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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민간잠수사 기록 로그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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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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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민간잠수사의 로그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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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구의 시신을 인도하고 올라오니 감독관이 '사람이 더 있느냐'라고 묻는다. '더 확인해봐야 한다'라고 답했다. 감독관이 '수고했다'라면서 '실종자 가족이 물속 상황을 듣고 싶어하니 이야기해줘라'라고 한다. 저편에 열 명쯤 되는 실종자 가족이 보인다. 그들에게 다가간다. 그들의 충혈된 눈 보니 내 눈시울도 젖어온다. 어찌 이야기를 해야 할까."

민간인 잠수사 한아무개씨가 2014년 4월 24일 세월호 희생자들을 수습하며 바지선 위에서 적은 잠수기록, 일명 '로그북' 중 일부다.

그는 이 기록에 앞서 "미리 약속된 장소에서 해경에게 시신을 인도하고 재진입 한다"라면서 "더듬더듬 손으로 시신을 찾는다. 이번에는 책상다리 밑에서 만져진다. '자 갑시다. 갑시다'라고 읊조리며 조심스레 잡아당겼다. 그러나 조금 나오다가 걸린다. 직각으로 굳어진 팔이 책상 다리에 걸린다"라고 희생자 수습과정을 자신의 로그북에 자세히 적었다. 

한씨는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 희생자 수습 과정에서 겪은 외상과 심각한 트라우마로 인해 수차례 병원 신세를 졌다. 지금도 그는 세월호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4월 23일, MBC는 세월호 4주기를 맞아 다큐멘터리 한 편을 방영했다. 세월호 민간잠수사들의 이야기를 다룬 복진오 감독의 <로그북-세월호 잠수사들의 일기>였다. 방송의 파장은 컸다. 우리가 잘 몰랐던 세월호 민간잠수사들의 헌신과 고통이 크게 회자됐다. "세월호 민간잠수사를 지원해야 한다"는 보도도 쏟아졌다.

그 후로 1년, 세월호 희생자 수습에 나섰던 민간잠수사들의 상황은 좋아졌을까.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다. 민간잠수사들을 실질적으로 지원해줄 법안은 2016년 6월 본안 발의 후 한 차례 개정을 거쳤지만 지금까지도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오마이뉴스>는 지난 21일 세월호 민간잠수사들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영화 <로그북>의 복진오 감독을 서울 중구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 인근에서 만났다.

"힘들고 힘들었다"
 
다큐 <로그북>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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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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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 <로그북>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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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 감독은 "힘들었다"라는 말부터 꺼냈다. 그는 "기록도 힘들었지만 기록을 풀어내는 과정도 쉽지 않았다"라면서 "제작하는 내내 '도대체 잠수사들은 어떻게 이리 힘든 사실을 감추고 살아왔을까'라는 생각만 들었다"라고 회고했다.

도대체 무슨 내용이었기에 '힘들다'는 말부터 한 것일까? 그는 '로그북'을 꺼냈다. 

"저도 다이빙을 하는데, 다이빙하는 사람들은 잠수기록인 로그북을 쓴다. 하지만 당시 잠수사들은 세월호 현장에서 로그북을 쓸 상황이 아니었다. 희생자들의 수습을 기다리는 유가족과 국민들의 바람이 컸고, 잠수사들 역시 해내야 한다는 간절함에 하루에 네 번이나 잠수를 했다. 그만큼 현장이 긴박하게 돌아갔다. 로그북을 기록했을 것이라곤 상상도 못했다. 그런데 수색이 끝난 후 잠수사들을 다시 만나보니 당시에 쓴 일기 형태의 로그북이 있더라. 그 안에는 그간 제대로 말하지 못했던 아픔이 온전히 담겨 있었다."

복 감독은 원래 독립PD다. 보통은 방송국 외주 다큐멘터리를 만들거나 방송국에서 수중촬영이 필요할 때 지원을 나간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때, 그는 세월호를 온전히 기록하자는 차원에서 동료 독립PD들과 함께 현장을 찾아갔다고 한다. 그러다 잠수사들을 발견했다.

"아무나 바지선에 들어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지인을 통해 잠수현장을 알게 됐고 저는 하루 정도 들어가서 어떻게 구조가 되고 수색이 되는지 스케치하고 그 과정을 담으려고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 잠수사들이 구조하고 수색하는 과정을 보니 굉장히 막중한 사명감과 책임감을 갖고 일하더라."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직후, 스물다섯 명의 민간잠수사들이 4월 20일을 전후해 바지선에 올라 7월 10일까지 수색작업을 벌였다. 그들은 해군잠수사들과 함께 292구의 시신을 수습했다. 복 감독도 2014년 4월 말부터 현장에서 먹고 자며 3개월 동안 잠수사들의 이야기를 기록했다.

복 감독은 "당시 민간잠수사들은 물속에서 목숨을 걸고 세월호에 줄을 연결했다"면서 "이 줄을 잡고 희뿌연 선내를 손으로 더듬으며 희생자들을 찾아냈다. 희생자들의 유품까지 건져올렸다. 하지만 세월호 안에서 엉켜 있는 아이들 모습을 보는 건 베테랑 잠수사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한 민간잠수사의 말을 대신 전했다.

"아이들끼리 서로 엉켜 있었대요. 구석에 모두 엉켜 있는데, 아마도 바닷물이 차오르자 뱃머리로 피하려 했겠지. 그렇게 다 모였던 것이다. 아마 마지막까지 다들 애를 쓰다 돌아오지 못한 것 같다."
 
다큐 <로그북> 복진오 감독(좌)과 민간 잠수사
 다큐 <로그북> 복진오 감독(좌)과 민간 잠수사
ⓒ 복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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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민간잠수사들은 대부분 산업잠수사 출신이다. 산업잠수사는 수중에서 작업할 수 있는 국가자격증을 취득한 잠수사로, 잠수사들 사이에서도 '가장 전문적이다'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들은 세월호 참사 발생 후 자발적으로 전국에서 모여들었다. 그리고 팀을 꾸려 침몰 현장으로 향했다.

복 감독은 "잠수사들은 언제 선체가 무너질지 모르는 공포를 이겨내고 호스 하나에 의지해 세월호로 내려간 것"이라면서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극한의 공포가 밀려오는데도 잠수사들은 그걸 이겨내고 아이들을 수습했다"고 전했다.

보통은 '잠수병' 우려로 하루에 한 번만 잠수를 해야 한다. 수중 체류 시간도 20여 분 남짓, 지상으로 올라올 때는 수압에 몸을 적응시키기 위해 분당 9m씩 상승해야 한다. 하지만 당시 민간잠수사들은 그러지 않았다. 하루 네 차례씩 희생자 수색에 투입됐다. 눈앞에 희생자들이 계속 보였던 탓이다. 민간잠수사들은 선체길이 146m, 폭 22m, 수심 48m에 위치한 세월호 안에 들어가 손으로 만지며 희생자를 수습했다.

그러나 정부는 2014년 7월 10일, 민간잠수사들에게 '나가라'고 통보했다. 해경이 다른 잠수사들과 정식 업무계약을 했다는 이유에서였다. 당시 세월호에는 11명의 미수습자가 남아 있었다. 민간잠수사들이 해군이 맡았던 수색구역인 선체 중앙과 선미를 수색하려 했던 시점이다. 이미 해군과도 수색 위치를 바꾸자고 이야기 된 상태였다. 그러나 그들은 갑작스러운 퇴거 명령에 교차수색을 해 보지도 못하고 뭍으로 올라와야 했다.
 
세월호 희생자 수습을 지휘한 공우영 잠수사
 세월호 희생자 수습을 지휘한 공우영 잠수사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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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이후에 벌어졌다. 민간잠수사들의 리더격이었던 공우영 잠수사가 '동료 잠수사가 현장에서 사망했다'라는 이유로 2014년 8월 검찰에 기소 당했다. 검찰은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공 잠수사에게 징역 1년을 구형했다. 재판은 1심과 2심, 대법원까지 이어졌다. 지난해 1월이 돼서야 공 잠수사는 대법에서 최종적으로 무죄를 확정받았다. 외상과 트라우마에 시달리던 동료 민간잠수사들은 이 모든 과정을 옆에서 생생하게 지켜봤다.

2016년 6월 세상을 떠난 고 김관홍 잠수사도 그런 민간잠수사 중 하나였다. 김 잠수사는 희생자들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목과 등에 부상을 입었다. 이후 극심한 정신적 트라우마까지 겹쳐 일상생활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후유증으로 본업인 잠수사 일을 그만두고 낮에는 아내의 꽃가게 일을, 밤에는 대리운전을 하며 생계를 이어왔다. 그러나 결국 그는 부인과 세 아이를 남겨두고 세상을 등졌다.

2016년 국민안전처 해양경비안전본부는 세월호 참사에 동원된 민간 잠수사 중 일부에게 1000만원에서 2억 200만원을 지급했다. 9등급이 1000만원, 1등급이 2억 200만원이다.

1등급 보상 대상은 2014년 5월 말 세월호 선체 수중절단 작업 중 폭발사고로 현장에서 숨진 잠수사와 고 김관홍 잠수사였다. 그 외 대부분은 7~9급 판정을 받아 1000만~4000만원 가량의 보상금을 받았다. 하지만 트라우마와 잠수병으로 병원비와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잠수사들 입장에겐 턱없이 부족한 액수였다.

복 감독은 뭍으로 나온 뒤에도 민간잠수사들의 '트라우마' 과정을 추적해 기록으로 남겼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세월호 잠수사들의 이야기 <로그북>이다. 

"방영까지 4년, 윗선은 눈치를 봤다"
 
다큐 <로그북> 복진오 감독
 다큐 <로그북> 복진오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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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 MBC에서 <로그북> 편집 영상이 공개되기까지 무려 3년이 넘는 시간이 소요됐다. 그러나 전체 분량은 지금까지도 정식 상영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세월호, 그중에서도 세월호 잠수사들의 이야기는 그 당시 어떤 방송사에서도 받아주지 않는 아이템이었다"라면서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기 전에도 한 방송국에서 방영을 적극 검토했으나 윗선에서 거절했다더라"라고 말했다.

복 감독은 다시 때를 기다리고 있다. 때마침 <로그북>은 '인디다큐페스티벌2019' 상영작으로 선정돼 22일 상영됐으며, 26일에도 홍대 롯데시네마에서 관객들을 만난다.

복 감독은 <로그북>을 완성한 뒤에도 민간잠수사들과 지속적으로 연락한다고 했다. "가끔씩 수중촬영 의뢰가 들어오면 치료 중인 세월호 민간잠수사들과 함께 작업했다. 낙동강과 금강도 함께 들어갔고, 그렇게 생활비를 함께 벌었다."

복 감독은 당시의 일화를 소개했다. "강원도에서 작업할 일이 있었는데 마침 손이 부족했다. 민간잠수사 중 한 명에게 '같이 하자'라고 연락을 했죠. 나중에 일 다 마치고 그 잠수사가 제게 말하더라. '형이 그때 나한테 전화를 하지 않았으면 나 지금 어떻게 됐을지 몰라, 정말로 우울증이 너무 심해서 뭘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었어, 그때 형이 같이 일하자고 전화를 한 거야, 그래서 살았어'라고."

복 감독은 "그 잠수사가 저를 도와줘서 저도 살았고, 그 잠수사도 제가 전화해서 살았다"라면서 웃었다.

복진오 감독의 <로그북>은 지난해 8월 제10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처음 상영됐다. 지난 1월에는 한국독립PD협회가 주관하는 제12회 <한국독립PD대상>에서 대상 작품으로 선정됐다.

태그:#세월호, #김관홍, #복진오, #로그북, #황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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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팀 취재기자. 오늘도 애국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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