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가 14일 오후 서울 강남구의 유명 클럽 '버닝썬' 출입구 앞 경찰 수사관들이 디지털 포렌식 장비 등을 들고 들어가려 하고 있다. 2019.2.14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가 14일 오후 서울 강남구의 유명 클럽 "버닝썬" 출입구 앞 경찰 수사관들이 디지털 포렌식 장비 등을 들고 들어가려 하고 있다. 2019.2.14
ⓒ 연합뉴스

관련사진보기


클럽 버닝썬 사건에는 지하경제라는 코드가 담겨 있다. 성매매, 마약 거래, 공무원과의 불법유착처럼 공권력에 포착되지 않는 금전 흐름을 동반하는 현상들이 이 사건에서 튀어나오고 있다.

지하경제는 국민에 대한 국가권력의 장악도를 반영하는 지표가 된다. 가족 구성원이 다른 식구 모르게 돈을 벌거나 쓰는 일이 많으면 '가화만사성'을 이룰 수 없다. 마찬가지로 국민들이 국가권력 몰래 금전거래를 많이 하면, 국가의 지배력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세무사 정연태의 <지하경제와 좌익세>에 따르면, 1999~2007년 국내총생산(GDP)에서 지하경제가 차지한 비중은 25.3~28.3%로 추정된다. GDP 4분의 1 이상 되는 금전 흐름을 국가권력이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권력이 돈에서 나온다는 점을 감안할 때, 금전 흐름의 4분의 1 이상을 국가가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은, 대한민국 정부가 실제로는 최대 4분의 3짜리 권력밖에 보유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사실 지하경제의 '지하'란 표현은 국가권력이 정의롭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국가의 과세 대상으로 포착되지 않는 금전 흐름은 불법'이라는 국가권력의 관점을 반영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역사 단계에서는 지하경제란 표현을 부득이 쓸 수밖에 없다. - 기자 주).

조선시대에도 지하경제는 있었다

그런데 지하경제는 과거에도 문제가 됐다. 어느 시대건 간에 국가가 성실 납세를 힘껏 강조했다는 사실은, 지하경제 문제가 시대를 관통하는 공통의 문제였음을 보여준다. 그런 분위기를, 비교적 강력한 군주였던 조선 세조(수양대군) 시대로부터도 확인할 수 있다. 세조 같은 강력한 군주도 깜짝 놀랄 정도로, 이 시대에도 지하경제가 막강했다.

조선왕조가 관리하기 힘들었던 지역 중 하나는 함길도(함경도)다. 이곳은 여진족 방어를 위한 전초기지였다. 그래서 군수물자가 특히 필요했다. 하지만, 국가재정이 넉넉지 못하고 거리도 먼 탓에 군수물자가 제때 그리고 충분히 공급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조정이 민간에 손을 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세금을 거두는 데도 한계가 있으므로, 징세 이외의 방법으로도 손을 벌려야 했다. 그래서 안출해낸 방안 중 하나는 노비들에게도 '방위성금' 기부를 요청하는 것이었다.

음력으로 세조 13년 7월 4일자(양력 1467년 8월 3일자) <세조실록>에 따르면, 조정에서는 '노비가 쌀 50석(100가마니)을 마련해서 함길도까지 직접 운송해주면 면천을 시켜주겠다'는 약속을 공포했다. 쌀을 군수물자로 기부하고 직접 배송까지 해주면 노비 신분에서 해방시켜주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면천은 주인집 농토를 소작하는 노비(A)한테는 불리했다. 그런 노비한테는 면천이 곧 실직이었다. 대다수 노비들은 주인집에 종속된 소작농이었기 때문에 면천을 반길 수 없었다. 하지만, 주인집 땅이 없어도 사는 데 지장이 없는 노비(B)들은 달랐다. 또 순번제로 관청에 나가 무보수 노동을 해야 하는 공노비(관노비, C)들도 달랐다. B와 C는 면천을 환영했다.

위 조치는 B와 C를 겨냥한 것이다. 둘 중에서 부유한 노비들로부터 군수물자 기부를 받을 목적으로 취해진 조치였다.

공노비 면천은 국가의 직권으로도 가능했지만, 개인이 소유한 사노비에 대한 면천은 사노비 주인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사노비를 면천할 경우에는 노비 주인에 대한 보상 조치도 병행돼야 했다. 이를 위해 국가는 사노비 주인한테 공노비 1명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다. 관청에 가서 공노비 중 1명을 임의로 선택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 당시 쌀 50석이면 거액이었다. 울산 옥현의 경우, 1968년 이전까지만 해도 논 1마지기(300평)의 연간 수확량이 112kg에 불과했다. 쌀 1석(144kg)도 안 되는 양이었다.

조선시대에는 1마지기 수확량이 그보다 훨씬 적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에 비해 쌀이 고가의 상품이었다. 따라서 쌀 50석을 마련하는 것도 대단한 일이고, 50석을 함길도까지 운반하는 것도 대단한 일이었다. 국가가 노비들에게 그런 제안을 했다는 사실은, 노비 중에도 부자가 많다는 점을 국가가 판단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부자 노비'에 화들짝 놀란 세조

그런데 국가권력이 놀랄 만한 일이 위 조치 발표 직후에 벌어졌다. 당초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너무나 많은 숫자의 노비들이 너도나도 지원을 했던 것이다.

<세조실록>에 따르면 "모집에 응하는 자가 심히 많았다"고 한다. 많아도 어찌나 많은지, 시행 2개월 만인 음력 9월 10일(양력 10월 7일)에 취소 결정을 내려야 할 정도였다.

노비 노동을 기초로 생산이 이루어지는 사회에서, 노비의 대규모 면천은 생산성의 급격한 저하를 초래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세조는 함길도에 군수물자를 넉넉히 공급함으로써 생기는 안보상의 이익보다, 노비들을 대거 면천시킴으로써 생기는 공짜 노동력 상실이란 불이익이 더 크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국가는 조치를 취소하는 것에 더해, 이미 면천을 받은 사노비의 주인들한테 했던 약속까지도 뒤집었다. 애초에 국가는 '군수물자를 헌납한 사노비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하는 주인한테는 공노비를 임의로 고를 수 있는 권리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사노비 주인들은 젊고 건장한 공노비들만 선호했다. 국가는 주인들이 요구하는 대로 내줄 수밖에 없었다. 이러다 보니, 국가가 이중의 손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군수물자를 기부한 공노비도 내줘야 하고, 나머지 공노비들 중에서 젊고 건장한 사람들까지 사노비 주인에게 내줘야 했던 것이다.

세조 13년 10월 25일자(1467년 11월 21일자) <세조실록>에 따르면, 결국 국가는 노비 주인에게 인정했던 선택권을 취소하고, 공노비 담당 부서인 장례원이 노비를 골라주도록 하는 쪽으로 약속을 뒤집었다. 원인은 국가가 노비들의 재산 실태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데 있다. 
 
 서울 광화문광장에 있는 호조 터 표지(동그라미 부분).
 서울 광화문광장에 있는 호조 터 표지(동그라미 부분).
ⓒ 김종성

관련사진보기

 
국가권력을 당황케 할 만큼의 재산이 노비들한테 있었다는 사실은 국가가 미처 파악하지 못한 돈의 흐름이 그처럼 많았음을 의미한다. 주로 상업에 종사하는 노비들이 공권력 모르게 축적해놓은 재산이 대규모 지하경제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쌀 50석을 내겠다고 자원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노비들은 그 뒤에 경을 쳤을지도 모른다. 갑작스레 관청 직원들이 대문을 열고 들어와 집안 여기저기를 뒤지는 일이 있었을 수도 있다. 면천은 받지 못하고 세무조사만 받는 셈이다.

서울 광화문광장의 KT 본사와 교보빌딩 쪽에 지금의 기획재정부인 호조 관청이 있었다. 이 관청이 파악하지 못하는 지하경제 규모가 그처럼 상당했다. 버닝썬 사건에서 튀어나오는 지하경제 문제가 세조 같은 강력한 군주의 시대에도 국가권력을 긴장시켰던 것이다.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FM101.9 (목)11시25분경. (저서) 역사 추리 조선사, 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 못하나,발해고(4권본,역서),패권 쟁탈의 한국사,신라 왕실의 비밀,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상고사(역서),조선노비들,왕의 여자,철의제국 가야,최숙빈,한국사 인물통찰,동아시아 패권전쟁 등. www.kimjongs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