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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걸 다 책으로 배우는 나지만, 가끔 서점 매대를 둘러보다 보면 '아니 뭐 이런 것까지 책으로 배우나' 싶은 생각이 드는 책들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대화법'에 관한 책도 그런 생각이 들게 하는 책들 중 하나다.

초등학생도 아니고, 30년 넘는 세월을 매일 사람들과 대화를 하면서 살았는데, 새삼스럽게 대화법을 가르치는 책을 읽을 일이 뭐가 있나, 하고 책을 내려놓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착각이다. 우리는 대화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

우리가 매일 던지고 받는 대화의 수준이라는 것이, 사실 얼마나 한심스러우며,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가. 남을 지적하기 전에 먼저 나의 대화법을 점검할 필요가 있으므로 오늘은 대화법에 관한 책을 읽어본다. 김범준의 <나를 피곤하게 만드는 것들과 거리를 두는 대화법>, '감정은 쓰지 않고 센스 있게 받아치기'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나를 피곤하게 만드는 것들과 거리를 두는 대화법>, 김범준 지음, 위즈덤하우스(2019)
 <나를 피곤하게 만드는 것들과 거리를 두는 대화법>, 김범준 지음, 위즈덤하우스(2019)
ⓒ 박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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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피곤하게 만드는 것들과 거리를 두는 대화법>(아래 <거리를 두는 대화법>)의 저자 김범준은 여러 기업과 공공부문, 고려대, 이화여대 등의 교육기관에서 강연자로 활발히 활동 중이며, 대화법에 대한 책을 여러 권 쓴 작가이기도 하다. 이 책은 일상생활에서 시도 때도 없이 남의 개인사에 쳐들어가고, 동시에 무방비 상태에서 침입자들에게 침입 당하는 사람들을 위한 실전 대화법을 소개하고 있다.

'너와 나 사이에 적당한 거리를 지키는 것'이 이 책의 핵심 주제인데, 이게 참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겠고, 쉬운 것 같으면서도 어려운 일이다. 내 주변만 보더라도 이 적정거리를 잘 유지하는 사람은 한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다. 나도 자신 있게 다른 사람과의 거리를 잘 지킨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나는 어떤 사람과도 좀처럼 거리를 좁히지 못하고 너무 멀리 있다고 생각한다. 쾌적하기는 하다만, 쾌적함을 넘어 황량한 지경이니 나에게도 문제가 있다.

<거리를 두는 대화법>은 제목처럼, 주로 거리를 두지 못하고 개인의 영역에 무례하게 침입하는 경우를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친구와 연인 사이에서, 모든 인간관계에서는 숨 쉴 수 있는 신선한 공기가 드나들, 쾌적할 정도의 거리가 필요하다. 상대방을 피곤하게 하는 이런 경우에 대해 일일이 예를 들자면 사흘 밤낮을 쉬지 않고 이야기해도 모자랄 것이다.

먼저 직장에서 나를 피곤하게 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오늘 입고 온 나의 의상에 대한 품평이라든지, 웃기지도 않고 기분만 상하는 소위 '농담'이라고 지껄이는 헛소리들, 나의 주말과 휴가를 지나치게 궁금해 하는 것들이 대표적일 것이다. 그런 말에 대처하는 법을 준비해두고 다녀야 하다니, 참으로 슬픈 현실이다.

애초에 그런 말 같지도 않은 말은 왜 하는가. 남이야 오늘 출근할 때 입고 온 옷을 입고 퇴근 후 데이트를 하러 가든 밭을 매러 가든 그게 왜 궁금한가. 남이야 주말에 남자친구를 만나든, 방구석에서 축구를 하든 그게 왜 궁금한가. 회식 후 먼저 들어간 직원들을 보면서 "둘이 어디로 샌 거 아니지?" 따위의 말을 농담이라고 하는가. 혼자만 웃긴 그런 쓰레기 같은 말이 어떻게 농담이 되는가. 회사에서는 일에 관련된 말만 하고, 회식 자리에서는 서로의 수고를 격려하고, 맛있게 먹고 마시고 끝내면 될 일이다.

가정에서도 피곤한 상황은 계속된다. 부모라고 자녀의 모든 것을 알려고 해서는 관계만 틀어지고 집안 분위기만 냉랭해질 뿐이다. 자식은 부모의 소유가 아니다. 부모와 마찬가지로 자식에게도 그들 나름의 삶이 있다. 크게 위험하거나 불법적인 일이 아니라면 상관하지 말고 그저 묵묵히 지켜봐 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오늘 뭐 했는지, 누구를 만났는지, 공부를 얼마나 했는지 물어봤자 마음에 드는 대답을 들을 수도 없을 뿐더러, 자식은 부모에게서 더 멀리 도망가고 싶어질 것이다.
 
강자는 밑도 끝도 없이 약자에게 다가서려고만 하고, 약자는 영문도 모른 채 도망 다니느라 바쁘다. 관계의 파멸은 세상의 강자들이 약자와의 거리를 적절하게 유지할 줄 모른 채 약자와 커뮤니케이션하려 하기에 발생하는 비극이다. (140쪽)

부부 사이도 마찬가지다. 주말부부가 더 사이좋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같이 사는 사는 사람일수록 각자의 영역을 지켜주는 것이 필요하다. 나와 함께 있지 않은 상대방의 시간에 대해서는 궁금해하지 말자. 서로의 휴대폰 비밀번호를 궁금해하지 말고 그 호기심을 나에게로 돌려보면 좋을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찾으며 개인의 삶을 가꾸는 것, 같이 있는 시간을 조금 덜어 혼자 있는 시간에 보태는 것이 건강한 관계를 오래 지속할 수 있는 비결이다.

친구들과의 모임도 언제나 즐거운 것은 아니다.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자랑질', 끝도 없이 지겹게 늘어놓는 '남 걱정'과 푸념에, 한 것도 없이 피곤해져 기진맥진한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그냥 가만히 앉아서 남이 하는 말 들어주는 게 뭐가 그렇게 힘드냐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모르는 소리다. 들어주는 일도 상당히 에너지가 소모되는 일이다. 이 부문에 대해 저자가 책에서 말하는 내용을 읽으면 무릎을 치며 '맞아, 맞아!' 고개를 끄덕이며 물개박수를 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저자가 고등학교 동창 모임에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내가 보통 바빠야 말이지. 이런 모임에 참석하는 게 도대체 몇 년 만인지 몰라. 자주 모인다면서? 이야, 너희들 한가하구나!"라는 말로 시작해 주야장천 자랑만 늘어놓는 상황을 겪으며 느낀 바를 말하는 부분이 인상적이다.
 
나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격의 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세상의 모든 돈과 지위로부터 벗어나 인간다운 얘기를 나누고자 했다. 그 소중한 시간에 누군가의 일방적 자랑을 멍청하게 들어줄 이유도 없고, '여유'도 없다. 나의 영역을 침범해 듣기 싫은 말을 끝없이 펼쳐내는 사람에겐 돈을 달라고 해도('듣기 싫은 이야기를 기꺼이 들어주는 값')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나의 장소와 나의 시간에서, 우리의 장소와 우리의 시간에서 헛된 말을 하며 자신의 이야기만 끝도 없이 하는 누군가를 보면 직설적으로 말해준다. "축하해. 이건 네가 한턱내는 거지? 자랑하는 거 들어주느라 나 엄청 힘들다." (120~121쪽)

이런 경험,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자랑질, 험담같이 쓸데없는 말을 할 때는 돈을 내고 해라. 하물며 쓰레기도 돈 내고 버리는데(종량제 봉투값),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토사물과 같은 말들을 쏟아부었으면, 적어도 커피값 정도는 내야 하는 것 아닌가. 그조차도 하지 않는 사람들의 말을 들으며 나는 속으로 저주를 퍼붓는다.

'괘씸한 인간, 지옥에나 가라지. 왼쪽 귀에는 자랑질, 오른쪽 귀에는 분노의 말들이 하루 종일, 24시간 연중무휴로 들리는 말들의 지옥에 떨어지게 되리라.'

나도 이런 말들의 폭격을 여러 번 겪으면서 터득한 방법이 하나 있다. 상대가 말 같지도 않은 말을 또 시작하는구나 싶으면 '아, 정신 수양의 시간이로구나.' 바쁜 와중에 참으로 뜻밖에 맞게 되는 명상의 시간에 당황스럽지만, 당황하지 말고 염불을 시작한다.

세상 인자한 미소를 띠며 속으로 염불을 외듯 시를 외운다. 이런 상황을 대비해 외워둔 시가 몇 편 있다. 외워둔 시가 바닥이 날 때까지 끝나지 않는다면, 슬프지만 노래를 부른다. 배치기의 '닥쳐줘요'가 좋겠다.

'oh 그만 그만 그만해요. 더 이상 뭐라 뭐라 뭐라 하지 말아 줘요. 쉴 틈 없이 움직이는 그 입술도 그만 닥쳐줘요.'

바람이 있다면, 모든 사람이 조금 더 자주 글을 쓰면 좋겠다. 자랑이 너무 하고 싶을 때, 욕이 너무 하고 싶을 때, 쓸데없는 말들이 자꾸 생각날 때, 누구에게 말하기 전에 잠시 글로 쓰면 좋겠다.

나도 가끔 하는데 효과가 좋다. 말로 할 때만큼은 아니지만 속이 시원해지는 효과도 있고, 내가 쓴 한심한 소리를 적은 글을 보고 있자면 '현자 타임'이 찾아와 자신의 졸렬함을 마주하며 반성할 수 있다. '이딴 말을 남에게 할 생각을 했다니, 말하기 전에 글로 쓴 게 얼마나 다행인지.'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람에게는 식욕, 성욕, 수면욕과 함께 의사소통 욕구가 있다고 생각한다. 분출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다. 말과 글. 하지만 말을 통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상처받고, 떠나고, 의기소침한 채로 지내고, 그것이 스스로를 해치는지 알고 있다. 감정이 정리되지 않을 때 글을 써보길 바란다. 마치 지저분한 방이 청소를 하면 정리되는 것처럼, 단어를 고르고 문장을 고치는 동안 당신의 마음이 간결해지는 것을 경험할 것이다. 그 과정이 어떤 이에게는 즐거움을, 어떤 이에게는 괴로움을 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은 자아를 마주하는 시간이다. 우리가 매일 거울을 통해 육체를 마주하듯이, 손가락 끝을 통해 뻗어나간 당신의 자아를 마주함으로써 지금 영혼이 어느 곳으로 향하고 있는지 발견하는 시간은 당신에게나 당신 주변 사람에게나 유익할 것이다. (최민석, <꽈배기의 맛> 중에서>

<거리를 두는 대화법>에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을 수 있는 여러 가지 피곤하고 불편한 상황에 대해, 저자가 직접 겪은 다양한 예를 들며 문제점이 무엇인지, 이럴 때 어떻게 받아치면 좋은지 구체적인 방법들이 소개되어 있다. 공감할 수밖에 없는 내용에 물개 박수로 호응하며, 상황에 맞는 적당한 방패를 하나씩 챙길 수도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쾌적한 거리를 유지하며 행복한 개인주의자로 살아가는 삶을 상상해 본다.
 
고슴도치는 날씨가 서늘해지면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체온을 높이기 위해 서로 모인다고 한다. 이때 너무 가까우면 상대방의 가시에 찔릴 것이고 멀리 떨어져 있으면 체온 유지에 실패해 죽을 것이다. 고슴도치들은 본능적으로 서로의 가시에 상처받지 않으면서도 체온을 유지하여 추위를 이기는 '적정한 거리'를 찾아낼 줄 안다. 핵심은 '찔리지 않도록 너무 가깝지 않게, 그러면서도 서로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길 수 있을 정도의 거리'다. (6쪽)

태그:#거리를두는대화법, #김범준, #위즈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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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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