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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곳으로의 여행은 삶을 기름지게 하고 영혼에 여유라는 사치를 부여합니다. 또 그것이 많은 비용과 시간을 들이지 않고도 접할 수 있다면 더욱 좋은 기회일 것 같습니다. 목포가 얼마 전 큰 화제에 오른 적 있습니다. 손혜원 의원의 근대유산에 대한 애정이 정치적으로 해석되면서 뜨거운 논쟁을 불렀습니다.

또 그 여파로 목포 청운장 거리는 방문객들의 발길이 이어지면서 관광안내소가 세워지는 등 관광명소로 급부상하기도 했습니다. 일제 강점기 건물인 창성장을 중심으로 같은 시대의 건물이 세월이 흐르면서 시간의 가치를 인정받아 근대 유산으로서 주목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대구 경상감영길에 있는 한 오래된 건물
 대구 경상감영길에 있는 한 오래된 건물
ⓒ 시사포토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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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에는 창성장 거리가 대구에는 동성로 거리가

목포의 창성장 거리에는 일제 강점기에 곡창인 호남에서 행해진 수탈의 아픈 역사가 아로 새겨져 있다면 대구의 동성로 거리에는 노동력 수탈의 슬픈 역사가 아로 새겨져 있는 듯 했습니다.

대구는 일제 강점기 대규모 노동력이 필요한 섬유산업의 중심지로 번성하면서 그 흔적이 아직도 이곳저곳에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9일 경북 영천에 소재하고 있는 와이너리 방문을 위해 대구로 내려온 후 이날 대구 중구 일원을 둘러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동대구역에 도착한 후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대구시청 인근의 복 전문점이었습니다.
 
대구시청 인근에 있는 송림복집
 대구시청 인근에 있는 송림복집
ⓒ 시사포토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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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 전문점은 비싸다는 인식을 이곳에서 만큼은 내려놓아야만 했습니다.

복 매운탕 (1인분 밥 별도) 7,000원/ 복어지리 (1인분 밥 별도) 7,000원/ 밀복어탕 (1인분 밥  별도) 9,000원.
  
송림식당은 복으로도 유명하지만 가오리회나 아나고회도 그 맛을 자랑한다고 했습니다.
 송림식당은 복으로도 유명하지만 가오리회나 아나고회도 그 맛을 자랑한다고 했습니다.
ⓒ 시사포토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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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식당은 1971년 문을 열었다고 했습니다. 세 명이 자리에 앉자 종업원이 다가와 익숙한 듯 '복 매운탕 세 개요?'라고 먼저 물었습니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잠시 후 양은그릇에 담긴 복어 매운탕을 들고오더니 테이블 위에 놓인 가스레인지에 올려놓습니다. 실내를 둘러보니 나이 지긋한 손님들의 거의 대부분입니다. 그들 또한 저희와 마찬가지로 복어 매운탕의 맛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복어 매운탕이 양은그릇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습니다.
 복어 매운탕이 양은그릇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습니다.
ⓒ 시사포토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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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소끔 끓여낸 후 콩나물을 건져낸 후 양념장에 버무려 내놓습니다.
 한소끔 끓여낸 후 콩나물을 건져낸 후 양념장에 버무려 내놓습니다.
ⓒ 시사포토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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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나물을 푸짐하게 넣은 복 매운탕이 한소끔 끓고나자 종업원이 오더니 콩나물을 꺼낸 후 준비되어 있던 양념에 버물렸습니다. 고춧가루에 참기름 그리고 몇 가지 이곳만의 양념이 들어간 것 같습니다.

콩나물의 경우 오래 끓이면 식감이 질겨지고 질척해지면서 특유의 아삭한 맛이 사라지는데 이렇게 하니 콩나물 무침은 그 특유의 맛이 고스란히 살아 있었습니다. 여기에 콩나물을 한소끔 끓여내면서 이노신산이 배어나와 복어 매운탕의 시원한 맛을 한껏 살리고 있었습니다.

보글보글 끓고 있는 양은그릇에서 접시에 덜어낸 후 한 술 떠서 입 안에 넘기니 그 맛은 기대감을 저버리지 않습니다. 최고급 복 전문점에서 내놓는 복 매운탕의 맛을 뛰어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즉석에서 만들어준 콩나물 무침을 겉들이니 맛의 조화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맛본 복어 식당 가운데 맛있는 집을 꼽는다면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할 만큼 뛰어난 맛을 자랑합니다. 가격대비 맛을 비교하면 그야말로 가성비가 으뜸입니다.

오랜만에 맛있는 점심을 마치고 나서는데 안내를 맡은 A 전 교수는 '학생 때부터 드나들었는데 이제 주인과 같이 늙어 간다'는 독백을 가슴속에서 토해냅니다.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이곳을 드나들었다는 노 교수의 머리숱은 세월의 흐름 속에 한껏 옅어졌지만 그 맛은 여전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이 노포의 값어치가 아닌가 합니다.
 
한 오래된 건물의 처마가 낡을대로 낡아 있었습니다.
 한 오래된 건물의 처마가 낡을대로 낡아 있었습니다.
ⓒ 사시포토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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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최고 부자들이 살았다는 '진골목'

제대로 된 복 매운탕을 즐기면서 기분 좋은 포만감에 일행의 발걸음에는 한껏 여유로움이 묻어납니다. 대구시청 사거리를 지나 중앙로역으로 가는 경상감영길 여기저기에는 100년 숨결이 느껴지는 건물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목포에 창성장 거리가 있다고 한다면 대구에는 동성로 거리가 있는 듯 했습니다. 일행의 시선에 가장 먼저 들어 온 것은 대한성공회 대구교회 성프란시스 성당입니다. 크기는 작았지만 1917년에 설립된 후 1929년에 이 교회가 세워졌다고 하니 90년 동안 굴곡 많았던 대구의 근현대사를 말없이 지켜본 셈입니다.
 
성프란시스 성당 입니다.
 성프란시스 성당 입니다.
ⓒ 시사포토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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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전 교수는 1960년 4.19의거 당시 시위대가 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고 회상했습니다. 또 그 장면이 여전히 생생하다고 했습니다. 성프란시스 성당 또한 시위대가 뿜어내던 거친 정의의 숨결을 느꼈을 것 같습니다.

경상감영길 이곳저곳에는 일제강점기 건물로 추정되는 낡은 건물들이 여전히 사람들을 맞고 있었습니다. 현대의 빠른 속도와는 어울리지 않는 느릿느릿한 시간이 흘러가는 듯합니다.
  
그레이스 실버영화관 입니다
 그레이스 실버영화관 입니다
ⓒ 시사포토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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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띄는 영화관도 있었습니다. 2014년 문을 열었다는 대구 최초의 실버영화관 '그레이스 실버영화관'입니다. 그 입구에는 영화배우 존 웨인과 그레이스 켈리의 사진이 실물 크기로 세워져 있습니다.

상영한다는 영화는 존 웨인 주연의 '리오그란데', 정윤희 주연의 '아가씨 참으세요', 말론 브란도 주연의 '데지레', 찰턴 헤스턴 주연의 '고뇌와 열정' 등 입니다.
  
 상영하고 있는 영화들이 이채로웠습니다. 특히 80년대 전설의 배우인 정윤희 주연의 영화라고 하는데서 영화관의 성격을 잘 대변하고 있는 듯 했습니다.
  상영하고 있는 영화들이 이채로웠습니다. 특히 80년대 전설의 배우인 정윤희 주연의 영화라고 하는데서 영화관의 성격을 잘 대변하고 있는 듯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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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입장료입니다. 55세 이상은 2,000원 성인은 7,000원 중고등학생은 5,000원입니다. 그레이스 실버영화관은 건물 1, 2층에 모두 138석의 객석을 보유하고, 노년 세대를 대상으로 추억의 영화를 상영하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기자 또한 55세를 넘어섰으니 이 영화관의 기준에 따르면 노년세대 입니다. 입장료가 2,000원이라는 셈법 보다는 한 순간 나이의 무게감이 마음을 짓누릅니다.

발걸음이 이어진 곳은 진골목이었습니다. 대구시가 세워놓은 안내판에는 진골목의 역사가 자세하게 소개되고 있었습니다. 골목의 길이는 100여 미터 남짓입니다. 하지만 그리 길지 않은 이 골목에 대구의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살았다는 생각을 하다 보니 그들의 숨결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듯합니다.
  
정소아과의원의 담장에 세워져 있는 쇠창살이 이채롭습니다
 정소아과의원의 담장에 세워져 있는 쇠창살이 이채롭습니다
ⓒ 시사포토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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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건물도 남아있었습니다. '정소아과의원'이라는 간판이 붙은 2층짜리 집입니다. 이곳은 원래 서병기의 저택이었다고 합니다. 후에 병원이 됐고 지금은 '현존하는 대구 최고의 양옥 건물'로 진골목의 상징이라고 했습니다.

쌍화차에 계란 노른자위를 띄워 놓는 추억의 맛을 즐긴다는 미도다방도 있었습니다. 그런 맛 때문에 이곳은 1982년 문을 연 이후 정치인, 유림, 문인들의 명소로 자리 잡고 있다고 합니다.
  
미도다방 입니다.
 미도다방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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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목월 선생이 누워 시상 떠올렸을 다다미 8조짜리 방에는...

발걸음이 마지막으로 이어진 곳은 박목월 선생의 숨결이 남아 있는 옛 계성중학교 사택으로 사용됐다는 오래된 주택이었습니다. 주택의 소유자는 이날 우리 일행을 초대했던 A 전 교수. 또 그분의 생가이기도 합니다.

A 전 교수의 소개로 집 이곳저곳을 살펴보니 일제 강점기 가옥의 특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가장 큰 방은 다다미 8조짜리 그 다음으로는 다다미 6조짜리라고 했습니다.
  
주택 전경입니다.
 주택 전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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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가옥은 온돌식이 아닌 습기가 많은 일본의 환경을 고려한 다다미를 깐 방이라고 했는데 바로 이곳이 그 정형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다다미 2조가 1평 남짓 된다고 하니 4평 정도 되는 셈입니다.

그리 크지 않은 가옥에는 이곳저곳에 작은 방들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별채도 있었습니다. A 전 교수는 70년대 이 사택에는 친척들이 시골에서 와서 공부하느라고 항상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고 과거를 회상했습니다.

또 이 곳은 박목월 선생의 숨결이 남아 있다고 했습니다. 박목월 선생이 교직에 들어 선 후 처음으로 부임한 곳이 계성중학교였던 관계로 이 주택에서 1946년부터 1948년까지 2년여 동안 거주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주택 내부 모습입니다
 주택 내부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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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경 박목월 선생이 다른 곳으로 떠난 후 사택으로 사용되던 이곳을 A 전 교수의 선친이 구입했다는 설명도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근대화가 제일 먼저 시작된 곳이 대구이며 그 시대 이 주택이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설명도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 주택은 100년의 세월을 이 자리에서 지키고 있는 것 입니다.

인근에는 일제 강점기에 국보급 우리 문화재를 일본으로 반출하면서 악명을 떨쳤던 오쿠라의 저택이 있었다고 합니다.
  
별채는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었습니다.
 별채는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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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에서 전기를 끌어 들이면서 사용하던 '애자' 입니다
 외부에서 전기를 끌어 들이면서 사용하던 "애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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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저택을 개보수 공사를 하다가 오쿠라가 땅에 묻어 놓고 간 것으로 추정되는 많은 보물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그 때문인지 이 동네는 새로 주택을 허물고 건축할 때에는 문화재 보호차원에서 사전 신고 절차를 밟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좌와 우의 갈등이 극심했던 시기 또 그 갈등이 1946년 10월 대구 폭동으로 표출되던 당시 청록파의 시인 박목월은 그 시절을 어떻게 바라보고 계셨을까요?

현대시의 한 획을 긋고 있는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세 시인을 지칭하는 '청록파'는 문학사에 자연을 제재로 하고 자연의 본성을 통하여 인간적 염원과 가치를 성취시키는 것이라고 자리매김 되고 있습니다.
  
마루는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하니 박목월 선생도 이 마루를 이런 식으로 내려다 보지 않았을까요?
 마루는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하니 박목월 선생도 이 마루를 이런 식으로 내려다 보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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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박목월 선생이 해방공간에서 잠을 이뤘을 다다미 8조짜리 방에 서 있다 보니 70년 전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간 듯합니다. 이 방에는 세월의 흐름이 멎어 있었습니다.

지난 3월 9일은 동성로 '복 매운탕'에 풍덩 빠지고 '박목월'의 숨결을 느끼면서 기억에 깊게 새겨진 하루였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립니다.


태그:#진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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