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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워 시간이 점점 길어지고 있었다. 날이 서늘해질수록 나이가 들어갈수록 아침잠이 줄어들수록 스트레스가 많아지고 피로가 누적될수록.

과하게 따뜻한 - 사실 매우 뜨거운 물에 한참 동안 몸을 맡긴다. 목과 어깨에 온수를 넘치도록 오랫동안 부어대고 있으면 온몸이 슬슬 녹으며 지난 피로가 싹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게 좋아 온수 샤워를 지나치게 오랫동안 하는 중이었다. 한 푼 아끼려고 애를 쓰며 사는 사람 맞지만 온수만큼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것만큼은 마음 내키는대로 제한없이 써보고 싶었다.

사실 난 그러면 안되는 사람이다.

몇 가지 질환 없는 사람은 없을테고 이왕 무좀부터 위장의 염증까지 다 털어놓으려 작정한 마당, 피부의 몹쓸 연약함도 드러내려 한다. 얼굴의 혈관이 지나치게 늘어져 확장되어 있단다. 얼굴 전체를 뒤덮은 괴상한 염증, 고름 등으로 용하다는 피부과를 전전한 끝에 늘어져 있는 혈관들을 수축시키는 레이저 시술을 받아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다.

피부과 레이저 시술의 비용은 다들 짐작하는 그런 수준이었다. 내게는 과한 금액이었지만 꽃게처럼 벌겋게 상해버린 피부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생애 최초로 내 살림 규모에 맞지 않는 금액을 결제하고 속이 쓰려 미칠 것 같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간절했다. 다행히도 시술은 효과를 발휘했고 난 다시 예뻐졌다.

예뻐졌다와 아니다의 기준은 오롯이 내가 정하는 것이며 나는 아무리 봐도 내가 예뻐졌다. 벌건 얼굴은 차츰 기본색을 찾아갔고 서비스로 해주신 잡티 제거용 토닝 덕분에 이전보다 더 화사해지고 예뻐지는 중이었다.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레이저라는 것, 정말 좋구나. 아니다, 돈이 좋은건가. 간신히 일시적으로나마 정리된 피부를 보며 아이처럼 좋아하는 나를 보며 의사 선생님의 경고가 있었다.

"가능하면 온수 샤워는 피하시고, 사우나는 금지이며 너무 뜨거운 곳에서 잠을 자는 일도 좋지 않습니다. 커피도 아이스가 좋구요, 뜨거운 국물 음식도 피하세요. 더운 곳에 오래 있거나 햇빛을 오랫동안 마주 하는 일 모두가 혈관의 수축을 방해하여 다시 늘어지게 만드니까요."

포기할 수 없는 온수 샤워

모두 참을 수 있었다. 운동을 할 땐 얼굴 전체를 가리는 마스크를 챙겨 다니며 자외선을 차단했고, 좋아하던 찜질방은 단숨에 끊었다. 한겨울에도 아이스커피를 마셨고 국에는 숟가락을 올리지 않았다. 온수 매트를 45도에 놓고 눈을 반쯤 감은 채 뜨뜻하게 지지는 것이 사는 낙이었는데 과감히 42도로 내리는 노력도 더했다.

하지만 딱 한 가지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온수 샤워다. 이것을 하지 않으면, 혹시라도 찬물로 샤워를 하면 죽는 줄 알았다. 평소 찬물 샤워를 하는 남편을 동물 보듯 했으며 온수가 나오지 않으면 차라리 씻지 않고 잠을 청하는 편을 택했다. 커피포트에 물을 끓여 샤워를 한 적도 있었으니 온수에 대한 집착이라고 해야하나, 여하튼 난 온수 없으면 안되는 사람이었다.

오래된 건물인 시댁에서의 찬물 샤워가 너무 싫어 시댁에서 자고 오는 것만은 거부하고 절레절레하던 사람이었단 말이다. 이런저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혈관 회복이 더뎠던 건 모두 그놈의 온수샤워 때문이었는데 난 차라리 벌건 피부를 택하겠노라고 할 만큼 온수샤워를 포기할 맘은 조금도 없었다. 사정 모르는 의사선생님은 진료 때마다 고개를 갸우뚱하셨다.

"생각보다 회복이 더디네요."

이유를 아는 사람은 여유가 있다. 선생님은 조급해 보였고 난 여유로웠다. 하지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여전히 좀 벌건 얼굴은 이전의 꽃게보다는 좀 덜한 새우살 정도에서 더 이상 나아지지 않았다. 난 그대로 얼굴 벌건 여자로 잘 지내고 있었다. 얼굴은 늘 좀 불긋하니 불안해보였지만 이전의 심각했던 상태를 아는 모든 이들에게 칭찬받을 만큼 회복하고 있었다. 난 이정도면 만족하려고 했다.

그러던 내가 진정 예뻐지는 일이 생겨버렸다. 이 나이에 예뻐져서 무엇 하겠냐마는 이 나이에 기다렸다는 듯 못생겨지는 것보다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예뻐져버린 이유가 슬프고도 기가 막힌데 한 번 들어보자.

온수와 냉수 중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

지난 겨울, 사이판에 갔다. 얼마 전 태풍으로 한 차례 홍역을 치른 그 곳 맞다. 그 사이판. 운항 중단됐던 비행기가 다시 뜨기를 기다려 추운 한국을 떠나 도망치듯 사이판에 갔다. 숙소도 도로도 예전 모습 그래도인 모습에 이렇게 멀쩡하게 복구되어 있는 것을 내가 왜 망설였을까하며 돌아온 사이판에 환호를 보냈다(거제도의 3분의 1밖에 안되는 시골섬 사이판은 시골에서 나고 자란 내 정서에 딱 맞는 친정같은 곳이다).

이 곳에서의 슬픈 사연으로 미모를 업그레이드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찬물 샤워였다. 숙소엔 전기도 들어오고 물도 잘 나온다고 했다. 내가 생각하는 물은 온수였고 숙소 사장님이 간신히 지켜낸 건 찬물도 감지덕지한 샤워 가능한 상황이었다. 온수가 나오지 않았다. 나올 기약이 없단다. 이틀을 씻지 않고 견뎠다, 그 뜨거운 사이판에서.

참을 수 없어 벌받는 학생처럼 몸을 어찌할 줄 몰라하며 찬물로 샤워를 했다. 이가 덜덜 떨리게 추웠다, 그 뜨거운 사이판에서. 피부에 직접 닿는 차가운 물의 온도가 소름 끼치게 싫어서 샤워를 해야하는 아침이 오는게 두려울 정도였다. 샤워를 할 때마다 한숨을 가장한 욕이 나왔고 한국의 우리집, 좁고 빛도 잘 안 들어오지만 온수만큼은 펑펑 나오는 우리집이 절절히 그리웠다. 욕을 해대며 뼛속까지 시려오는 찬물로 샤워를 하며 지내고 있었는데. 예뻐져버렸다.

원치 않던 찬물샤워는 나의 늘어지고 확장된 혈관을 바싹 수축되게 만들었다. 낮은 온도에 수축되어버린 혈관은 새우살처럼 붉던 얼굴색을 슬슬 예전의 평범한 황인종의 그것으로 돌려놓고 있었다. 욕을 하며 찬물에 몸을 던지던 그 시간 동안 피부 밑의 혈관들은 기다렸다는 듯 수축활동에 열심이었다. 그들은 멋졌다.

비비크림으로 두껍게 가리지 않아도 그런대로 괜찮아보이는 부러워하던 평범한 칼라의 피부가 되었고 그로 인해 부쩍 예뻐졌다. 화장이 엷어지고 피부톤이 정돈되자 전체적으로 깔끔하고 세련되어 보이는 것은 물론 사진발도 잘 받고 전에 입지 못했던 빨간 티셔츠도 괜찮게 어울렸다. 그러니 결과적으로는 훨씬 예뻐졌다는 뜻이다. 어떤 일도 좋지만은 않고 어떤 일도 온전히 나쁘지만은 않다는걸 익히 알고는 있었는데 사이판의 냉수샤워가 그러하다.

고민 한 가지. 온수가 펑펑 나오는 우리집으로 다시 돌아간다면 온수와 냉수 중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 손잡이를 슬쩍만 돌리면 온수가 쏟아져 나올 샤워기를 붙잡고 과연 나는 찬물로 샤워하며 이 미모를 계속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온수의 유혹을 이겨낼 자신이 있는가. 나는 자신이 없으니 혈관들에 물어보자.

"제군들은 지금 단단히 잘 수축되어 지내고 있으니 혹시라도 다시 온수의 공격을 받는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어지지 않고 잘 붙어있을 수 있겠는가. 대답들 하시게. 자네들만 믿겠네."

곧 돌아왔고, 기다렸다는 듯 온수의 품으로 돌아갔으며 다시 예전의 불긋한 얼굴이 되어 선크림과 비비크림을 두툼하게 바르느라, 그리고 저녁이면 거품을 내어 닦아내느라 요즘 좀 바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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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읽고 날마다씁니다. 작은것을 지나치지않고 정성을 다해 글을 짓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