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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이용자와 도서관 사서가 함께 쓴 도서관 역사 여행기입니다. 대한제국부터 대한민국까지 이어지는 역사 속 도서관, 도서관 속 역사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편집자말]
*①편에서 이어집니다.

수옥헌, 지금의 중명전을 다루는 이유는 이곳이 '황실 도서관'인 동시에 대한제국의 운명을 가른 '역사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이토 히로부미가 을사오적에게 조약 찬성을 일일이 확인한 후 대한제국과 일본은 조약을 체결한다. 대한제국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 정부의 특명 전권공사 하야시 곤스케가 을사늑약을 체결하는데 그 장소 또한 수옥헌이다. 굴욕적인 조약 체결을 통해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잃고 일본의 속국으로 전락한다. 

왜 수옥헌이었을까
 
황실 도서관이자 역사의 현장인 ‘중명전’ 고종은 규장각을 강화하고 경복궁 집옥재에 수많은 서책을 모으기도 했다. ‘황실 도서관’인 중명전에도 상당한 장서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화재로 불타고 말았다. 중명전 뒷편에는 고종이 침전으로 쓰던 만희당이 있었다. 중명전이 외국인을 위한 서울 구락부로 쓰일 무렵 만희당 자리에는 수영장이 설치되기도 했다. 중명전 옆 한옥은 주한 미국대사관저다.
▲ 황실 도서관이자 역사의 현장인 ‘중명전’ 고종은 규장각을 강화하고 경복궁 집옥재에 수많은 서책을 모으기도 했다. ‘황실 도서관’인 중명전에도 상당한 장서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화재로 불타고 말았다. 중명전 뒷편에는 고종이 침전으로 쓰던 만희당이 있었다. 중명전이 외국인을 위한 서울 구락부로 쓰일 무렵 만희당 자리에는 수영장이 설치되기도 했다. 중명전 옆 한옥은 주한 미국대사관저다.
ⓒ 백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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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황실 도서관 수옥헌은 어떻게 을사늑약 체결 장소가 된 걸까? 1904년 4월 14일 함녕전 온돌을 고치다가 경운궁에 큰 화재가 발생한다. 중화전을 비롯한 대부분의 전각이 불타자 고종 황제는 수옥헌으로 처소를 옮기고 집무실로 사용한다. 황실 도서관 수옥헌이 우리 역사 속으로 깊숙이 들어서게 된 사연이다. 

을사늑약 체결 이후인 1906년부터 수옥헌은 '중명전'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헌(軒)에서 전(殿)으로 건물은 격상되었으나 국력과 국권은 회복 불능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을사늑약 체결로 외교권을 박탈당한 고종 황제는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 이준, 이위종, 헐버트(Homer B. Hulbert) 네 명을 특사로 파견한다. 일제 침략과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호소하고 외교권을 되찾기 위한 '특사'(特使)이자 일제 감시 속에 비밀리에 파견한 '밀사'(密使)다. 

헤이그 특사 파견, 그리고 고종의 강제 퇴위 
 
헤이그 특사 왼쪽부터 이준, 이상설, 이위종. 고종은 이 세 명에 헐버트를 포함, 네 명의 특사를 헤이그에 파견한다. 풍전등화 같은 조국의 운명을 구하기 위해 특사는 백방으로 노력하지만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한다. 네 명의 특사 중 헐버트는 1949년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이준은 1963년 헤이그에서 유해를 송환, 수유리에 묻혔으나 이상설과 이위종은 그 유해마저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중명전에서 재촬영한 사진.
▲ 헤이그 특사 왼쪽부터 이준, 이상설, 이위종. 고종은 이 세 명에 헐버트를 포함, 네 명의 특사를 헤이그에 파견한다. 풍전등화 같은 조국의 운명을 구하기 위해 특사는 백방으로 노력하지만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한다. 네 명의 특사 중 헐버트는 1949년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이준은 1963년 헤이그에서 유해를 송환, 수유리에 묻혔으나 이상설과 이위종은 그 유해마저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중명전에서 재촬영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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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5일 헤이그에 도착한 특사는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해 일제의 침략상을 폭로하려 하였으나 대한제국의 자주적 외교권을 인정받지 못하면서 회의에 참석하지 못한다. 울분을 참지 못한 부사(副使) 이준은 7월 14일 숨지고 헤이그에 묻힌다. 1907년 7월 20일 일제는 평리원에서 궐석재판을 열어 헤이그 특사 중 정사(正使) 이상설은 사형, 부사 이준과 이위종에게는 각각 종신형을 언도했다. 

이상설은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이어가다가 1917년 3월 2일 시베리아 니콜리스크에서 48세로 사망한다. 을사늑약 때 고종에게 '죽음으로써 비준을 거부하라'고 상소했던 이상설은 죽음을 앞두고 이런 유언을 남겼다. 

"동지들은 합심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광복을 못 보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남김없이 불태우고 그 재는 바다에 버리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

이위종은 항일운동을 이어가다가 러시아 혁명 이후 볼셰비키 혁명군에 가담했다. 이후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1905년 워싱턴 특사에 이어 1907년 헤이그에 특사로 파견된 헐버트는 1910년 한일 강제 병합 이후 추방된다. 백척간두에 선 조국을 구하기 위해 머나먼 이국에서 분투한 헤이그 특사는 헐버트를 제외하고 아무도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하지만 헤이그 특사는 일제 침략을 세계에 처음으로 알렸다. 

헤이그 특사 파견 소식을 접한 일제는 1907년 7월 18일 고종 황제를 강제 퇴위시킨다. 7월 20일 경운궁 중화전에서 열린 양위식에는 황위를 물려주는 고종도, 물려받는 순종도 참석하지 않았다. 7월 24일에는 '정미7조약'이라 불리는 한일신협약을 체결, 통감이 한국 내정에 일일이 간섭할 수 있도록 했다. 정미7조약을 통해 일제는 고문정치를 차관정치로 전환하고 7월 31일에는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킨다. 8월 1일 군대 해산에 반발한 대한제국 군대와 일본군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진다. 대한제국 군대의 처음이자 마지막 전투였다. 

왕과 대신이 죽음을 무릅쓰고 나라를 지킬 각오였다면
 
고종의 헤이그 특사 위임장 1907년 4월 20일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하기 위해 고종이 이준에게 발급한 위임장. 헤이그 특사 중 이준은 위임장을 받아 국내에서 출발한 유일한 특사다. 고종의 위임장을 받은 이준은 서울을 떠나 블라디보스톡에서 이상설과 만난다. 두 사람은 시베리아 철도로 러시아 페테르스부르크에 도착, 이위종과 합류한다. 중명전에서 재촬영한 사진.
▲ 고종의 헤이그 특사 위임장 1907년 4월 20일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하기 위해 고종이 이준에게 발급한 위임장. 헤이그 특사 중 이준은 위임장을 받아 국내에서 출발한 유일한 특사다. 고종의 위임장을 받은 이준은 서울을 떠나 블라디보스톡에서 이상설과 만난다. 두 사람은 시베리아 철도로 러시아 페테르스부르크에 도착, 이위종과 합류한다. 중명전에서 재촬영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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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국평화회의를 통해 원하는 바를 이루진 못하지만 고종 황제가 헤이그 특사를 파견한 장소가 중명전이다. 1907년 4월 20일 이준이 고종의 위임장을 받은 곳이 바로 이곳 중명전이다. 특사 파견 후 고종은 일제에 의해 황제에서 퇴위당하고 유폐되는데 고종의 강제 퇴위를 촉발한 장소 또한 중명전인 셈이다. 을사늑약을 체결한 '망국의 현장'이자 헤이그 특사 파견으로 망국을 막으려는 '마지막 몸부림'이 모두 '황실 도서관' 중명전에서 벌어졌다. 

헤이그 특사 파견 12년 후인 1919년 1월 21일 고종은 68세로 세상을 떠난다. 고종의 장례식인 3월 3일을 앞두고 3.1 운동이 일어난다. 소설가이자 독립운동사를 연구한 송우혜는 고종이 살아있는 동안 나라를 위해 이룩한 것보다 "죽은 고종의 차가운 시신이 오히려 더욱 거대하고 장렬하고 가치 있는 기여를 말없이 성취"해냈다고 평했다. 

을사늑약 체결 당시 이상설은 '황제가 인준을 해도 나라가 망하고 인준을 하지 않아도 망하니 인준을 거부하고 사직을 위하여 순사(殉死)할 것과 을사오적을 처단하고 조약을 파기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이상설이 주장한 것처럼 고종이 죽음으로써 늑약 체결을 거부했다면 어땠을까. 하지만 고종은 이상설의 상소처럼 처신하지 않았다. 하긴 왕과 대신이 죽음을 무릅쓰고 나라를 지킬 각오였다면 나라가 그 지경에 처하진 않았을 것이다. 

망국 그 후, 중명전 이야기
 
덕수궁 전경 고종 강제 퇴위 후 경운궁은 덕수궁으로 이름이 바뀐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덕수궁은 그 영역이 1/3로 축소된다. 덕수궁의 이름을 ‘경운궁’으로 다시 바꿔야 한다는 논의가 최근 있기도 했다. 덕수궁을 가장 잘 조망할 수 있는 서울특별시청 서소문별관 13층 ‘정동전망대’에서 촬영한 사진. 사진 왼편 석조전 서관(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뒤편으로 중명전이 보인다.
▲ 덕수궁 전경 고종 강제 퇴위 후 경운궁은 덕수궁으로 이름이 바뀐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덕수궁은 그 영역이 1/3로 축소된다. 덕수궁의 이름을 ‘경운궁’으로 다시 바꿔야 한다는 논의가 최근 있기도 했다. 덕수궁을 가장 잘 조망할 수 있는 서울특별시청 서소문별관 13층 ‘정동전망대’에서 촬영한 사진. 사진 왼편 석조전 서관(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뒤편으로 중명전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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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운궁에 세워진 중명전이 덕수궁 담장 밖으로 밀려난 이유는 뭘까? 대한제국 때 경운궁은 지금보다 3배 넓은 규모였으나 고종 황제가 강제 퇴위당한 후 선황제(先皇帝)가 거처하는 궁으로 위상이 달라지고 이름도 '덕수궁'으로 바뀐다. 1910년 한일 강제 병합 후 일제가 경운궁을 축소하면서 중명전은 경운궁 밖에 놓이게 된다. 1912년부터는 서울에 주재하는 외교관 모임인 서울 구락부(Seoul Club)가 중명전을 임대해서 사용했다.

1925년 3월 12일 중명전에 화재가 발생해서 2층이 전소된다. 책과 신문을 두던 2층 서적실에서 시작된  화재로 중명전은 상당한 손상을 입는다. 이후 복구된 중명전은 구락부로 계속 사용, 해방 후 서울 클럽, 아메리칸 클럽으로 쓰인다. 

1919년 고종이 세상을 떠난 후 일제는 선원전 구역 전각부터 해체, 매각해서 덕수궁 영역을 크게 축소한다. 경성제일공립고등여학교(경기여자고등학교), 경성여자공립보통학교(덕수초등학교), 구세군사관학교 같은 학교 부지와 경성방송국, 경성부민관이 덕수궁 영역에 자리를 잡는다. 1933년부터는 덕수궁을 일반에게 공원으로 개방하고, 1938년에는 덕수궁 석조전을 이왕가 미술관으로 바꾼다. 1934년 12월에는 연못을 만들어 스케이트장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창경궁이 '창경원'이라는 이름의 동물원, 식물원으로 전락한 것처럼 경운궁도 '덕수궁'이라는 이름으로 공원이 되었다. 해방 후 미소공동위원회가 석조전에서 열리면서 세인의 관심을 모으기도 하지만 왕실이라는 주인을 잃은 덕수궁은 쇠락의 역사를 걷는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중명전은 국유재산이 된다. 1963년 영구 귀국한 영친왕 이은과 이방자 여사 소유였다가 1977년 민간에 매각되어 개인 소유로 바뀐다. 이후 오랫동안 방치되면서 중명전은 크게 훼손되기도 했다. 2006년부터 문화재청이 관리하면서 2007년 2월 덕수궁에 다시 편입된다. 2009년 문화재청은 공사를 통해 중명전을 대한제국 당시 모습으로 복원했다. 

오랫동안 방치된 중명전은 철저히 '잊혀진 도서관'이기도 하다. 우리 도서관사와 문헌정보학사를 보면 이완용, 민영기, 이재극 같은 친일파가 주축이 되어 추진한 '대한도서관'은 국립도서관 건립 시도로 거론하지만 중명전은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중명전에 어떤 책이 얼마나 있었는지 판단할 근거가 부족해서일까. 우리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중명전을 도서관 역사에서 언급조차 하지 않는 건 이상하다. 

'광명'이 아닌 '암흑'의 역사가 시작된 도서관
 
중명전 편액 도서관이 망국의 현장이 된 경우는 우리 역사는 물론 세계사적으로도 흔치 않을 것이다. ‘중명’은 <주역> 리(離)괘에 나오는 말로 왕과 신하가 자신의 직분을 다 한다는 의미다. 역설적으로 ‘중명전’이라는 이름은 을사늑약 전후로 대한제국 황제와 신하가 그 직분을 다 했는지 되묻고 있다.
▲ 중명전 편액 도서관이 망국의 현장이 된 경우는 우리 역사는 물론 세계사적으로도 흔치 않을 것이다. ‘중명’은 <주역> 리(離)괘에 나오는 말로 왕과 신하가 자신의 직분을 다 한다는 의미다. 역설적으로 ‘중명전’이라는 이름은 을사늑약 전후로 대한제국 황제와 신하가 그 직분을 다 했는지 되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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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명전의 '중명'(重眀)은 일월(日月)이 함께 하늘에 있어서 광명이 겹친다는 의미다. 임금과 신하가 각자의 자리에서 직분을 다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건물 이름과 달리 고종은 일제의 강압을 회피하기 바빴고 나라의 녹을 먹는 다수 대신은 을사늑약을 찬성했다. 

역사는 반복된다 했던가. 을사늑약 체결 후 92년이 지난 1997년 대한민국은 'IMF 구제금융 사태'라는 위기를 맞는다. '경제 망국'으로까지 불린 위기가 나라를 덮쳤지만 대통령과 정부 고위 관료 중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고 시민은 그들의 책임을 제대로 묻지 않았다.

국권을 잃지 않았다면 중명전은 대한제국 또는 근대화된 나라의 '황실 도서관' 또는 '국립도서관'으로 역사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광명(光明)이 계속 이어져 그치지 않는 전각'이라는 뜻을 지닌 중명전. 이름과 달리 중명전의 광명은 이어지지 않았다.

중명전은 '광명'이 아닌 '암흑'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다. 우리 역사에서 망국의 현장으로 기록된 '도서관'은 중명전이 유일무이할 것이다. 또 그래야만 한다. 

[덕수궁 중명전]

- 주소 : 서울시 중구 정동길 41-11 
- 이용시간 : 09:30 - 17:30 
- 휴관일 : 매주 월요일 
- 이용자격 : 이용 자격 제한 없음. 무료 
- 홈페이지 : http://www.deoksugung.go.kr
- 전화 :  02-771-9951
- 운영기관 : 문화재청 덕수궁 관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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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해서 책사냥꾼으로 지내다가, 종이책 출판사부터 전자책 회사까지 책동네를 기웃거리며 살았습니다. 책방과 도서관 여행을 좋아합니다.

사람사이에 조용히 부는 따스한 봄바람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아이들, 동물, 책을 좋아하는 고양이 집사입니다. 도서관 사서로 일하다가 지금은 소박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