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10 10:27최종 업데이트 19.05.12 11:31
"하늘 천 따지 검을 현 누를 황."
"야, 이 지지배야 시끄러워!"
"집우 집주 넓을 홍 거칠 황."
"시끄러우니까 그만하라고."

고모부가 성질을 냈다. 하지만 할아버지한테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한 6세 윤정희는 제 흥에 겨워 고모부가 하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흥에 겨워 장단에 맞춰 외우기 시작한 천자문 낭독은 계속되었다.


"날 일 달 월 찰 영 기울 측."

"뻑!" 하는 소리와 함께 천장에서 별이 반짝였다. 순간 어린 소녀 윤정희는 의식을 잃었다. 화가 난 고모부의 발길질에 소녀가 방바닥을 몇 바퀴 구르면서 벽에 머리를 세게 부딪친 것이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일이 발생했다. 뇌진탕이었다. 어린 소녀가 뇌진탕으로 의식을 잃었다가 되찾은 것은 거의 3년이 지나서였다. 다른 이도 아닌 가족인 고모부가 왜 6세 소녀를 발로 차 뇌진탕에 걸리게 했을까?

말을 타고 땅을 관리하던 부잣집 둘째 아들

파평윤씨 문정공파 윤상효는 충남 논산군 광석면의 거부(巨富)였다. 광석면에서 그의 땅을 밟지 않고는 지나갈 수 없을 정도였다. 그가 자신의 땅을 둘러보기 위해서는 말을 타고 다녔다.

집에는 말이 한두 마리도 아닌 다섯 마리나 되었다. 박경리 소설 <토지(土地)>에서 주인공 최서희가 가마를 타고 자신의 땅을 둘러보는 장면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윤상효의 땅이 정확히 어느 정도였는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말 다섯 마리가 있었다는 증언만으로도 그 규모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그의 집터가 1500평이나 되었으며, 소작료를 받는 가을이면 광(창고)에 집의 머슴이나 마름들이 '풀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 번질나게 드나들었다고 한다.

이렇게 남부럽지 않은 재산을 소유하고 있던 윤상효에게 걱정거리가 생겼다. 둘째 아들 윤여병(1919년생)이 남로당 가입서에 도장을 찍은 것이었다. 초등학교 졸업 후 22세부터 충남 논산군 광석면사무소에 취직한 윤여병은 성실한 공무원으로 소문이 났었다. 그런 그에게도 해방정국의 회오리는 비껴가지 않았다. 같은 마을 청년들이 그에게 남로당 가입을 강권한 것이다. 그의 딸 윤정희의 증언에 의하면, 아버지 윤여병에게 마을 좌익청년들이 양쪽 옆구리에 칼을 들이대며 남로당에 가입할 것을 협박했다고 한다.

과연 당시에 정말 그렇게 했을까 의구심이 들지만, 이 일로 인해 윤상효는 둘째 아들에게 노발대발했다. "야, 이놈아. 도장 찍으면 죽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왜 도장 찍었어? 칼에 찔리고 총에 맞는 상황이 오면 그냥 죽어야지, 도장을 찍어?" 윤상효가 콧바람을 쉭쉭대면서 언성을 높였지만 이미 벌어진 상황이다.

윤여병이 동료들의 권유를 협박으로 여기고, 특히나 동료들이 칼로 위협했을 리는 없었을 것이다. 노발대발하는 아버지에게 변명을 하기 위해 말을 둘러댔을 것이다.
 

판결문 윤여병의 판결문 ⓒ 박만순

  
판결문에 따르면 윤여병은 남로당 자금 일부를 다른 이에게 전달한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1949년 10월 31일에 대전지방법원에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실형을 선고 받았다. 이에 따라 그는 면사무소에서 면직(免職)되었다. 그런데 이런 선고가 윤여병과 그의 동료에게는 의외의 결과였다.

왜냐하면 같은 마을 사람 4명이 대전지방법원에서 동일한 혐의로 재판을 받았는데, 다른 이는 모두 집행유예로 석방되었고 윤여병만 실형을 받았기 때문이다. 또한 윤여병이 경찰의 출두명령을 수차례 거부한 점을 보면 스스로가 큰 범죄를 저질렀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임은 분명하다. 그는 경찰의 출두명령서를 받은 날도 유유히 자전거를 타고 면사무소로 출근했다. 당시 면사무소 직원 중에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이는 그가 유일했다.

그렇게 일상생활을 하던 중에 마침내 논산경찰서에서 그를 연행해 재판에 회부했다. 같은 마을 사람 4명은 이미 연행된 뒤였다. 재판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경찰·검찰과 피의자 가족 간에 은밀한 거래가 진행되었다.

즉, 뇌물을 쓰면 집행유예로 석방시켜 준다는 것인데 구체적인 금액도 이야기되었다. 1인당 30만 원이었다. 그 결과 돈을 쓴 다른 4명은 모두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그런데 광석면 소문난 갑부의 둘째 아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 이유는 윤상효가 '너 이놈 고생해봐라'며 뇌물 쓰기를 단호히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자식 죽었다는 소리에 뇌졸중 걸려

윤여병 아내 송숙원은 백일 된 막내를 업고 대전형무소로 면회를 갔다. 육중한 철문이 마음을 옥죄었지만, 남편을 본다는 기쁨이 더욱 컸다. "여보 잘 지내셨어요?"라고 인사하며 애틋한 심정으로 남편과 조우했다. 쇠창살 사이로 손을 뻗어 남편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남편은 그리운 아내보다 백일 된 막내가 더욱 안쓰러웠다.

"어쩔려구 이렇게 갓난아기를 데려 왔소? 감기라도 걸리면 어떻게 할라구"하며 역정을 냈다. 이윽고 그는 아내에게 "얼릉 집에 가" 하며 휙 돌아섰다. 그리운 아내를 보았건만 사랑 표현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70년 전 한국 남성의 모습이었다. 송숙원은 서럽고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아쉬웠던 면회가 이승에서 마지막 대면(對面)일 줄이야 당시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뭐라고?" "다시 말해 보게. 지금 자네 뭐라 했는가?" 하지만 소문을 갖고 온 집안 사람은 쭈뼛거리며 뒷말을 잇지 못했다. "말해 보라니깐!" 하며 언성을 높이자, 그 사람은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난리가 나 정부가 후퇴하면서 우리나라 군인이랑 경찰이 형무소에 있던 이들을 전부 쏴서 죽였다고 하더구만요. 대부님도 아마 돌아가셨을 겁니다." 집안 항렬이 높았던 윤여병을 그 사람은 할아버지(大父)라고 불렀던 것이다.

"억" 하는 소리와 함께 노인이 쓰러졌다. 윤상효가 정신 줄을 논 것이다. 당신 아들이 죽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북한군도 아닌 대한민국 군인·경찰한테 총살 당하다니... 사실 아들이 죄가 있다면 정부에서 불법화한 남로당에 도장 찍어준 것 밖에 없는데, 그에 대한 죗값은 법원에서 3년형을 선고받고, 까막소(감옥소의 방언)에서 달게 받고 있던 것이 아닌가. 결국 자기가 재판에서 뇌물을 쓰지 않아 아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자괴감에 빠졌다. 그러다 보니 식음을 전폐하고, 우울한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며느리를 볼 면목이 없었다.

"아가, 친정으로 가거라. 그리고 좋은 사람 만나 개가(改嫁) 해라." "싫어요, 아버님." 하지만 시아버지 윤상효는 단호했다. 도저히 한 울타리 안에서 며느리와 같이 살 자신이 없었다. 아들을 죽인 사람이 자신이라는 죄의식 때문에, 며느리와 손주들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한번 뜻을 세운 파평 윤씨 고집은 꺾이지 않았다. 결국 송숙원은 큰아들과 막내를 데리고 잠시 친정집에 가 있기로 했다. 기간을 약정할 수 없는 헤어짐은 눈물바다였다. 특히 엄마와 헤어지게 된 윤정희(1946년생)는 악을 쓰며 울었다. 눈물 콧물에 얼굴은 엉망이었다. "아가, 울지 마"라며 달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어린 소녀는 마을이 떠나가라 울어댔다. 이러한 눈물바다 속에서도 이별의식은 진행되었다.

집안 머슴들이 구루마(리어카)에 쌀과 양식들을 산처럼 쌓았다. 윤상효가 며느리를 친정으로 보내면서, 가슴 시린 마음을 구루마에 쏟아 부은 것이다. 전 재산을 주어도 아까울 것이 없었다. 하지만 땅은 쉽게 팔리지 않는 것이라 식량과 물품으로 아쉬운 마음을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상당한 현금도 며느리의 손에 쥐어 주었다. 며느리는 눈물을 머금고 친정인 충남 청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아들도, 며느리도 없는 광석면 율리는 마치 초상집 같았다. 밤이면 귀신이 나타나는 것 같아 윤상효는 한시도 율리에 있기가 싫었다. 그는 딸에게 가기로 결심하고 일부 토지를 팔았다. 며느리를 친정으로 보낼 때처럼 구루마에 식량을 잔뜩 실었다. 또한 그의 전대에는 토지를 판매한 돈이 두둑했다. 이사 가는 날 마을 사람들은 나와 보지도 않았다. '빨갱이 집' 이사 하는데 나와볼 용기를 가진 사람은 없었다. 세상 인심이 너무나 야박하다는 생각에 눈물이 핑 돌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직도 전쟁 중인 1951년도에 세상 인심만을 타박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충남 부여군 부여면 능산리에 살았던 사위는 장인 장모의 행렬에 처음에는 살갑게 대했다. 하지만 사위의 살가움은 오래 가지 않았다. 특히 장인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에는 더욱 그랬다.

칼, 작두를 방 안에 놓고 잠든 소녀
 

윤정희 윤여병의 딸 윤정희 ⓒ 박만순

 
뇌졸중으로 쓰러진 윤상효는 똥오줌을 가리지 못했다. 결국 똥오줌을 받아내는 것은 아내 박덕례의 몫이 되었다. 그는 뇌졸중으로 쓰러진 지 1년만인 1952년에 한 많은 세상과 작별을 했다.

윤정희 고모부는 민주당 지지자로 각종 선거에도 열심이었다. 그러다 보니 생업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고, 가산은 쉽게 없어졌다. 장인이 전대에 가득 가져온 돈은 순식간에 없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처조카 윤정희의 천자문 외는 소리가 자신의 초라한 신세를 타박하는 소리처럼 들렸던 것이다. 순간 짜증이 일면서 발길질을 한다는 것이 조카의 뇌진탕으로 이어진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장인이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그때부터 윤정희의 정신은 오락가락했다. 아니 3년간 의식이 없었다고 하는 것이 사실에 더욱 부합했다. 논산군 광석면 부자라는 명성은 할아버지가 죽은 몇 년 사이에 온데간데 없었다. 결국 고모부의 집에서도 오래 머물지 못했다. 고모부가 선거에 돈을 없애느라 집을 채권자들에게 담보로 잡혔기 때문이다. 채권자들은 돈 받을 길이 없자, 집을 헐어 목재를 가져갔다. 할 수 없이 할머니와 윤정희는 남의 집살이를 전전했다.

오빠가 술에 취해 집에 왔다. 동생 정희는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평소에는 양처럼 온순한 오빠가 술만 먹으면 광인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no touch(노 터치)" 오빠가 술만 먹으면 외치는 소리였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학살되고, 열심히 공부해 보았자 신원조회로 미래가 없는 삶이었다. 그러다 보니 방황하게 되었고 어릴 때부터 술과 유흥의 길에 빠져 들었다. 맘보 청바지에 선글라스를 끼고 서울 등지를 배회했다. 시골에서 돼지를 팔아 돈이 떨어질 때까지 놀았다. 가끔 집에 올 때마다 만취 상태였고, 화풀이로 여동생 정희를 팼다. 오빠한테 맞는 것이 너무도 무서웠던 정희는 대전에 사는 셋째 고모네로 도망갔다.

윤정희가 열 살에 대전 대흥동 고모네로 갔지만, 소녀의 미래는 그리 밝지 않았다. 고모가 조카를 학교에 보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모는 하숙을 치면서 바느질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는데, 조카 윤정희는 심부름을 했다. 중앙시장에서 바느질감을 받아 와 고모에게 전달해 주고 다시 중앙시장에 갖다 주는 일을 했다. 고모 일은 더욱 번창해 미군부대에서 물건을 가져 오는 것도 정희의 몫이었다.

바느질감을 담은 보따리는 무게가 장난이 아니었다. 열 살의 어린 나이에 무거운 보따리를 이고 미군부대와 중앙시장, 고모 집을 뻔질나게 드나들다보면 목은 자라목이 되고, 머리가 '빵꾸'나는 듯했다.

"아줌마 신청 잘못하면 큰일 나요"

산악회에서 대전 인근의 산을 올라갔다가 하산하는 길이었다. 현수막에 "6.25 때 가족 중에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은 없습니까?"라는 문구가 눈에 띄었다. 그 순간 그 글씨가 주먹만 했다. 대전 중구청으로 내달렸다. 안내하는 이에게 물으니 비치된 '진실규명신청서'를 내줬다. '아버지 윤여병이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1950년 7월 초 후퇴하는 군·경에게 불법적으로 희생되었다'는 요지의 신청서를 썼다. 신청서를 담당공무원에게 제출했다.

그런데 공무원이 뜻밖의 소리를 했다. "아줌마, 신청 잘못하면 큰일 나요" 하는 것이 아닌가. 아무래도 공무원은 해당자가 아닌 사람이 잘못 신청하면 불이익이 생길 수도 있다는 의미로 이야기한 것이었겠지만 당시에는 서운한 감정이 앞섰다. 담당 공무원의 대꾸를 무시하고 신청서를 제출했다. 2006년 11월 29일의 일이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신청서 접수를 마감하기 하루 전이었다.

그때부터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산내 골령골에서 열리는 위령제에도 꼬박 참석했다. 아버지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국가기록원도 방문하고 종친회 행사에도 참석해 아버지의 생전 모습을 수소문했다. 이러는 과정에서 오빠의 행동도 이해했다. 국가폭력에 의해 아버지를 잃고 신원조회로 미래가 없던 오빠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그리 넓지 않았다. 그래서 술로 세월을 보냈고 "노 터치"를 외쳐댄 것이리라.

윤정희(74세, 대전광역시 중구 선화동)가 진실화해위원회 문을 노크한 지 4년 만에 아버지의 명예회복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전후한 시기에 오빠와 남동생이 병환으로 사망했다. 이제 윤정희는 세상에 혼자 남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좌절하지 않고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이끌어냈고, 문중과 지역사회 봉사활동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자녀와 손주들의 사랑스런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안방과 거실에 잔뜩 걸어 놓았다. 매일 사진을 보며 마음의 기쁨과 평안을 얻는 것이다. 부모에게 충분히 받지 못한 사랑을 자식과 손주들에게 실컷 베풀고 싶어하는 그녀의 마음은 따듯하기만 하다. 
 

진혼비문 윤정희가 작성한 아버지 윤여병의 비문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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