한 반감을 드러냈지만, 반국가단체 구성 등의 공소 사실은 전면 부인하였다.
▲ "원충연 반정부음모 사건" 당시 우덕주 대령의 진술서  우덕주 대령은 박정희가 "혁명공약"을 위반하여 군대로 돌아가지 않은 것에 대해 강한 반감을 드러냈지만, 반국가단체 구성 등의 공소 사실은 전면 부인하였다.
ⓒ 우종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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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공소장에 따르면 우덕주 대령이 거사를 준비하면서 담당한 역할은 정보참모부에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는지 '정보와 연락'이었다. 거사시 진압부대로 공수부대가 동원될 수 있다는 판단 아래 공작을 통해 이를 미리 봉쇄하는 역할도 맡았다. 말하자면 '원충연 반정부음모 사건'의 핵심 멤버 중 하나였던 것이다. 

우덕주 대령도 재판정에서 "지난 4월 29일 원충연 대령으로부터 혁명에 가담할 것을 제의받고 군내의 부패에 격분하고 있은 터이므로 그 권유를 받아들여 혁명을 결심했다"라고 당당하게 진술한다.

다만, 그는 "반국가단체를 구성한 바 없고 구체적인 혁명의 모의에 가담하지 않았다"라고 자신의 공소사실을 부인한다. 또 "원충연 대령으로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현 정부와 군부대가 부패했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예편할 생각이었으므로 4월 29일 이전에는 결심을 하지 않았다"라고 검사의 심문에 맞선다. 

당시에 이 사건 관계자들은 방첩대는 물론이고, 남산에서도 심한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원충연 대령의 시인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인 부분, 특히 다른 인물들의 관여 정도 등에 대해서는 상당히 조작됐을 가능성이 크다.

더군다나 당시는 6.3 한일회담반대투쟁으로 시끄러울 때였다. 심지어 군 장성 출신들도 한일협정에 반대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하기까지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다 보니 박정희는 '원충연 반정부음모 사건'에 당시 함석헌 선생과 더불어 재야의 거물 역할을 하고 있던 김홍일 장군을 엮어 보려고 애를 쓴다.

비록 퇴역 장군의 몸이었지만, 광복군 출신으로 6.25 한국전쟁 때는 한강선방어 전투를 이끌기도 했던 김홍일이 한일회담반대투쟁에 합류한 것은 박정희로서는 대단히 껄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결국 김홍일 장군까지 엮지는 못하고, 야당에 참여하고 있던 예비역 장성 출신 김형일 의원이 이 사건에 연루돼 구속된다.

사건의 최고 책임자인 원충연 대령은 박인도 대령과 함께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우덕주 대령은 검사의 징역 15년형 구형에도 불구하고 징역 5년에 자격정지 3년을 선고받는다. 그리고 감옥에 있던 우덕주 대령은 최종심이 있고 나서 1년 정도 지난 1967년에 형집행정지로 석방된다.

세월이 한참 흘러 독재자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에 맞아 사망한 10.26사건이 발생하고, 두 차례의 쿠데타와 광주시민을 학살하고 들어선 전두환이 12대 대통령에 취임하는 1981년 3월 3일에 맞춰 대대적인 사면령을 내린다. 그때까지도 복역 중이던 원충연 대령은 이때 감옥에서 나오고 우덕주 대령을 포함한 사건 관계자 전원이 특별사면 조치된다.

'원충연 반정부음모 사건'의 또 다른 핵심 인물로 지목돼 사형선고를 받았던 박인도 대령도 이때 사면복권 된다. 그는 1987년 6월 민주항쟁이후 대통령 선거 직전인 11월에 200여 명이 참여한 '반독재 민주수호 군 출신 동지회'의 부회장을 맡는다(회장인 방자명도 반혁명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인물이었다).

제2군 포병사령관으로 있던 박인도 대령은 군 동원에 있어 핵심역할을 맡고 있었던 인물로 지목됐다. 박인도 대령도 원충연 대령과 마찬가지의 과정을 거쳐 15년형이 확정돼 복역하는데, 복역 중 병에 걸리면서 1979년 5월 형집행정지로 먼저 나온다.

미국에 거주 중인 박인도 대령의 아들 박진동에 따르면 감옥에서 나온 이후에도 경찰의 감시가 계속됐다고 한다. 전셋방을 얻어서 이사 가면 경찰서에서 형사가 집주인을 만나 '골치 아프니까 쫓아내라'는 식으로 압력을 가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고 한다.

우덕주 대령의 아들 우종범, 재심을 통해 무죄 입증하겠다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는 아버지 우덕주 대령의 묘소와 아들 우종범 씨(오른쪽). 2002년 사망한 우덕주 대령은 2003년에야 대전현충원 안장이 결정되었다.
▲ 대전현충원 우덕주 대령 묘소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는 아버지 우덕주 대령의 묘소와 아들 우종범 씨(오른쪽). 2002년 사망한 우덕주 대령은 2003년에야 대전현충원 안장이 결정되었다.
ⓒ 우종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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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1967년 형집행정지로 감옥에서 나왔던 우덕주 대령은 1981년 3월 3일 특별사면이 될 때까지 무려 14년간을 가택연금 상태로 생활한다. 보안사의 전신인 방첩대에 체포될 당시 용산구 이태원 군인 관사에 살고 있던 우덕주 대령은 감옥에서 나온 이후 동작구 노량진2동으로 이사한다.

우덕주 대령의 아들 우종범(56)의 증언에 따르면 감옥에서 나온 우덕주 대령은 동작구청 뒤편에 자리를 잡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정일권의 도움으로 상도터널 위쪽으로 이사했다. 이어 상도동 약수터로 옮겨 자리를 잡는다.

문제는 이 기간 내내 우덕주 대령이 사실상 가택연금 상태로 경찰의 감시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노량진경찰서 소속 경찰이 옆집에 살면서 감시를 했다고 하니 그야말로 노골적인 감시대상이었다. 지인의 상가집이나 결혼식에 가기 위해서도 사유서를 제출해 허락을 받은 뒤에야 집을 나설 수 있었다고 한다. 

그동안 독재자 박정희가 자신의 영구집권을 꾀하는 과정에서 야당과 재야인사 등 정치적 반대자들에 대해 감시와 탄압을 가혹하게 한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박정희의 감시대상인 '혹여 있을지도 모르는 잠재적 저항세력'에 과거 '반혁명 사건' 관련자들도 포함돼 있었다는 것은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일이다. 

가택연금이 해지되고 세월이 흘러 1988년에는 계급복권까지 이뤄진 우덕주 대령은 2002년 3월에 세상을 떠난다. 유족들은 계급복권이 이뤄져 당연히 현충원에 안장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실형을 산 전력 때문에 1년여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서야 행정심판에서 승리하면서 국립 대전현충원에 안장될 수 있었다.

2003년 9월 행정심판위원회는 "당시 내란 사건 자체가 조작됐을 가능성이 높다"라면서 "우씨가 계급 복권이 이뤄져 법적으로도 이미 자격을 갖춘 만큼 국립묘지에 안장하는 것이 타당하다"라고 결정했다.

현재 우덕주 대령의 아들 우종범씨는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어드리기 위해 재심 청구를 준비하고 있다. 지난 2015년 원충연 대령의 유족이 낸 재심청구에서도 원충연 대령이 유죄를 확정받은 상황이지만, 우종범씨는 아버지의 무죄를 확신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어렵사리 육군본부 기무부대가 사건 당시 작성한 '의견서'도 확보했다.

이 '의견서'에는 우덕주 대령의 친필 조서도 포함돼 있다. 이 친필 조서에 따르면 당시 육군 참모총장이 외국에 출장을 갔다오는 길에 참모총장의 부인이 다이아몬드를 들고 들어왔다는 내용의 언론 보도로 곤혹스러운 상황에 몰리는데, 음해세력에 의해 자신이 내부 제보자로 지목되면서 이에 대한 보복 차원에서 '원충연 반정부음모 사건'에 엮인 것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54년 전 있었던 '원충연 반정부음모 사건'의 진실이 재심을 통해 새롭게 밝혀질지 주목된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김학규는 동작역사문화연구소 공동대표 겸 소장을 맡고 있고, <낭만과 전설의 동작구>, <동작 민주올레 가이드북> 등을 썼다.


태그:#동작 민주올레, #상도길, #우덕주, #원충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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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역사문화연구소에서 서울의 지역사를 연구하면서 동작구 지역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사)인권도시연구소 이사장과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동작구 근현대 역사산책>(2022) <현충원 역사산책>(2022), <낭만과 전설의 동작구>(2015) 등이 있습니다.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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