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02 17:27최종 업데이트 19.04.03 09:03
국민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기관으로부터 안전과 인생을 빼앗긴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잘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범죄자가 되었던 이들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진실을 밝혀냈습니다. 그리고 사과 없는 국가를 대신해 스스로 자신을 기념하는 '이상한 집'을 지으려 합니다. 그 이상한 집의 이름은 '수상한 집'. 지금 제주에서 벌어지는 수상한 일을 채워줄 수 있도록 함께 해주세요.[편집자말]
우리는 상처난 우리의 삶을 치유할 시간과 공간을 가진 적이 없습니다. 조작간첩 피해자의 진실규명을 위해 다니던 중 참 이상한 장면이 있었습니다. 제주 4.3평화공원 맞은편에 어쩌면 '가해자'였을 경찰의 연수원이 있습니다. 이곳을 지날 때마다 '왜 경찰에게 고문 당한 피해자를 위한 쉼터는 없을까?'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공간이 있으면 했습니다.

그러나 국가는 국가폭력피해자가 엄연히 있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그들을 기억하고 치유하는 노력은 전혀 기울이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고민에서 우리는 제주에 '수상한 집'을 상상했습니다. 그럼 왜 제주였을까요?

왜 제주인가
 

제주 4.3희생자들 제주평화공원에 전시된 4.3희생자들의 사진들 ⓒ 김민수


흔히 제주 하면 평화로운 섬이라는 이미지가 먼저 떠오릅니다. 지친 일상에서 벗어난 쉼, 회복의 공간으로 찾는 곳이 바로 제주입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이후로 4.3 사건과 각종 시국사건이 끊이지 않았던 곳이 제주입니다. 특히 4.3 사건의 후유증은 제주를 좌우로 가르고 4.3의 피바람으로 많은 이가 희생되었습니다. 운 좋게 그 바람을 피해 일본으로라도 탈출할 수 있었던 사람은 대한민국 정부에 대한 불신과 원망이 상당했을 것입니다.

1970년대 이전의 제주는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경제가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한국전쟁 이후 회복되지 않은 경제기반 탓에 제주민들은 팍팍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결국 제주 사람들은 한국전쟁 전후 일본으로 먼저 건너간 재일교포 친척들을 찾아 밀항을 선택하게 됩니다. 1960년대 제주에서는 한 집 건너 한 집이 밀항 간다 할 정도로 일본으로 많은 사람이 건너갔습니다. 10t도 되지 않는 작은 목선 바닥에 수십 명이 다닥다닥 붙어 앉아 대소변을 해결하며 죽을 힘을 다해 건너갔던 것이지요. 굶어 죽으나 바다에 빠져 죽으나 죽기는 매한가지라는 심정이었습니다.


힘겹게 일본으로 건너간 제주사람들은 그곳에서 불법체류자, 불법외국인노동자 신분으로 불안한 고용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대부분 미리 건너가 자리를 잡은 친척들의 가방 공장, 옷 공장, 철강 공장, 도금 공장, 파친코, 식당 등에서 일하게 되었죠.

이들은 성실히 일해 번 돈을 제주의 가족들에게 생활비로 송금합니다. 밀항 생활 중 좋은 인연을 만나 새로 가정을 꾸리기도 하죠. 운이 좋아 일본에서 오래 살았다면 그곳에서 외국인등록증을 발급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대부분 같은 직장 내의 동료나 인근 주민이 신고해 몇 개월 내지 몇 년 안 지나 출입국관리소 직원들에게 체포되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체포되면 간단한 조사와 재판을 거치게 되고 송환 결정이 되면 오오무라(大村)수용소에 임시 수용되었다가 한국으로 강제 송환됩니다. 비극은 이때부터 시작됩니다.

조작 간첩의 시작
 

재일제주인센터에 설치된 재일교포 거리 모형도 ⓒ 지금여기에


제주 밀항자들이 일본에서 머물렀던 지역은 대부분 재일교포가 집단으로 거주하는 곳입니다. 오사카의 츠루하시(鶴橋), 도쿄의 아라가와(荒川)구 등이 대표적인 곳입니다. 그곳은 재일교포가 많이 거주하는 만큼 그들과 접촉도 빈번하게 이뤄집니다.

예를 들어 연말연시가 되면 일본에 거주하는 친인척들이 한곳에 모여 함께 제사지내고 식사하며 서로 안부를 묻습니다. 봄철 벚꽃놀이를 함께 하거나 가을철 단풍놀이도 함께 하지요. 휴가철이 되면 함께 놀러가기도 합니다. 또 집안의 경조사, 결혼이나 문병, 장례가 있다면 모이게 되겠지요.

일본에서 불법 체류자로 산다면 가장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역시 그곳에서 자리 잡은 친인척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의 신분입니다. 우리가 흔히 재일교포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국적은 일본일까요? 아닙니다. 그럼 대한민국 국적일까요? 그것도 물론 아니지요.
 

재일제주인센터에 설치된 밀항선 전시물 ⓒ 지금여기에


1945년 일본이 패망한 직후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강제로 끌려오거나 이주해온 조선 사람들에게는 일본정부가 임시여권을 발급했는데 당시는 분단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이라는 국적을 부여했습니다. 1948년 이후 두개의 정부가 세워지고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조선이 남북으로 분단되면서 한반도에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두 개의 국가가 세워집니다. 따라서 재일교포가 한국에 들어오려면 그때까지 써왔던 '조선' 임시여권이 아닌 대한민국 여권을 발급받아야 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물론 북한에 들어가려는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재일본거류민단 소위 '민단'과 재일조선인총연합 즉 '조총련'이 생기게 된 것은 이때부터였습니다. 그러니 일본사회에 사는 재일교포의 여권은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그리고 해방 직후 받았던 '조선' 이렇게 세 부류가 있었던 것입니다.

재일교포들은 서로 '신분'이 다른 사람들과도 자연스럽게 어울려 살게 됩니다. 제주 밀항자로서는 일본에서 생활하는 친인척들의 이런 신분을 알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일본에 밀항으로 다녀온 사람들은 입국하면서 수사기관의 조사를 받게 되는데 이 조사에서 조총련 친척을 만났는지, 북한과 관련한 활동을 하거나 한국정부를 비판하는 교포를 만났는지 등을 질문 받습니다. 특히 일본에서 생활할 때 한국정부를 비판하는 친척들을 만난 사실을 말하게 되면 대부분 국가보안법 피의자로 입건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일단 경찰이나 보안사,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조사받게 되면 거류민단 소속의 친척을 만났어도 조총련 친척을 만난 것으로 둔갑이 되고, 친척들에게 용돈을 받거나 생활금을 받았다면 공작금을 수수한 것으로 됩니다. 친척 중에서 한국정부를 비판하는 사람이 있다면 지령을 내리는 상부선이 되는 것이고, 그의 부탁을 들어주게 되면 간첩행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제주의 조작간첩 피해자들 역시 공통적으로 위와 흡사한 경로로 간첩이 되는 경우였습니다. 이 조작간첩의 제조원은 중앙정보부, 국가안전기획부, 치안본부, 국군보안사령부 등이었습니다.

2011년부터 지금까지 국가폭력피해자를 지원하는 시민단체 '지금여기에'가 만난 조작간첩 피해자는 수없이 많습니다. 특히 그 '만들어진' 간첩은 남도의 섬 제주에  많았습니다.

지금까지 '지금여기에'가 만나 진실규명을 함께 한 피해자는 강광보, 김평강, 오재선, 오성재, 강희철, 김용담, 양한병, 양동주, 임문준, 김태주, 허간회 등 수없이 많은 피해자가 제주 출신이었습니다. 

꼬리를 무는 의문... 왜, 왜, 왜?

이렇게 많은 피해자를 만나 진실을 규명하는 동안 여러 의문이 들었습니다.

왜 피해자는 이렇게나 많은데 가해자의 사과가 없을까?
왜 국가는 책임을 인정하지 않을까?
왜 피해자의 몸과 마음을 치유하기 위한 어떤 노력도 하지 않을까?
왜 이들의 역사를 기록하고 기억하지 않으려 할까?

적어도 대한민국 이 땅에 수많은 조작간첩 피해자가 있는데, 밝혀진 사람들만이라도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국가가 이들을 기념하지 않는다면 '지금여기에'라도 기념하고 기억하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소위 '스파이 뮤지엄', 정확히는 '조작간첩기념관'을 만들어 보자고 생각했습니다.

'만들어진 간첩을 기억'하는 생각은 어찌보면 터무니없는 생각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일단 그 어디에도 조작간첩의 역사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곳이 없었던 터라 무슨 내용으로 기념관을 채울지 난감했습니다.

사실 제일 먼저 고민한 것은 내용보다 현실적인 돈 문제였습니다. 마침 2016년에 피해자 중 한 분으로 제주에 사시는 김태주 선생님께서 자신이 운영하는 감귤농장 한 편에 기념관을 세우자는 제안을 하실 때만 해도 금방 기념관이 들어설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자녀들의 반대로 무산되고 그 뒤 제주 동복리에 다시 기념관을 지으려고 하는 계획이 자금 문제로 한번 더 좌절될 때, '아 기념관을 짓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2017년 12월 겨울 극적인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반전, 강광보 선생의 한마디
 

2016년 가을 서울에서 열린 치유사진전에 전시된 강광보 ⓒ 지금여기에


동복리에 기념관을 짓기로 한 계획이 무산되고 나서 강광보 선생님과 함께 허탈하게 제주공항으로 오는 길이었습니다. 기념관 계획이 두 번에 걸쳐 무산되다 보니 자금없이 시작되는 기념관은 불가능하구나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차 안에서 아무 말없이 옆자리에 앉아 있던 강광보 선생님이 불쑥 한마디 건넸습니다.

"우리 집에 기념관을 지어볼까?"
"선생님 지금 살고 있는 그 집에 기념관을 짓자고요?"

"응, 터가 100평 정도 되니까 거기다 작게라도 지을 수 있지 않나?"
"근데 그게 말처럼 간단하지가 않네요. 돈도 많이 들어가고, 지어놓으면 유지도 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자체 수익구조도 있어야 하고."

"그럼 기념관에 카페 같은 거 하나 만들지 뭐. 자고 갈 수도 있게 만들고 말이야."


날 위로하시는 말치고는 너무 많이 나가셨다 싶었습니다.

"선생님, 말씀은 진짜 감사해요. 그런데 기념관이 땅만 있다고 지을 수 있는 게 아니라서 말처럼 쉽게 지을 수 없잖아요."
"나도 알지. 쉽게 꺼낸 말 아니야. 어차피 돈이야 내 사건 무죄 받았으니 형사보상금 나올 거 아냐. 그걸로 기념관 지을 수 있지 않을까? 아, 돈이 모자라면 사람들에게 모금도 하고 기부도 받고 하면 되겠지. 시작도 안 하고 뭘 걱정부터 해?"

"가족들하고는 이야기 해 보셨어요?"
"가족은 뭐..."


선생님은 말끝을 흐렸습니다.

"보상금이야 내 돈이지만 보람 있게 쓰고 싶다고!"
 

2017년 겨울, 모슬포 식당에 들어서는 강광보. 이 식당은 1986년 강광보가 보안대 수사관들과 함께 현장검증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들른 식당이었다. ⓒ 지금여기에


강광보 선생님은 1986년 보안사에 끌려가 간첩으로 조작된 후 7년을 복역했습니다. 복역이 끝난 후 제주로 돌아와 가족들과 살았지만, 간첩 아버지를 인정할 수 없다는 가족들의 냉대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집을 나와 홀로 생활해야 했습니다. 가족들마저 자신을 간첩으로 여기는 것이 너무도 억울하고 분했지만 해명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결국 간첩으로 입건된 후 가족과 30년 이상을 떨어져 살아야 했습니다.

'지금여기에'를 만나 2013년 재심을 시작해 결국 2017년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30년 이상 떨어져 살아온 가족들과의 관계는 쉽게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남은 가족들은 강광보 선생님을 남편으로, 아버지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관련기사] 7년 만에 다시 찾아온 수사관, 가족을 모두 잃은 사내).

"가족들도 안 믿어주는 게 우리 같은 간첩 피해자야. 그러니 죽기 전에 사람들한테 우리 같은 억울한 사연을 좀 알려야 하지 않겠어? 난 보상금 줄 가족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어. 보상금이야 내 돈이지만 보람 있게 쓰고 싶다고."

국가배상금이라는 것이 자신에게 나오는 보상금이지만 자신의 돈이라고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자신과 같은 피해자들을 기억하고 아직 밝혀지지 않은 피해자들의 구제를 위해 써야 한다고 생각한답니다. 개인의 돈이 아니라 공익의 돈이라고 생각한답니다.

'수상한 집'은 그렇게 만들어지고 있었습니다.
 

제주 동복리에 지으려 했던 기념관의 조감도. 자금과 협업 등의 문제로 무산되었다. ⓒ 지금여기에

 
(* 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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