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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광주

화려했던 그들의 10일간의 휴가
19.03.23 16:50l

검토 완료

이 글은 생나무글(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
"저럴 수가 있단 말이냐. 일제 때 무서운 순사도 많이 보고, 6·25때 공산당도 겪었지만, 저렇게 잔인하게 사람을 죽이는 놈들은 처음 본다. 학생들이 무슨 죄가 있길래 저러는가. 죄가 있다고 해도 저럴 수는 없다. 저놈들은 국군이 아니라 사람의 탈을 쓴 악귀들이야."
"월남전에서 베트콩을 죽여 봤지만, 저렇게까지 잔인하지는 않았다. 저런 식으로 죽일 바엔 차라리 총으로 쏴 죽이지. 저놈들을 죽여야 해,"
80년 5월 광주에서 군인들의 민간인 집단 학살을 목격한 자들의 이야기이다.
 
얼마 전 몇몇 국회의원들이 주최한 '518진상규명대국민공청회'라는 자리에서는 '북한군 개입', '좌파 정권이 만들어낸 5·18 유공자라는 이상한 괴물집단' 등의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우리의 평범한 이웃들이 군인들의 총칼에 난자당했다는 '죽음의 진상'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 모든 죽임을 정당화할 수 있는 마술의 언어인 '북한군' '빨갱이' 등을 어디에다 끼워 넣을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자신들의 정치적 뿌리가 학살자와 연결되어 있는 데 반해, 정치적 경쟁자들이 당시 입었던 피해가 인정되어 유공자 명단에 오르는 것을 인정할 수가 없다.
'권력만 있다면, 명백한 진실도 왜곡되거나 은폐될 수 있다'는 역사의 교훈을 그들은 철저히 믿는 것 같다. 해방 후 친일파와 이승만 정권에 의한 반민특위의 좌절이 그러했고, 분단 이후부터 5·18까지 이어졌던 민간인 학살이 그러했다.
 
쿠데타 정권을 이은 쿠데타 세력
제삿날이 박정희와 같은 차지철 경호실장은 "부마사태같은 일이 또 일어날 경우 탱크로 한 200~300만 명만 깔아죽이면 잠잠해진다."라고 말하였다 한다. 폭력으로 근근이 유지되던 정권은 결국 독재자의 암살로 막을 내렸고, 그 빈 공백을 새로운 쿠데타 세력이 밀고 들어왔다. 1961년 반란군 수장 박정희가 육사를 장악하기 위해 육사 생도들에게 혁명 지지 시가 행진을 요구했을 때, 많은 생도들이 '노'를 지시한 교장의 뜻을 따랐던 데 반해 '예스'를 외치며 쿠데타 지지 시위를 이끌었던 자, 그래서 반란군 수장의 신임을 한 몸에 받으며 정치군인으로 승승장구하던 자, 전두환이 자신의 상관을 잡아들이며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시국수습'을 위하여.
 
평화시위 그리고 비상계엄 확대
이 와중에 대학생들의 시위는 학내에서 거리로, 학생들로부터 시민과 교수들로, 시위의 공간과 주체가 넓어져갔다. 경찰은 시위대에 질서 유지를 부탁하며 평화적으로 대응하였다. 비상계엄 해제, 노동3권 보장 등 너무나 당연했지만 오랫동안 박탈당해왔던 시민의 권리를 요구하는 평화로운 시위가 이어졌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진압군들의 특수진압훈련이 진행되고 있었고, 검거자 명단이 완성되었다. 계획에 따라 서울에서부터 대학 간부들이 연행되어갔고, 김대중을 비롯한 재야 정치인과 민주인사들, 학생운동·노조·종교계 지도부들이 순식간에 잡혀 들어갔다. 5월 18일 0시, 전국적으로 계엄이 확대되었다.
 
그들의 '화려한 휴가'
'계엄 해제, 김대중 석방, 휴교령 철회, 전두환 물러가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주장에 공수부대는 대검과 살상용 곤봉, 총으로 답하였다. 작전명령 '충정작전', 암호명 '화려한 휴가'가 시작된 것이다. 전봇대에 거꾸로 매달아 때리고, 부상자를 나르는 택시기사를 때려죽이고, 임산부를 쏴죽이고, 여학생의 유방을 도려내던, 화려했던 그들의 휴가.
이에 대항해 대형트럭, 고속버스, 시외버스, 택시 200여대 등의 차량이 헤드라이트를 켜고 경적을 울리며 차량 시위를 벌였다. 전체 인구가 75만 정도 되었던 당시 광주에서 30만 이상이 거리를 메웠다. 일반 시민들뿐 아니라 지역의 기관단체장들도 살인진압 상황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시위 대표 측은 계엄군과 협상하면서, 1) 유혈 사태에 대한 당국의 공개 사과 2) 연행 시민과 학생 전원 석방 3) 입원 중인 부상자의 소재와 생사 파악 4) 계엄군의 완전 철수 등 지극히 상식적인 요구를 하였다. 도지사는 경찰 헬기 내에서 공수부대의 철수를 약속했고, 시민들은 약속이 이행되길 기다렸다.
 
애국가와 집단발포
약속한 정오가 지나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고, 오후 1시 건물 외부에 설치된 확성기를 통해 애국가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애국가와 함께 공수부대의 '철수' 대신 '발포'가 10분간 이어졌다. 이 집단발포가 있기 직전 전두환이 헬기를 타고 광주에 왔다갔고, 헬기 사격도 있었다는 증언이 새롭게 나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광주의 완전 고립과 분쇄를 위해 잠시 공수부대가 퇴각하였고, 통신·교통 등 외부와의 연결이 모두 차단되었다. 공수부대 철수 후 정부는 언론을 통해 폭도·폭동·간첩·불순분자 등의 언어로 광주를 설명하였고, 김대중을 광주폭동의 배후라고 발표했다.
 
거리의 주먹밥 공동체, 그리고 승리의 찬가
물자와 통신, 교통이 외부와 두절된 상태에서 광주의 시민들은 부족한 물자를 공평하게 나누며 함께 살아가는 거리의 공동체를 이루었다. 쌀집은 한 번에 두되 이상 팔지 않았고, 담배 가게는 1인 1갑의 원칙으로 판매하였다. 거리에선 서로에게 나눌 밥을 짓기 위해 솥단지가 걸렸고, 즉석 주먹밥이 손에 손을 거치며 전달되었다. 모든 파괴행위는 금지되었다.
고립된 광주를 향해 탱크부대가 진격을 시작했다. 이에 철야회의 중이던 수습위원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행진하였고, 시민들이 그 뒤를 이었다. 앞으로 1시간 내 군은 본래 위치로 돌아가라, 그렇지 않으면 전 시민에게 무장화를 호소하고 게릴라전을 전개한다, 최후의 순간에는 전원 자폭한다는 것이 이들이 입장이었다.
도청 내에서 학생들에게 살아남기 위해 투항해야하지 않겠느냐는 종용에 대해 누군가 이렇게 답하였다. "물론 우리는 패배할 것입니다. 죽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냥 이대로 아무 저항 없이 계엄군을 맞아들이기에는 지난 며칠 동안의 항쟁이 너무도 장렬했습니다. 누군가가 여기에 남아 도청을 사수해주어야 합니다."
이 말은 약 100여 년 전 일본군과 싸우던 우리의 농민군 이야기와 너무도 닮아있다.
"우리군은 훈련이 안 되어있고, 무기가 우수하고 잘 훈련된 일본군을 이길 수 있다고는 처음부터 믿지 않았다. 그러나, 나라가 흔들리고 있으니 죽더라도 일어서는 것이 옳다."
헬기들이 광주 상공을 가득 메우고, 도청 옥상의 대형 스피커에서는 군가 [승리의 찬가]가 울려 퍼지면서, 도청은 군인들에 의해 함락되었다. 예상대로 그렇게.

그래서...
전두환은 누가 뭐래도 12·12 군사 쿠데타와 5·18 대학살을 진두지휘한 반란군의 수괴로서, 반란 및 내란 수괴로 내란 목적 살인 및 상관살해미수 등 13가지 죄목으로 1심에서 사형, 2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범죄자이다.
그는 쿠데타에 맞서 감히 민주주의를 요구하면 어찌 되는지를 광주를 통해 똑똑히 보여주려 했다. 광주의 시민들은 북한군에게 이용당해서가 아니라 이웃을 난자하는 우리나라 국군의 총검 앞에서 인지상정으로, 살아남기 위해 구식 무기를 들었다. 계엄당국의 철통같은 고립작전에 몇 백 명의 북한군은 물론 한 사람이 빠져나오거나 들어가는 것도 거의 불가능했던 게 당시의 상황이기도 하다.
광주의 진실은 오랜 시간을 뛰어넘어 내게 다가왔다. 그 진실은 내가 나의 이웃들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임을 어렴풋이 느끼게 해준 아픔이었고 감동이었다. 그 진실이 오롯이 밝혀져서 지금의 우리들이 조금 더 인간다운 길을 걸어가게 하는 등불이 되어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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