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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젠가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는 당시 중학생이었다.
 특정한 편견과 불쾌가 포함된 "한남"이 아니라 굳이 써야 한다면 "한국 남자"라는 중립적 표현을 써야 한다. 그러나 외형상 합당해 보이는 이러한 논의가 허전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 pixabay

시몬 드 보부아르는 <제2의 성>에서 자신에 대해 말하려면 자신이 먼저 여성임을 이야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 내가 나를 이야기할 필요나 의지가 있는 것은 아니고, 앞으로 '나'보다는 나의 남성을 종종 운위할 터인데 이때 나의 남성은 이 시점에서 '한남'일 수밖에 없음을 분명히 한다.

나무위키에서 한남은 "'한국 남자 + 충'의 준말"로 "한국 남성 전체를 대상으로 비하하는 속어"라고 밝혔다. 이어 "주로 (래디컬) 페미니즘을 표방하는 여성들이 한국 남자 전반을 비난하기 위해 사용하는 언어로서 한국의 대표적인 남성 혐오 커뮤니티 사이트였던 메갈리아에서 만들어진 용어"라고 기술한다. 줄여서는 '남충' 또는 '한남'이 있다고 한다. '한남충'과 '남충'과 달리 '한남'은 "자신들의 커뮤니티 외부에서도 쓰기 편하게 위장한 줄임말일 뿐 비하성 본질은 어원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돼 있다.

여기서 '한남' 혹은 '한남충'이란 말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떤 변천을 거쳤는지는 굳이 살펴볼 필요는 없지 싶다. '한남'이 '한국남자'의 줄임말이 아니라 '한남충'의 줄임말로 보아야 하며, 사실상 혐오표현으로 보아야 한다는 정도로 정리하면 되지 않을까.

그리하여 '한남'이란 표현을 쓰는 여성이나 남성에게 "혐오표현이므로 사용이 적절치 않다"는 (주로 남성들로부터) 반박이 제기되곤 한다. 일리가 있긴 하다. 모든 종류의 혐오를 혐오해야 하는 시대적 요청을 감안할 때 '한남'이란 용어가 자제되는 게 맞다. 특정한 편견과 불쾌가 포함된 '한남'이 아니라 굳이 써야 한다면 '한국 남자'라는 중립적 표현을 써야 한다.

그러나 외형상 합당해 보이는 이러한 논의가 허전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개인적 판단으로는 '한국 남자'가 외형상 중립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편파적인 용어이며 내용상 중립적인 용어는 '한남'이 맞는다고 본다. 기호나 기표와 기의(+맥락 혹은 상황)를 들지 않고 단순화해 설명하면, 말은 현실을 반영하는데 대체로 그 반영은 상당한 왜곡을 포함하기 마련이며, 따라서 '한국 남자'의 왜곡 없는 정확한 표현은 '한남'이다.

많은 '한남'의 공분을 살 나의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무엇일까.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를 받은 식민지 조선 민중의 입장을 생각해보자. 당시 일부 양심적인 일본인은 그렇지 않았겠지만 아마도 적잖은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을 '조센징'이라고 혐오하고 멸시하는 표현을 공공연하게 또는 마음속에서 썼을 것이고, 지배를 받는 조선인들은 반대로 일본인들을 '쪽바리'라고 불렀을 터이다. '조센징'이란 표현이 양자가 있는 가운데서 사용될 수 있었다면 '쪽바리'란 표현은 조선인들끼리만 썼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점은 명목상 모두 혐오표현인 두 단어가 맥락상 다르다는 것이다. '조센징'과 '쪽바리' 가운데 전자가 혐오의 표현이라면, 후자는 분노의 표현에 해당한다. 과거사 문제가 남아있기는 하지만 국제적으로 대등한 관계인 지금은 서로를 한국인과 일본인으로 객관적으로 또한 비(非)혐오적으로 불러야 한다.

그러나 '조센징'의 불편함을 논외로 하고 '쪽바리'란 표현의 정당함은 식민지 조선 민중에게 너무나 당연해 보인다. 억압받는 조선 민중에게 그 정도 분노의 표현이 허용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너무 가혹하다. 식민지배를 받으면서, '조센징'이라 불리면서, 상대방을 "일본인은…"이라고 '교양' 있게 부르는 사람이 무결한 사람일 수 있겠지만 현실의 인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내 의견으로는, '한남'은 부적절한 혐오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온당한 분노의 표현이다. 비유로써 수 천 년을 '조센징'으로 불린 상황에서 이제 조금 '쪽바리'로 불렀다고 해서 '쪽바리'란 말을 한 사람을 혐오자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 오히려 최소한의 존엄추구라고 보는 게 더 타당하다.
 
 대화
 혐오는 억제되어야 하지만 분노는 표출되어야 한다. "한남"표현은 수 천 년 적폐인 여성혐오와 차별에 대한 정당한 또는 최소한의 분노의 반영이다. "한남"은 물론 혐오표현이지만 "한남"에 들어있는 혐오 자체보다, "한남"이 수행하는 여성혐오에 대한 간접적 저항이란 기능이 훨씬 더 크다.
ⓒ pixabay

혐오는 억제되어야 하지만 분노는 표출되어야 한다. '한남'표현은 수 천 년 적폐인 여성혐오와 차별에 대한 정당한 또는 최소한의 분노의 반영이다. 만일 내가 일본 제국주의 식민시대 일본인이었다면, 조선인이 뒤에게 나에게 '쪽바리'라고 욕했다고 해서 그것을 혐오표현이라고 받아들이지는 않았지 싶다. 물론 불편하긴 하였겠지만 주어지면 수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었을까.

'일본인'인 내가 '조센징'이란 표현을 하는 것은 삼가야겠지만, 어쩌다 '쪽바리'란 말을 듣게 되어도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법하다. '한남'과 '쪽바리'가 다르지 않다. '한남'은 물론 혐오표현이지만 '한남'에 들어있는 혐오 자체보다, '한남'이 수행하는 여성혐오에 대한 간접적 저항이란 기능이 훨씬 더 크다.

이제 "가부장제와 제국주의 식민지배를 어떻게 단순 비교하냐"며 난리를 칠 사람이 있겠지만, 그 판단은 양심과 시대에 맡기고자 한다. 다만 어떤 관점에서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공식적으로는 '한남'이란 용어가 사용되지 않았으면 한다. 다시 비유로써, 아무리 일제 식민지시대라고 하여도 만일 뭔가 건설적인 논의를 위해 조선인과 일본인이 만나게 된다면 그때 서로를 '쪽바리'와 '조센징'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현실에서 '한남'은 불가피하다는 판단이다.

다음 글은 늙은 '한남'인 나와 함께 공부하는 젊은 '한남' 안아무개 씨의 글이다.
 
"나는 한남이다. 단순히 '한국남자'의 줄임말뿐만 아니라 그 안에 내포된 혐오적 의미를 인정한다. 한국남성은 부끄럽지만 그럴 수밖에 없다. <맨 박스>의 저자 토니 포터에 따르면 남성은 선하게 살아가도 필연적으로 유리한 사회적 구조에서 여성에게 고통을 준다. 묵인한다면 여전히 남성 중심적 사회화에서 벗어날 수 없다. … 한남임을 인정하고 페미니즘을 지향한다. 내 여자 친구가, 미래의 내 아내가 살아가는 세상이 조금 더 나아졌으면 좋겠다. 내가 혹시 낳게 될지도 모르는 딸이 살아갈 세상이 지금보다 지속가능하고 가치 있기를 꿈꾼다. 내가 혹시 낳게 될지도 모르는 아들의 젠더 감수성이 풍부했으면 좋겠다." 

한국 남자가 '한남'임을 인정하는 순간, 역으로 한국 여자가 한국 남자를 더 이상 '한남'이라고 부르지 않게 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변화하려면 대화를 시작해야 하고 대화는 인정에서 시작된다. '한남'들이여 우리가 '한남'임을 인정하자.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안치용 기자는 지속가능저널 발행인 겸 한국CSR연구소 소장이자 영화평론가입니다. 이 글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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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평론하고, 래디컬 정치를 사유한다. 활자에도 익숙해 틈나는 대로 책을 읽고 이런저런 글을 쓴다. 다양한 연령대 사람들과 문학과 인문학 고전을 함께 읽고 대화한다. 사회적으로는 지속가능성과 사회책임 의제화에 힘을 보태고 있다. 청소년/대학생들과 자주 접촉하는 삶을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