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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전 편 "정선아라리 가락에 추억은 더욱 또렷하게"에 이어 계속 풀어 놓는다.

다음날 병사계장과 함께 정선으로 출발했다. 오색에서 내려오는 버스를 타고 양양터미널에서 다시 강릉행 직행버스를 탔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한 번에 정선까지 양양에서 가는 버스는 없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모든 대중교통 수단은 서울을 줌심으로 전국으로 연결된다.
  
하루 3교대로 광부들이 들어가고 나오던 탄광의 갱도 입구다. 정선엔 이와 같은 탄광이 많았다.
▲ 탄광 하루 3교대로 광부들이 들어가고 나오던 탄광의 갱도 입구다. 정선엔 이와 같은 탄광이 많았다.
ⓒ 정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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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에서부터 덜컹거리는 비포장길을 느리게 버스는 달렸다. 정선에 도착하니 그날 신체검사는 끝날 시간이라 다시 하루 더 기다려야 했다. 여관까지 동행해 방 호수를 확인시키며 병사계장은 "내일 아침에 늦지 않게 이리로 와요"라 했다. 여관을 나와 증산(민둥산역)행 기차시간을 알아보니 한참 기다려야 됐다.

우두커니 대합실에 앉아 있기도 멋쩍다. 기차역에서 나와 안내판이 있어 살펴봤다. 정선군청에서 관광안내를 해놓은 안내판엔 군청 앞 뽕나무도 소개해 놓았는데 미리 정선군청 위치는 알아둘 필요가 있겠다 싶었다. 기차역에서 내려가 몇 번 길을 물어 정선군청에 도착하니 30분이나 걸렸다.

다음날 군청 옆에 마련된 장소에서 신체검사를 받으려면 증산에서 늦지 않게 기차를 탈 수 있어야 된다. 증산으로 가는 기차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어 군청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를 들어서자 짙은 밤색으로 칠을 한 베니어합판으로 만든 안내서를 비치하는 잡지꽂이 비슷한 책장에 누군가 매직펜으로 쓴 '정선아리랑 테이프 판매'란 종이가 눈에 띄었다.

두 종류 정도의 카세트테이프가 있었던 거 같은데 하나는 누런색으로 뽕나무를 표지에 인쇄한 테이프였던 건 확실하다. 그리고 또 하나는 아우라지 풍경을 인쇄한 테이프도 있었던 것 같다. 내용은 차이가 없어 보여 하나만 구입해 가방에 넣고 군청을 나와 다시 정선역으로 갔다. 오래지 않아 구절리에서 출발한 증산행 기차가 도착했다.
 
정선같이 놀기 좋은 곳 눌러 한번 오세요
검은 산 물밑이라도 해당화 핍니다

유전이면 금수강산 돈 떨어지니 적막강산이로다
인생이 일장춘몽인데 아니 놀고 무엇하나

우리 집 서방님은 오늘도 투전판엘 가셨는데
공산아 명월아 새칠팔이나 잡아라

시에미 잡년아 잠이나 깊이 들어라
아리랑 보따리 쓰리랑 따라서 난 길을 가잔다
 
요즘은 돈 있으면 금수강산 아니라, 비행기 타고 해외로까지 자유롭게 가는 세상이다. 하지만 1983년 그 당시엔 돈이 있다고 아무나 해외로 놀러 갈 수 없었다. 재수 좋아 토요일에 조금만 일찍 일을 끝내면 배낭에 하루치 먹을 거 챙겨 산을 찾는 걸 행복으로 여겼다. 밤 10시까지 동대문종합상가 주차장이나 종로만 가면 설악산이고 지리산이고 무박 2일 산행을 떠나는 관광버스가 있었다.

그런 한 주를 목요일 저녁 파출소엘 들리면서부터 오롯이 신체검사 하나 받으려 서울에서 강원도 양양으로, 그리고 정선까지 왔다. 그것도 혼자가 아니라 병사계장까지 출장증을 받아 정선으로 함께 왔다.

30년도 훌쩍 넘은 이제야 밝히지만 분명 여비는 두 사람 몫을 총무계에서 받는 걸 똑똑히 봤었다. 화요일에 다시 오라는 신체검사장 안내의 말을 듣고 여관을 향해 걸으며 "정선에 누구 아는 사람 있어요"라 묻기에, "남면 무릉리에 형이 있습니다"란 내 대답을 들었다고 하더라도 교통편도 잘 모르는 정선읍과 남면을 갔다 오라니. 병사계장이 두 사람 이틀치로 받았던 여비는 양양에서 강릉을 거쳐 정선으로 온 버스표만 끊고 나머지는 그가 챙겼음이 분명하다.

비둘기호는 간이역까지 다 정차한다.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신치역에 정차하고 다음엔 선평역, 그리고 별어곡을 지나야 증산역이다. 마침내 증산에 도착해 다음날 아침 일찍 정선으로 가는 기차표를 예매하고 형이 사는 묵산광업소 무릉리 사택으로 갔다.

병반(丙班 : 밤 11시 출근 해 아침에 퇴근하는 작업반)이라 아침에 퇴근한 형은 마당에서 조카들과 놀아주다 반갑게 맞아 주었다. "아빠 잠깐 나갔다 올게 삼촌이랑 놀고 있어" 조카들에게 말하고 형이 방에 들어갔다 나오더니 사택 사이로 사라졌다. 잠시 뒤 주간잡지로 만든 봉지를 가슴에 안고 돌아 온 형이 방으로 들어가자고 했다. 형은 오랜만에 찾아 온 동생을 위해 사원증을 들고 공판장에 가서 소주를 사왔다.

탄광과 같은 광업소에선 사원증 하나면 어디서나 통했다. 쌀도 사원증이 있어야 받을 수 있었고, 하다못해 생선이나 돼지고기를 사도 사원증 번호가 필요했다. 그렇게 한 달 동안 사원증 번호로 거래를 하면 기막히게 월급날을 챙겨 구판장이건 여타 모든 가게들이 광업소에 청구해 받아갔다. 그런데 막걸리 한 주전자, 과자나 하드 하나도 사원증 번호만 있으면 되는데 담배만큼은 현찰을 받았다.

여덟 살 위인 형은 일찍 결혼을 해 사내아이 둘을 둔 가장이었고, 동생 둘을 데려다 학교를 보내고 있었다. 놀기 좋은 곳 정선이 아니라, 형은 동생 둘 학비와 가족들 생활비 때문에 정선 탄광촌으로 들어갔다.
  
산도, 사람이 살아가는 집은 물론 물도 까만 물이 흐르던 탄광촌도 이젠 몇 곳을 제외하곤 모두 문을 닫았다. 탄을 캐기 위해 바위를 뚫고 길을 만들기 위해 캐낸 바위가 산을 이룬 풍경은 지금도 정선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다.
▲ 탄광촌 산도, 사람이 살아가는 집은 물론 물도 까만 물이 흐르던 탄광촌도 이젠 몇 곳을 제외하곤 모두 문을 닫았다. 탄을 캐기 위해 바위를 뚫고 길을 만들기 위해 캐낸 바위가 산을 이룬 풍경은 지금도 정선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다.
ⓒ 정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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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몇 잔 마시고 형수가 차린 저녁을 먹으며 얘기를 나누다 잠시 잠이 들었다. 뭔가 부산한 소리에 깜짝 놀라 깼다. 병반 출근시간이라 준비하는 소리였다. 형이 출근하는 걸 배웅하고 다시 잠자리에 들었으나 잠이 오지 않아 불이 꺼지지 않은 안방 문을 노크하니 형수가 "삼촌 왜 잠자리가 바뀌어서 잠이 안 와요"라며 형과 마시던 소주를 챙겨줬다. 형의 도시락반찬을 준비하며 미리 남겨뒀다는 소시지부침까지.
 
물 한 동이를 여다 놓고서 물그림자를 보니
촌살림 하기는 정말 원통하구나

이밥에 고기반찬은 맛을 몰라 못 먹나
사절치기 강낭밥도 마음만 편하면 되잖소

한 치 뒷산에 곤드레 딱주기 이 내 맛만 같으면
올 같은 흉년에도 농사를 않치

변북이 산등에 이밥취 곤드래 내 연설을 들어라
총각 낭군을 만날라 거든 해 연년이 나거라
 
물 한 사발로 허기를 때우던, 강낭밥(옥수수밥)으로 때우던 자식들 배를 불릴 수만 있다면 뭐든 해야 되던 시절이었다. 아니 산나물로 한 밥이나 죽으로 때워도 배만 곯지 않으면 감지덕지했던 날들을 겪었다. 그렇게 가난한 이들이 살기위해 언제 위급한 상황이 닥칠지 모르는 탄광촌에 모여 살았다. 만 1년 반 뒤 내가 그 탄광에서 일을 해야 될 운명이란 건 그땐 꿈조차 꾸지 못했다.

혹자는 이제 신체검사를 받는 얘기를 하면서 형과 술을 마신다느니, 형수가 술상을 봐줬다느니 하면 "아무리 술을 마실 줄 안다고 해도 어느 집에서 그렇게 하냐"고 할 수 있다. 가풍이 달라서도, 그렇다고 술이나 담배에 대해 관대한 집안이라 그런 것도 아니다. 14살부터 이미 사회생활을 한 동생이 겪으며 배웠을 세상물정을 알기 때문에 이해했을 뿐이다.

소주 반 병 마시는 동안 막내 여동생 이야길 형수가 들려줬다. 형수의 여동생과 함께 성북동에 친구까지 셋이 가 있다는 걸 그때야 알게 됐다. "휴가 때나 올라는지 모르겠어요. 고모가 안동에 가서 시험을 쳤던 모양인데…" 한동안 말을 못 잇는 형수가 입을 다시 열기를 기다리며 천천히 술 한 잔을 따라 마셨다. "작은 삼촌이 고등학교를 다니는데 돈이 많이 들잖아요. 그래서 미안하긴 하지만 학비를 못 대줬어요. 합격했다는 통지를 받고도…" 그리고 더 이상 형수는 아무 말 없이 잠 든 조카들을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서산에 지는 해는 지고 싶어지나
정들이고 가시는 님은 가고 싶어 가나

밥 한 냄비 달달 볶아서 간난이 아버지 드리고
간난이하고 나하고는 저녁 굶고 자자

배달의 동포야 굶주리지 말고서
힘대 힘대로 일하여 자수성가 합시다

겹쳐진 허리에다 지개 타작 싫거든
떠돌이 한 백년에 빌어서나 먹겠다

금전을 주어도 세월을 못 사나니
아까운 세월을 허송치나 마소
 
설핏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집에서 멀지 않은 어딘가 닭을 키우는 촌집이 있는지 수탉이 훼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불 속에서 시계를 확인했다. 얼추 다섯 시 된 거 같다. 자리에서 빠져나와 마당을 가로질러 공동우물가로 갔다. 흘러넘치는 물이 한쪽으로 빠지는데 거기에서 물을 받아 세수를 했다. 그 사이 샛별도 사라지고 하늘빛도 바뀌기 시작했다.

늦게야 잠이 든 형수는 곤히 자는 모양이다. 가방을 챙겨 기차역으로 갔다. 정선행 통근열차는 오래지 않아 출발했다. 정선역에 도착해 개찰구를 빠져나가 병사계장이 머문 숙소 근처 식당에 들어가 순대국 한 그릇을 주문해 먹고 느긋하게 여관방문을 두드렸다.

이제 생각하니 병사계장이 아니라 병무계장 아니었던가 싶다. 둘 다 같은 말이긴 하되 요즘 면사무소나 동사무소에서 볼 수 없으니 오류라 하더라도 이해해주길…. 병사계장이 배달시킨 아침을 먹고 나서야 신체검사를 받으러 갔다. 신체검사라 해도 뭐 별 거 있겠나 싶은 마음으로 정선군청 옆에 마련된 장소로 들어섰다.

그리고 잠시 뒤 200명이 넘는 또래 장정들이 웅성거리는 그곳에서 "어제 어떻게 됐어? 난 오늘 다시 오라더라고"란 말이 들렸다. 이건 뭔 소리야 싶었다. 어제도 왔는데 하루에 다 못 끝낸단 말인가? 그것도 어제 만났던 사람을 오늘 다시 만나 서로 결과를 묻고 있잖은가. 그 의문은 잠시 뒤 풀렸다.

흰 가운을 걸친 군의관들이 도착하고 각자 책상에 앉거나 맡은 구역으로 자리하는 모습이 유리창 너머로 보였다. 보건소에서 나왔음직한 의사로 보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간호사도 아닌 가운을 걸친 여자들과 간호장교를 보고 휘파람을 보는 녀석까지 있었다.

복도에 서서 유리창을 통해 안쪽 상황을 살피는데 갑작스럽게 "팬티만 입고 모두 탈의한다. 실시"란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그 자리에서 옷을 벗어 지시에 따라 벽 쪽으로 밀쳐두고 차렷 자세로 섰다. 군화를 신은 걸로 미뤄 군의관으로 보이는 남자가 누런 봉투를 들고 앞에서 걸어오더니 쓰윽 훑어보며 지나갔다. 잠시 뒤 "거기, 이게 뭐야? 아직도 다 못 밀었어"란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확인했다.

"어제 어떻게 됐어? 난 오늘 다시 오라더라고" 했던 바로 그들 앞에선 남자가 영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전날 인원이 많아 다음날 오라고 한 줄 알았던 그들을 확인한 다른 청년이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한 말을 듣고 모두 웃었다. "자들 어제 나보다 한참 앞에 있었는데 옷을 벗으라고 했는데 안 벗더라고. 저 사람이 화를 내니까 벗긴 벗었는데 까만 내복을 입은 줄 알았어. 때를 얼마나 안 밀었는지 새까맸어"란 다소 과장된 말을 듣고, 도대체 얼마나 목욕을 안 했으면 목욕하고 다시 올라고 돌려보냈나 싶어 안쓰럽긴 해도 웃음은 참기 어려웠다. "빤쓰가 아니라 방 닦은 걸렐 입은 줄 알았다니까"란 말엔 군의관으로 보이는 남자도 손에 든 봉투로 얼굴을 가리고 돌아섰다.

"OOO! 정덕수! XXX" 세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데 내 이름이 호명되어 뭔 일인가 싶지만 대답했다. "왜 고향에서 안 받고 여기까지 왔지"란 말에 신체검사를 먼저 시작한 양양군에서 안 받고 맨 마지막으로 하는 정선군까지 왔냐는 질문이란 걸 알았다. 누런 봉투는 각각 다른 고장 병사계에서 신체검사를 받으러 정선군으로 온 청년들의 인적사항이 들어 있었단 걸 그때 알았다.

차례로 들어가 정해진 순서대로 군의관이나 보건소 직원 등 담당자 앞에서 온 몸을 재고 살피 킨 뒤였다. 엑스레이촬영을 위해 200명이 넘는 청년들이 팬티만 입고 정선군청에서 1km는 족히 되는 정선군보건소를 왕복하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요즘 그렇게 고압적인 분위기로 닦달하며 신체검사를 받게 한다면 과연 부모들이 가만히 있을까?

'2급. 수/보충역대상'이 내가 받은 신체검사결과다. 신체는 현역대상인데 학력이 없으니 방위병으로 근무해야 될 처지였다. 그런데 대한민국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나이가 당시 스무 살이 된 1964년생들이다. 마지막으로 중학교를 가정형편 탓에 못간 아이들도 우리들이었고, 처음으로 중학교입학시험도 사라진 세대였다. 그 뒤로 2년 지나 3주 교육으로 미필보충역이 돼서 병역의무는 나와 완전히 끝났다.
 
세월이 갈라면 저 혼자나 가지
알뜰한 청춘은 왜 데리고 가나

이팔청춘 소년들아 백발보고 웃지마라
백발머리 되는 일이 잠깐일세

세월아 봄철아 오고가지 말아라
알뜰한 청춘이 다 늙어간다

월미봉 살구나무도 고목이 덜컥되면
오던 새 그 나비도 되돌아간다

국화매화 곱기도 고와도 춘추단절이 아니냐
여자일색이 아무리 고와도 삼십 미만이로다

백발이 오지 말라고 가시성을 쌓았더니
어언 순간 백발이 왔구나
 
정선군청에서 신체검사를 받으러 갔을 때 판매하는 카세트테이프를 큰 기대를 걸고 구입했으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노래 20곡 남짓 담을 수 있는 카세트테이프에 구구절절 정선아리랑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고, 몇 종류 나눠 담아냈으니 "200여 수가 전해오고 있다"는 설명엔 턱 없이 미치지 못했다. 기껏해야 40여 수나 될까싶은 카세트테이프는 한 번 듣고 어디로 사라졌는지 관심도 두질 않았다.
  
아무리 추워도 봄은 온다. 탄광촌 마을이 대부분 사라진 정선군은 유난히 많은 바위산과 그 사이를 휘감아 도는 강을 따라 발달한 특유의 정선아라리를 널리 알리고자 한다. 이번 동강할미꽃 촬영에서 정선에 있는 정선아라리 이수자를 만나 촬영하고 싶었으나 다음 기회로 미뤘다.
▲ 강변의 봄 아무리 추워도 봄은 온다. 탄광촌 마을이 대부분 사라진 정선군은 유난히 많은 바위산과 그 사이를 휘감아 도는 강을 따라 발달한 특유의 정선아라리를 널리 알리고자 한다. 이번 동강할미꽃 촬영에서 정선에 있는 정선아라리 이수자를 만나 촬영하고 싶었으나 다음 기회로 미뤘다.
ⓒ 정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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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섯 수의 정선아라리 엮음은 부르는 이마다 엇비슷하면서도 저마다 다른 표현으로 불러 혼란스러웠다. 같은 노래도 부르는 이에 따라 노랫말이 바뀌는 정선아라리의 특성 탓에 정리하기 가장 어려웠다. "월미봉 살구나무도 고목이 덜컥되면 오던 새 그 나비도 되돌아간다" 같은 경우엔 마지막 부분이 "어느새 그 나비도 뒤돌아간다"로 부르는 노인도 있고, "오던 새 그 나비도 뒤돌아간다"로 부르는 이도 있다. 되돌아가나 뒤돌아가나 어차피 바라보지 않는단 의미는 분명하다.

세월이 속절없이 오고 가는 걸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음을 절실하게 느끼는 이 나이 되고 보니 알겠다. 대를 밀지 못할 정도로 노는데 정신 팔려도 좋으니 다시 스무 살 시절로만 돌아갈 수 있다면 이번엔 정말 실수 하나 없이 잘 살아볼 거 같기도 하고.

이제 4월이다. 3월을 봄이라 하지만 그건 예전 음력을 사용할 때 한 말들이니 4월이 진정한 봄이다. 연모의 마음 깊어 그 집 앞 되돌아간 적 한 번 없으나 어찌 봄 되면 더 애틋한 그리움의 대상조차 없었겠는가. 정선아라리에서 가장 많이 노래되어지는 주제 또한 이성 간의 그리움이다. 다음 얘길 그 애틋하면서도 참으로 구구절절 봄바람 살랑거리는 꽃비 속에 불렀음직한 사랑편만 남겨두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정덕수의 블로그 ‘한사의 문화마을’에도 실립니다.


태그:#정선아라리, #정선군, #탄광촌, #정선아라리 노랫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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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보고, 많이 듣고, 더 많이 느끼고, 그보다 더 많이 생각한 다음 이제 행동하라. 시인은 진실을 말하고 실천할 때 명예로운 것이다. 진실이 아닌 꾸며진 말과 진실로 향한 행동이 아니라면 시인이란 이름은 부끄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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