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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 것들은 이토록 쌓여가고>, 이런 제목을 단 책을 그냥 지나칠 수 있나.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무조건 읽는다. '당신 마음이 곧 내 마음입니다' 하고 손이라도 덥석 잡고 싶은 것이다.

이 책은 난다 출판사의 '읽어본다' 시리즈 중 여섯 번째 책이다. '매일 한 권의 책을 '만지는' 사람들이 매일 한 권의 책을 '기록하는' 이야기'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2018년 1월 1일부터 6월 30일까지, 시인이자 민음사의 편집자 서효인과 평론가이자 역시 민음사 편집자인 박혜진이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기록한 독서 일기를 묶은 책이다.
 
<읽을 것들은 이토록 쌓여가고>, 서효인+박혜진 지음, 난다(2018)
 <읽을 것들은 이토록 쌓여가고>, 서효인+박혜진 지음, 난다(2018)
ⓒ 박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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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런 독서일기 읽는 것을 무척 좋아하는데, 시작은 장정일의 <독서일기>였다. 그때 나는 '일기를 이런 식으로도 쓸 수 있구나!' 감탄하며 책장을 넘겼고, 책을 분석하는 날카로운 시선, 거침없는 동시에 지적인 그의 문장에 반했다.

쌓여 있는 책들에 파묻혀 등을 구부리고 책상에 앉아 글쓰기에 몰두하는 사진 속의 그는, 나의 우상, 아이돌이었다. <장정일의 독서일기1>에 그가 쓴 머리말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어린시절의 내 꿈은 이런 것이었다. 동사무소의 하급 공무원이나 하면서 아침 아홉시에 출근하고 오후 다섯시에 퇴근하여 집에 돌아와 발 씻고 침대에 드러누워 새벽 두시까지 책을 읽는 것. 누가 이것을 소박한 꿈이라고 조롱할 수 있으랴. 결혼을 물론 아이를 낳아 기를 생각도 없이, 다만 딱딱한 침대 옆자리에 책을 쌓아놓고 원없이 읽는다는 건 원대한 꿈이다. (<장정일의 독서일기1>, 장정일, 범우사(1994))

장정일을 거쳐, 김현, 요네하라 마리, 알베르토 망구엘, 그밖에 수많은 작가들의 독서일기를 즐겁게 탐독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나는 독서 일기 형식의 글이라면 무조건 읽는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 책을 읽는지 궁금한 마음도 있지만, 무엇보다 나는 결코 아름답다고 할 수만은 없는 그 지난한 하루하루를, 책을 읽으며 살아내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읽고 싶은 것이다. 그런 이유로 오늘도 나는 남이 쓴 독서일기를 읽으며 울고, 웃고, 배우며, 위로받는다.

<읽을 것들은 이토록 쌓여가고>는 출판사 편집자들의 독서일기다. 그렇다 보니 일기 속에는 자연스럽게 책을 만드는 일의 고단함과 기쁨도 함께 녹아 있다. 최근 방영된 드라마 <로맨스는 별책부록>을 재미있게 봤다면 이 책도 분명 흥미롭게 읽힐 것이다. 가령 이런 글들.
 
한때 둘도 없이 친한 사이였다 해도 각자의 삶을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소원해지기 마련이다. 책도 마찬가지다. 어떤 편집자도 '구간'이 되어가는 책과 영원히 가까울 수 없다. 밤낮없이 열과 성을 쏟아부으며 급기야는 세상에서 나보다 더 이 책을 사랑할 순 없다고 확신하는 날들이 있었다 해도, 시간이 지나면 그 책 역시 다른 책들 중 한 권이 되고 마는 건 거스를 수 없는 시간의 법칙이다. 연락해야 된다는 생각이 좀처럼 행동으로 연결되지 않듯이 그 책을 위해 뭔가 해야 한다는 생각이 좀체 행동으로 연결되지 않는 데서 오는 모종의 죄책감과 미안함은 편집자의 숙명인 지도 모르겠다. (185쪽)

이 책에서 두 작가는, 책 만드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다 보니 보통의 독자들처럼 편하게 독서를 즐기지 못하고 자꾸 일과 연결하는 버릇이 있다며 아쉬운 마음을 토로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 역시 그 누구보다도 책으로 위로받는 존재다.
 
일이 너무 많았다. 어떤 것은 그럭저럭 괜찮았고 어떤 것은 잘 풀리지 않았다. 몸은 녹초가 되어가는데, 업무와 관련된 꽤 날카로운 메일을 받았다. 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인데, 자리가 없는 경의선 전철에서 나는 의외로 쉽게 무너졌던 것 같다. 어두운 차창에 비치는 내 얼굴이 유난히 바스락거려서 문지르면 모든 표정이 사라져 없어질 것 같았다. 이렇게 오늘 하루가 어쩌면 내일까지도, 끝을 알 수 없는 어떤 시간까지 다 폐기될 것만 같았다. 애써 가슴팍 쪽으로 맨 백팩에는 김금희 장편 소설 『경애의 마음』이 있었다. (중략)

경애를 따라 내가 잊지 못하는 것과 결국 떼어내야 하는 것들을 헤아려본다.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고 조금 긴 호흡을 내쉰다. 오랜만에 소설로 위로를 받는다. 좀 살 것 같은 마음이 되었다. (362쪽)

이처럼 이 책에는 편집자이면서 동시에 열렬한 독자이기도 한, 두 사람의 눈물 자국이, 한숨이, 책을 만드는 사람의 손때가 곳곳에 묻어있다. 그 마음들이 안쓰럽고 또 예뻐서 그들이 남긴 자국을 손가락으로 매만지며 오늘도 책장을 넘긴다.

이 책이 우리 집 책장에 꽂힐 일은 없을 것 같다. 손 닿는 곳에 두고 뒹굴뒹굴하며 '휘리릭' 책장을 넘기다가 마음에 드는 곳에서 멈춰 언제든 다시 읽고 싶은, 오래오래 갖고 놀고 싶은 책이다.

그들이 수고스럽게 마음을 다해 쓴 이 책 덕분에 나의 하루도 풍요로웠다. 덤으로 읽을 책의 목록도 풍요로워졌다. 하아, 이것들을 또 언제 다 읽는담. '읽을 것들은 이토록 쌓여가고'.

읽을 것들은 이토록 쌓여가고

서효인.박혜진 지음, 난다(2018)


태그:#읽을것들은이토록쌓여가고, #서효인, #박혜진, #난다, #읽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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