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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에서 출발해 음성과 용인으로 
 
 토계리 칼바위(劍巖)와 팔봉마을
 토계리 칼바위(劍巖)와 팔봉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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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사화로 인해 충주땅 토계리로 귀양을 와 세상을 떠난 음애(陰崖) 이자 선생의 자취를 찾아간다. 이자 선생의 자취는 충주뿐 아니라 음성과 용인에도 남아 있다. 1519년 우참찬이던 이자는 기묘사화로 삭탈관직되고 선대고향인 용인 지곡동으로 낙향해 사암(思庵)에 살았다. 그러나 훈구파들에 의해 1520년 음성 음애동으로 귀양지가 옮겨진다. 음성은 이자 선생의 처가가 있던 곳이다. 이자는 이곳 음애동에서 1529년까지 9년 동안 머문다.

1529년 이자는 충주 토계리로 이거(移居)한다. 그것은 토계리의 자연경관이 좋고, 인근에 교류할 수 있는 지인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곳에 몽암(夢庵)을 짓고 시문도 짓고 후학도 가르치며 산다. 당시 충주 용탄에는 기묘사화로 낙향한 탄수 이연경이 살고 있었다. 그리고 멀지 않은 생극 말마리에 십청헌 김세필이 살고 있었다. 그리고 충주의 유림들과 교유할 수 있었다.    
 
 이자 묘소. 위로 형 이운과 아버지 이예견의 묘소가 있다.
 이자 묘소. 위로 형 이운과 아버지 이예견의 묘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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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사람이 이약빙(李若氷)과 허초(許礎)다. 이약빙은 이연경의 4촌으로 문과에 급제해 사복시정을 지내고 충주에 은거하고 있었다. 허초는 충주의 유지로 향청의 좌수를 지낸 선비다. 이자가 귀양온 토계리는 달천이 흐르고 칼바위(劍巖)가 있어 자연경관이 빼어난 명승이다. 그 때문에 시인묵객들이 이곳의 아름다움을 시와 문장으로 표현했다.

1530년 이자는 자신의 행장을 짓고, 1533년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1534년 봄 용인군 기곡면(器谷面) 선영에 묻힌다. 현재지명으로는 용인시 기흥구 지곡동 산 11-17이다. 이자 선생 묘 위에 아버지 이예견(李禮堅)과 형 이운(李耘)의 묘가 있다.

9년간의 귀양지 음성 음애동 
 
 음애동 각자
 음애동 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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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애동은 음성군 소이면 비산리에 있다. 가섭산(迦葉山) 동남쪽 산자락에 위치한 마을로 작은 시내(溪流)가 흐른다. 시내 양쪽으로 바위가 우뚝한데, 동쪽의 바위가 일암(釰岩)바위다. 바위 북쪽에는 탁영선탑(濯纓仙榻)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 글씨는 이자가 직접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자 선생은 귀양기간 동안 이곳 일암바위 위에 초은정(招隱亭)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일암바위 건너편에는 마을 이름인 음애동(陰崖洞)이라는 글자가 음각되어 있다.

음애동은 청주와 충주를 잇는 36번 국도 북쪽에 위치한다. 충주에서 가는 경우 비산삼거리를 지나 비석거리 마을에 이른다. 옛날에는 비석거리 마을을 지나 음애동으로 갔지만, 지금은 음성읍 한벌리 초입의 한벌2교를 건너 충청대로 1699번길을 따라 올라가야 한다. 이 길 왼쪽에 한벌리 방죽안 마을이고, 오른쪽에 비산리 음애동 마을이다. 길 오른쪽으로 농로를 따라 내려가면 작은 계류가 흐르는데, 이 계류를 따라 위쪽으로 150m쯤 가면 일암바위가 나온다.

계류 왼쪽으로는 양봉용 벌통이 수십 개 놓여 있다. 봄이 되어 매화꽃도 피고 산수유꽃도 피어선지 벌들의 활동이 활발하다. 계류 오른쪽으로는 사과나무 과수원이 있다. 물은 맑고 깨끗하다. 가섭산 자락에서 끊임없이 물이 흘러나오기 때문에 사시사철 마를 때가 없다. 계류에는 작은 돌을 쌓아 탑을 만들었다. 일암바위 위는 50평 정도의 평지로 되어 있고, 주변에 조릿대가 가득하다.
 
 탁영선탑 각자
 탁영선탑 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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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 선생이 귀양기간 동안 이곳에 초은정을 짓고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계류는 그늘이 지고 어둡지만, 일암바위 위는 양지바르고 전망도 좋은 편이다. 남서쪽으로 수정산이 보이고 북서쪽으로 가섭산 자락이 이어진다. 동쪽으로는 소이면의 산과 들이 펼쳐지고, 서쪽으로는 한벌리 고개를 넘어 음성읍 소재지로 이어진다. 이곳 소이면은 옛날 충주목 관할이었다.

음애동(陰崖洞)이라는 글자는 이자 선생 귀양 당시 쓴 것이 아니고 후대에 쓴 것으로 여겨진다. 글자가 너무 선명하고 필체가 현대적이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탁영선탑(濯纓仙榻) 글자는 고졸한 맛이 있어 이자 선생의 글씨로 추정된다. 탁영선탑은 벼슬을 내려놓고 신선처럼 글이나 읽고 산다는 뜻이다. 귀양 온 선비의 심정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자 묘역과 고택을 찾아
 
 문의공 이자 묘표
 문의공 이자 묘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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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 묘는 용인시 기흥구 지곡동 산11-17에 있다. 이곳은 그 동안 용인군 기곡면 한산이씨 묘역으로 불려왔다. 그러나 용인의 도시화와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해 기흥구 지곡동이 된 것이다. 묘역에 이르니 한산이씨 음애공파 이무규(李茂珪) 종회장이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인사를 나눈 후 묘소에 참배한다. 먼저 이자의 묘표를 통해 실제로 역임한 관직, 증직, 시호 등을 살펴본다.

이자는 1518년 도승지를 거쳐 대사헌이 된다. 1519년에는 한성판윤을 거쳐 형조판서가 된다. 그리고 우참찬이 된다. 그해 11월에 기묘사화가 일어나 파직되니, 그의 최종 관직은 우참찬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국무조정실장쯤 되는 벼슬이다. 1577년 노수신(盧守愼)이 선생의 행장을 지었고, 유희춘(柳希春)의 계청으로 '문의(文懿)'라는 시호를 받는다. 문은 도덕박문(道德博聞)에서 나왔고, 의는 덕성순숙(德性純淑)에서 나왔다.
 
 이자 묘역 앞에 선 '팔봉서원을 살리는 사람들'
 이자 묘역 앞에 선 "팔봉서원을 살리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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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박문은 도덕에 해박하고 들은 것이 많다는 뜻이다. 덕성순숙은 덕성이 순수하고 맑다는 뜻이다. 이론과 실천 양쪽에서 모범이 되는 삶을 살았다는 의미가 된다. 1586년에는 선생을 기리는 계탄서원이 충주 팔봉에 세워졌고, 한산(韓山)의 문헌서원(文獻書院)에도 배향되었다. 1590년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그리고 1754년 선생의 문집인 <음애집(陰崖集)>이 나왔다.

다음으로 형 이운(李耘), 아버지 이예견의 묘를 살펴본다. 이운은 묘표를 보니 제주목사와 공조참의를 지냈다. 부인은 죽산안씨로 숙부인이다. 이예견은 대사간을 지냈고, 아들 덕에 좌찬성에 증직되었다. 그 때문에 부인 선산김씨도 정경부인이 되었다. 내려오는 길에 이자의 아들 이추(李秋)의 묘도 살펴본다. 사암처사(思庵處士)인 걸보니 벼슬을 하지 않고, 고향을 지킨 것 같다.
 
 이자 고택
 이자 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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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를 살펴본 우리 일행은 마을에 있는 이자고택을 찾아간다. 도로명 주소로는 지삼로198번길 30-4이다. 1997년 12월 경기도 민속자료 제10호로 지정된 후 새롭게 수리를 해선지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다. 마당 앞에는 이자선생 문학비가 서 있다. '자탄(自歎)', '추월(秋月)', '즉사(卽事)'라는 시제가 보인다. 그 중 시 '자탄(自歎)'을 살펴보았다. 그것은 이 시에 이자 선생의 삶에 대한 회고와 한탄이 잘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뜬구름 같은 인생 오십년 황급히 지나가고                浮生五十尙遑遑
어질지 못함에 웃음지으며 또 한 번 상처입네.           自笑無良更自傷
글이라는 게 난장이들이 부리는 희극과 같고             文似侏儒唯戲劇
배움이란 게 황량한 곳으로 굴러가는 고깔모자 같네.   學如髦弁轉荒涼
집안의 가르침을 따랐으나 어리석음을 벗어나지 못해  幽明永負趨庭訓
내내 밥그릇을 뒤집어엎는 재앙을 면키 어려웠네.       終始難逃覆餗殃
몸과 마음을 점검해보니 온통 부족할 뿐인데             點檢身心還不屬
몸과 마음을 편안히 해서 요순시대를 만들 수 있을까? 可能康濟鑄虞唐

 
 최근 새로 지어진 이자 사당
 최근 새로 지어진 이자 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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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의 공식 명칭은 '용인 전 음애이자 고택(龍仁 傳 陰崖李耔古宅)'이다. 이자(李耔)가 살던 전통가옥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자의 후손들이 살았던 집으로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고택의 마루 대청마루 안쪽으로 금서재(琴書齋)라는 편액이 보인다. 고택을 수리․복원하는 과정에서 상량문이 나왔는데, 그곳에 금서재라는 당호가 있어 최근에 만들어 걸었다고 한다. 고택 좌측에는 근래 건립된 '효문의공부조지묘(孝文懿公不祧之廟)'라는 현판이 걸린 사당이 동향하고 있다.

본채는 사랑채와 안채가 연결되어 ㄷ자형 평면을 갖추고 있는데, 별도로 사당을 짓는 일반 양반집과 달리 따로 사당을 두지 않았다. 다만 본채 북서쪽에 청방을 두고 단청을 하여 제사 공간으로 사용하였다. 다른 곳에는 아무 칠이 없는 데 비해 이곳에만 단색으로 간단히 채색된 가칠단청이 되어 있었다. 고택은 원래 사랑채와 안채가 연결된 'ㄷ' 자형 본채 앞으로 'ㅡ' 자형의 행랑채가 있어, 튼 'ㅁ' 자 형식의 배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행랑채가 소실되고, 현재는 본채만 남아 있다.
 
팔봉서원 이야기
 
 팔봉서원
 팔봉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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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봉서원은 충주시 대소원면 팔봉마을에 있다. 달천강을 낀 서쪽 경사면에 동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서원 건너편에는 칼바위(劍巖)와 팔봉(산)이 있다. 서원 외부에 자연석축을 쌓고 담장을 두른 다음 솟을삼문을 설치했다. 서원 내부로 들어가면 정면에 제각(祭閣: 祠堂)이 있고 오른쪽에 재실(齋室)이 있다. 사당을 중심으로 왼쪽에 팔봉서원 중수기념비가 있다.

팔봉서원은 1582년(선조15) 음애(陰崖) 이자(李耔)를 기리는 서원을 계획되었다. 1586년 이자가 귀양와 살던 몽암유지(夢庵遺址) 북쪽에 계탄서원(溪灘書院)이 건립되었다. 계옹(溪翁) 이자(李耔)와 탄수(灘叟) 이연경(李延慶) 배향했다. 당시 사당는 숭덕묘(崇德廟), 강당은 호의당(好懿堂), 동재는 명성재(明誠齋) 서재는 경의재(敬義齋)였다. 1612년에는 김세필(金世弼)과 노수신(盧守愼)이 추가로 배향되었다.

1672년 충주 유생 한치상(韓致相) 등의 상소가 받아들여져 계탄서원이 팔봉서원(八峰書院)으로 사액되었다.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폐원되었다. 1998년 정부지원과 후손들의 출연으로 서원이 재건될 수 있었다. 팔봉서원은 2003년 6월 충청북도 기념물 제129호로 지정되었다. 팔봉서원에서는 2018년부터 문화재청 향교서원 문화재활용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2019년은 집중사업으로 사업명이 <살았다 팔봉서원, 그 다음은?>이다.
 

덧붙이는 글 | 이자(李耔) 자취 찾기 답사는 3월 27일 이루어졌다. 답사지는 음성 음애동, 용인 이자 묘소와 고택이다. 충주 팔봉서원에는 문의공 음애 이자, 정효공 탄수 이연경, 문간공 십청헌 김세필, 문간공 소재 노수신 선생이 배향되어 있다. 앞으로 이연경, 김세필, 노수신 선생 자취 찾기가 이어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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