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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 글('동강할미꽃'은 아라리 가락에 피고)에서 슬그머니 다음에 소개할 내용을 은근슬쩍 던져두었다. 아무리 은유적이라 해도 맨 정신에 소개하려니 쉽사리 자판이 쳐지지 않는다. 하지만 얘기를 풀어가다 보면 뭔가 수단이 생기고 어느 정도 방향도 잡아갈 일이니 천천히 생각하기로 한다.
  
정선은 어디를 가도 뼝대와 강을 만난다. 선평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낙동리 지장천에도 그리 크지 않은 내가 흐르는데 한 면은 뼝대가 가로막아 물굽이를 휘돌아 나가게 한다.
▲ 낙동리 지장천 정선은 어디를 가도 뼝대와 강을 만난다. 선평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낙동리 지장천에도 그리 크지 않은 내가 흐르는데 한 면은 뼝대가 가로막아 물굽이를 휘돌아 나가게 한다.
ⓒ 정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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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아라리 사설을 수집하겠다고 나선 길은 아니지만, 이번처럼 친구와 정선에 동강할미꽃을 촬영하러 나서 본 게 아마도 너덧 번 족히 된다. 그 외에도 카메라 막 장만해 들고 온 어렸을 적 짝꿍과 함께 나서기도 했고, 버스 몇 번 갈아타고 정선에 가서 택시로도 찾아갔으니 청량리에서 기차로 다니던 때에 비하면 호사랄까.

어머니 산소가 있었고, 정선아라리와 들꽃 좋아하는 입장에서 개꽃(산철쭉)과 동강할미꽃을 핑계로 정선을 찾은 날들이 제법 잘 익어 갈 시기도 되지 않았을까 싶다. 하기야 좀 이르게 맞는 가을 풍경도 좋지만 물매화와 개버무리나 큰잎쓴풀 등 정선만 가면 반가운 만남의 대상이 늘 있었다.

새벽부터 글 좀 쓰다 빈속으로 친구와 동행해 나선 길 배부터 채워야 했다. 마침 점심시간도 되어 매년 들리는 단골 식당에 차를 대려는데 마땅치 않다. 좀 더 직진해 차를 돌려 강변도로 갓길에 주차하고 식당으로 들어가니 주인이 "곤드레밥 둘이죠"라며 대답을 듣기도 전에 주방을 향해 "곤드레 둘"하고 소리친다.

어차피 주문할 거였으나 그래도 차림표 볼 기회도 안 준 주인이 야속하다. 곱고 아름다운 동강할미꽃을 보는 것도 옛말 '금강산도 식후경' 그대로 배부터 채워야 무얼 하던 의욕적이 될 일이다. 곧바로 나온 밥에 간장 한 수저 넣고 비벼 먹고, 강된장 한 수저 넣고 비벼 먹기도 하던 중 문득 오래전 신체검사를 받으러 정선에 와야 했던 일이 생각났다.
  
정선을 가면 곤드레밥 한 그릇 먹을 일이다. 가난한 산골 사람들이 끼니를 때우기 위해서는 적은 양곡을 늘려 먹어야 했다. 시래기는 물론이고 콩나물이나 무채를 넣고 지은 밥이 요즘은 별식이 됐지만, 1970년대까지는 가난한 이들이 굶지 않으려 발버둥친 눈물의 음식이다. 곤드레밥도 그렇게 탄생했다.
▲ 곤드레밥 정선을 가면 곤드레밥 한 그릇 먹을 일이다. 가난한 산골 사람들이 끼니를 때우기 위해서는 적은 양곡을 늘려 먹어야 했다. 시래기는 물론이고 콩나물이나 무채를 넣고 지은 밥이 요즘은 별식이 됐지만, 1970년대까지는 가난한 이들이 굶지 않으려 발버둥친 눈물의 음식이다. 곤드레밥도 그렇게 탄생했다.
ⓒ 정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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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아라리를 처음 제대로 알아보자는 결심을 하고 기회만 나면 찾던 산을 잠시 접고 1년 남짓 지나서였다. 신체검사를 받으며 겪었던 일 덕에 정선아라리에 대해 더 많이 만날 기회를 가지게 되었으니 새옹지마(塞翁之馬)란 고사 그대로다. 좋은 일이 항상 좋기만 하지 않고, 불편한 일이 결과가 나쁘게 나타나지 않았다.
 
삼십육 년간 피지 못했던 무궁화 꽃은
을유년 팔월 십오일에 만발하였네

국태민안 시화연풍은 우리 땅에 왔건만
불공대천지 원수는 공산당이로다

이 북산 붉은 꽃은 낙화만 되어라
우리 조선 무궁화 갱 소생했다

사발그릇이 깨지며는 두셋 쪽이 나는데
삼팔선이 깨지며는 한 덩어리로 뭉친다

앞 남산의 호랑나비는 왕거미 줄이 원수요
시방시체 청년들은 삼팔선이 원수라

공동묘지 쇠스랑 귀신아 무얼 먹고 사느냐
이북의 김일성이는 왜 안 잡아 가나
 
정선아라리는 고려말엔 나라의 안위를 걱정했고,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이 되자 해방을 노래했다. 그리고 남북분단과 한국전쟁을 노래로 엮어냈다. 대한민국의 남자라면 스무 살이 되면 미리 지원하거나 특별한 사유로 연기를 하지 않는 이상 군대를 가거나 그에 준하는 군역을 마쳐야 된다. 난 군대는 안 갔지만 신체검사는 자진해서 받았다.
  
10여 년 전 합천해인사를 찾았을 때 평소 형님처럼 친하게 지내는 정운현 선배께서 사명대사석장비를 보자고 했다. 여럿이 설명을 듣던 중 석장비 주변 소나무의 상처를 보고 “여기도 일본인들이 송진을 채취하게 한 흔적이 있군요”라 하자 선배는 “정형 이게 송탄유를 채취한 흔적인 거요”라 하셨다. 일제강점기 막바지에 전국적으로 소나무에서 송진을 채취한 흔적이 남아있다. 사진은 설악산국립공원 구역인 오색리다.
▲ 수탈의 흔적 10여 년 전 합천해인사를 찾았을 때 평소 형님처럼 친하게 지내는 정운현 선배께서 사명대사석장비를 보자고 했다. 여럿이 설명을 듣던 중 석장비 주변 소나무의 상처를 보고 “여기도 일본인들이 송진을 채취하게 한 흔적이 있군요”라 하자 선배는 “정형 이게 송탄유를 채취한 흔적인 거요”라 하셨다. 일제강점기 막바지에 전국적으로 소나무에서 송진을 채취한 흔적이 남아있다. 사진은 설악산국립공원 구역인 오색리다.
ⓒ 정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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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구 신당동에 있을 때 문득 "왜 신체검사를 받으라는 연락이 없지" 하는 생각에 근처에 있던 파출소를 찾았다. 전화기를 들고 몇 곳 알아보더니 경찰관이 "아직 뭐 이렇다 할 내용은 없는데… 어쨌든 이제 군대 갈 나이는 맞아요?" 하고 되물었다. 경찰관은 이미 군역을 마친 줄 알았다고 했다.

다시 전화를 건 경찰관이 "거기 양양파출소죠? 여기 서울 신당동인데 우리 관할에 사는 청년이 신체검사통지가 없다며 묻는데 확인할 수 있어요"라고 말해 고향으로 전화를 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럼 양양군에서는 이미 신체검사를 올핸 더 이상 하지 않는단 얘기죠. 좀 더 알아보시고 전화주세요"라 하곤 전화를 끊었다.

조금 더 기다려보라는 말을 듣고 긴 나무의자에 앉아 있으려니 경찰관이 다시 "올해 나이가 어떻게 돼요"하고 물었다. 표정으로 미뤄 영 못 믿겠는 모양이다. "우리 나이로 올해 스무 살입니다. 그런데 나이가 한 살 줄었어요"라 하자, "에이 그럼 올해가 아니고 내년에 신검을 받네 걱정 말고 그냥 돌아가"란다. 당장 말투가 바뀌니 우스웠다. "그런데 생일이 빨라서 동갑내기들이랑 같이 학교를 다녔거든요. 양양에서 다시 연락 준다고 했나요"라 물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손에 든 경찰관이 "아… 네 아직 여기 있습니다. 네…"라며 상대방의 말에 내가 아직 파출소에 있다는 걸 말하곤 대답만 짧게 하며 듣고 있었다. 한참 뒤 전화를 끊은 경찰관이 "아직 고발조치는 안 했다는데 면사무소와 파출소에서 자네를 찾느라 난리였다나 봐. 내일이라도 오라고 하더군"하고 알려줬다.

다음날 마장동으로 가서 버스를 탔다. 오색에 내리는 걸 잠이 든 바람에 지나쳐 양양터미널에 도착해 다시 오색으로 가려고 시내버스를 기다리는데 고향 어르신을 만났다. 인사를 드리자 "아버지가 요즘 오색에 잘 안 오는데, 서면에서 일 마치고 그냥 주무시는 거 같더라고" 하고 일러주셨다.

서면에 내려 면사무소로 향하는데 "자네 규화 둘째 맞지" 하고 누군가 뒤에서 말했다. 돌아서니 "자넨 날 잘 모르겠군. 아버지 친구여. 똑 닮았네. 똑 닮았어"라 한다.
   
아버지께선 생전에 가장 좋아하시는 음식으로 누리대와 씀바귀를 꼽으셨다. 산에서 누리대를 만나기 어려운 까닭에 종자를 채취해 뿌리기 시작했다.
▲ 누리대 아버지께선 생전에 가장 좋아하시는 음식으로 누리대와 씀바귀를 꼽으셨다. 산에서 누리대를 만나기 어려운 까닭에 종자를 채취해 뿌리기 시작했다.
ⓒ 정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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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사무소 병사계장이 "월요일에 함께 정선으로 가야되니 잊지 말고 월요일 아침 10시까지 면사무소로 오라"는 신신당부를 들었다. 결국 이틀을 더 오색에 있어야 햇다. 하지만 친구들은 대학교를 다녀 따분하기 짝이 없었다. 토요일은 그럭저럭 동네를 돌며 놀았지만 일요일엔 작정하고 대청봉을 올랐다.

"목요일이었나? 23일 아침에 일찍 왔으면 아주 멋진 걸 봤는데 아쉽게 됐네. 오랜만에 왔으니 좀 있다 점심이나 먹고 내려가."

등산객들이 머물다 떠난 대피소를 치우던 관리인이 말했다. 대피소 근처를 살펴 누리대와 저느기, 곤드레, 곰취를 뜯어 배낭에 넣고 관리인과 점심을 먹은 뒤 오색으로 내려왔다.
 
한 치 뒷산에 곤드레 딱주기 이 내 맛만 같으면
올 같은 흉년에도 농사를 않치
 
정선아라리에도 곤드레나물이 등장한다. 그런데 딱주기란 나물은 모르겠다. 왜 아직도 이 나물을 정선에 사는 이들에게 확인할 생각을 못했을까.

오색에서 버스를 타고 서면으로 말하는 상평리로 갔다. 자식의 연락처를 잃어버려 신체검사통지서를 전해주지 못하고 엄한 자식에게 역정만 내던 아버지는, 자식이 좋아하는 누리대를 배낭에서 꺼내놓자 언제 그랬냐는 듯 고추장과 소주부터 꺼냈다. "그래도 용하다. 어떻게 누리대를 다 알아가지고…" 아버지의 칭찬은 딱 이 정도까지였다.
 
아우라지 강물이 소주 약주 같다면
오고 가는 친구가 모두 내 친굴세

신발 벗고 못 가실 데는 참밤나무 밑이요
금전 없이 못갈 때는 술집 문전이라

황새여울 된꼬까리 떼 무사히 지냈으니
만지산(滿池山) 전산옥(全山玉)이야 술판 차려놓아라
 
아버지는 좋은 안주거리만 있으면 친구를 부르셨다. 이날도 면사무소 건너편 상점 앞 평상에 친구와 아는 이들을 불러 앉혔다. 총무계장으로 계신 아저시도 오시고, 파출소장도 나왔다. 퇴근한 출장소장으로 일하는 아재도 도착해 돼지고기를 굽고 술잔을 돌렸다. 아우라지 강물이 소주 약주가 아니라 아버지는 남대천이 소주 약주였길 바라셨겠다.
 
중천에 걸린 달은 강심에 잠겨있고
너울대는 은파도는 나의 회포 돋낼제
난데없는 일성어적 나의 애를 끊나니

청려에 의하여 지향없이 가노라니
풍광은 예와 달라 만물이 숙연한데
해 저무는 저녁노을 무심히 바라보네
 
이 두 소절은 정선에서 나중에 들었다. 그런데 아버지도 이 두 소절의 노래를 부르셨기에 정선아라리인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하지만 형이 이곳 양양이 아닌 강릉에서 태어났으니 아버지는 젊은 시절 강릉이나 근방 어딘가에서 이 노래를 듣고 배웠으리라.
  
300mm 렌즈가 없다면 애초 촬영할 엄두도 못 낼 뼝대 곳곳이 사람의 손길 하나 미치지 않은 상태로 핀 동강할미꽃.
▲ 동강할미꽃 300mm 렌즈가 없다면 애초 촬영할 엄두도 못 낼 뼝대 곳곳이 사람의 손길 하나 미치지 않은 상태로 핀 동강할미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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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여덟 되던 해에 아버지 어머니와 헤어졌다. 소학교도 못 나온 아버지는 군대를 가기 전 전쟁을 겪으며 총을 먼저 들었다고 했다. 홀로 산 세월이 아버지를 더 빨리 늙게 했던지 다른 이들보다 연배가 위로 보였다.

가난한 산골살림이었지만 어머니 계시던 여섯 살 이전엔 두 분이 크게 다투는 날 빼면 그런대로 화목했다. 산골 남정네들 모이면 하는 일이 술 먹는 것과 투전인데 아버지도 거기 빠지지 않으셨던 건 분명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좀 늦은 시간에 상점 맞은편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아버지 친구분 집에서 잠을 청했다.

곰곰 생각하니 정선아라리는 어느 날 시 한 수 지어 읊조리듯 뚝 떨어져 나오지 않았다. 누군가 부르는 노래 한 소절 귀동냥으로 얻어지고, 다시 또 그의 삶이 궁굴려져 살이 붙고 또 다른 이에게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같은 듯 다른 맛을 내고, 다른 듯 같은 맛을 내는 정선아라리가 나왔으리라.

정선아라리에서 해방과 함께 불렸을 노래와 술 좋아하는 사내들이 불렀음직한 노래 함께 시름에 잠겨 청춘의 덧없음을 그렸음직한 노랫말을 만났다. 다음 편엔 보다 더 진솔하게 살아간 흔적들이 그려진 노래와 함께 이야기를 풀어보겠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정덕수의 블로그 ‘한사의 문화마을’에도 실립니다.


태그:#정선아라리, #정선군, #동강할미꽃, #낙동리, #지장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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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보고, 많이 듣고, 더 많이 느끼고, 그보다 더 많이 생각한 다음 이제 행동하라. 시인은 진실을 말하고 실천할 때 명예로운 것이다. 진실이 아닌 꾸며진 말과 진실로 향한 행동이 아니라면 시인이란 이름은 부끄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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