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살아남은 아이> 스틸 사진.

영화 <살아남은 아이> 스틸 사진. ⓒ (주)엣나인필름

 
긴장을 조성하는 음악 하나 없이, 바짝 조여진 신경을 늦추지 않은 스릴러 형식은 놀랍다. 특별한 장치 없이 영화를 끈기 있게 길잡이 하는 감독의 연출력이 돋보인다. 현란하게 주고받는 대화의 기교 없이, 감정을 착취하는 최루 없이, 슬픔의 전시 없이, 영화는 시종일관 '잘 듣고 보라'며 관객을 집중시킨다.

영화 <살아남은 아이>는 고통에 관한 이야기다. 한 죽음 이후, 그 죽음과 무관할 수 없는 사람들의 고통으로 이겨진 시간들. 점차 드러나는 진실 앞에 무너져 내리는 삶. 생사가 갈리는 순간, '살아있던 아이'는 '살아남은 아이'가 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살아남은 이유가 지독히 남루해지자, 다른 선택을 하기로 한다. 그 선택이 바꾼 것은 무엇일까?
 
절정을 치달은 영화가 끝나자 막상 막막했다. 그래서 오고 가는 생각을 접고 한 번 더 보았다. 처음 볼 때는 죽은 아이의 부모가 되어 푹 빠졌고, 두 번째는 이상하게도 주인공 기현이 되어 있었다. 죽은 아이 은찬도 살아남은 기현도 모두 18살이었다. 내 딸과 같은 나이다.
 
은찬 엄마 '미숙'(김여진 분)과 은찬 아빠 '성철'(최무성 분)은 아들 은찬의 죽음 이후 마음을 잡지 못한다. 미숙은 은찬이 사무치게 그립다. 지겨운 이 삶을 어떻게든 버텨내야 하기에, 시험관 아기라도 가져볼까 궁리한다. 성철은 아들의 죽음이 그나마 친구를 구하려다 죽은 '의로운 죽음'이라고, 자신을 애써 다독인다. 그렇기에 은찬을 의사자(義死者)로 선정되게 하기 위해 그가 기울이는 노력은, 그로서는 최선의 애도인 셈이다.
 
아들이 구한 '살아남은 아이'(기현)가 학교를 그만두었다는 소식을 듣자, 그의 마음은 불편하다. '기현'(성유빈 분)을 만난 후, 의지할 부모가 없다는 사실을 알자 더 불편해진다. 내 아이가 죽음을 무릅쓰고 구한 녀석이 이렇게 살게 두어선 안 된다는 성철의 묘한 의무감은 기현을 곁에 두게 한다.

성철의 접근에 주춤하던 기현의 경계심은 난생처음 받아보는 사람의 온기로 무장해제되고 만다. 기만으로 적당히 관계를 가져가려던 기현은 그제서야 본격적으로 죄책감을 느낀다. '이런 좋은 사람들의 아이를 내가 죽게 했구나.' 기현은 마침내 은찬이 죽게 된 내막을 밝힘으로써 미숙과 성찰 곁에 떳떳이 있으려 한다. 바로 이 지점이 나로서는 굉장히 해석하기 어려웠다. 영화를 두 번째 보며 기현이 되어보고 나서야, 기현의 이중적 심리상태를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기현은 어릴 때 엄마에게 버림받았다. 새 애인을 만난 아빠는 새 살림을 차리며, 이제 어떤 경제적 지원도 할 수 없다고 통보한다. 겨우 17살의 아이에게 알아서 살라니. 17살은 마음대로 취직조차 할 수 없는 나이 아닌가. 기현은 막막하다. 집세를 낼 돈조차 궁색해지자, 학교를 그만두고 배달 일을 시작한다. 그런 기현에게 불쑥 끼어든 성철은 비록 무뚝뚝하지만 든든한 믿음을 준다. 부모도 자기 살겠다고 버린 자신을 걱정해주고 보살펴주려는 성철에게 실상 반해버린 것이다.

어찌 보면 기현은 아슬아슬하게 금을 밟고 서 있는 형국이다. 이렇게 좋은 분들에게 몹쓸 짓을 하고 있다는 죄책감과 고백을 하고 용서를 받아 더 길고 안전하게 그들 곁에 있고 싶었을 욕망이 줄타기하게 만들었다. 18살의 기현은 아직 미숙과 성철의 자식을 잃은 아픔을 깊이 헤아릴 수 없다. 기현의 죄책감은 무고한 아이를 죽게 했다는 근본적 회한이라기보다 차라리, 자신에게 곁을 내준 좋은 어른들을 속이고 있다는 미안함의 발로였다.

기현은 홀딱 벗겨진 채 세상 앞에 덜렁 놓여 있는 자신의 삶이 너무 외롭고 무섭다. 시간이 훌쩍 지나 아빠가 된 어느 날, 기현은 자신이 탐냈던 양지(陽地)가 얼마나 염치없는 자리였는지를 깨닫게 될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오직 혼자 견뎌내야만 할 혹독한 시간만이 야수처럼 아가리를 벌리고 있을 뿐이다. 그런 기현에게 미숙과 성철은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매달리고 싶은 동아줄이지 않았을까?

기현의 고백으로 은찬 죽음의 전말을 알게 된 미숙과 성철은 더 깊은 고통의 수렁에 빠진다. 그들은 '은찬은 이미 죽었고, 의로운 죽음으로 결정한 이상 군말하지 말라'며 세상으로부터 우격다짐 당한다. "의사자라고 보상금도 받고 다 잘 됐잖아, 은찬의 의로운 죽음이어야 내 아이들이 살아, 의사자가 다닌 학교여야지 학교 폭력 피해자가 다닌 학교가 되면 명예가 떨어지잖아"라며 세상은 공모한다.

공범자들은 부끄러움을 모른다. 꼭 내 자식이 죽어나가야만 내 일이 되는 부모들의 이기심은 쉽게 부정의와 손잡게 한다. 피해자 부모가 어떻게 가해자와 친할 수 있냐는 의심의 눈초리는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며, 미숙과 성철의 법정싸움을 결국 패배하게 만든다. 다수 가해자들의 공모로 아들 죽음의 진실을 밝힐 아무런 방법이 없자, 미숙과 성철은 마지막 결정을 한다.
 
기현이 겉옷 주머니와 옷 안쪽에 작은 돌들을 가득 채우고 물속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영화 결말 부분은, 기현 주머니 속 가득 채워진 돌들만큼이나  많은 의문들로 채워진다. 기현은 자신의 고백을 후회했을까? 그렇게도 살고 싶었건만, 죽음을 결심한 순간, 어쩌면 홀가분했을까? 혹은 그렇게 죽음으로써 기현은 자신의 죄를 사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살아남은 아이>는 감독의 의도와 상관없이 '세월호'의 은유로 가득하다. 2014년, 은찬과 기현처럼 18살이었을 단원고 학생들은 꽃봉오리처럼 떨어졌다. 온 나라가 충격에 빠졌다. 모두 한마음으로 애도할 줄 알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애가 끊어지는 고통 속에 있는 유가족들을 보상금이나 노리는 무뢰한으로 가공시켰고,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공작이 이루어졌다. 마침내 단식하는 유가족들의 농성장에서 폭식을 하는 '야만'마저 전시하였다. 이제 그만하라며 유가족들을 끊임없이 몰아세웠다. 성철은 말한다. "한 게 없는데 뭘 그만하라는 거야."
 
은찬의 죽음이 물속에서 일어났다는 것은, 수많은 아이들이 수장당한 진도 바닷속을 불러낸다. 진실을 말하려는 기현과 기현의 말이 거짓이라는 공모자들의 진술이 팽팽하게 맞선 것처럼, 세월호의 진실도 은폐와 가공의 시나리오였다. 어차피 죽은 아이는 말하지 못하니, 살아남은 자들은 사실들을 조작하고 편집해 진실로 만드는데 성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진실이라고 하는 것이 진실이 아님을 그 누구보다 공모자들이 더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만들어 낸 진실'은 눈 시퍼렇게 살아 있는 양심을 무한히 밀어내지 못한다. 삶의 어느 한순간, 택배로 배달되는 폭탄처럼 불현듯 들이닥칠 것이다. 어린 공모자들은 미완의 사악함으로 인해 스스로를 괴롭히며 허물어질 것이다. 자의든 타의든,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라도. 고통은 인내하며 끝까지 따라갈지니.
 
몇 년 전 세월호 유가족을 만난 일이 있다. 그러지 말아야 하면서도 유가족을 보면, 멀리서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의 노란 색만 봐도, 울컥 눈물이 베어 나곤 했다. 그중 수호 어머니가 오래 기억에 남았다. 당시 다리를 다쳐 깁스를 하고 있었는데, 불편한 다리로 오가며 한 마디라도 더 진실의 조각들을 내보이고 싶어 했다.

그런 그들, 살아남은 아이들과 그 유가족들의 이야기가 영화가 되어 나온다. 그날 이후, <금요일엔 돌아오렴(240일간의 세월호 유가족 육성 기록)>을 사놓고도 미처 읽지 못했다. 비겁하게도 직면해야 하는 진실들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번엔 용기를 내볼까 한다. 곧 세월호 5주기다. '살아남은 아이들'과 '살아남은 어른들'을 만나러 갈 시간이다.
 
살아남은 아이 신동석 성유빈 세월호 5주기 피해자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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