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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이용자와 도서관 사서가 함께 쓴 도서관 역사 여행기입니다. 대한제국부터 대한민국까지 이어지는 역사 속 도서관,  도서관 속 역사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편집자말]
정동(貞洞)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 신덕왕후의 무덤 정릉(貞陵)이 있던 곳이다. 한양 도성 안에 왕비의 능을 마련한 건데, 신덕왕후 강씨에 대한 이성계의 사랑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정릉은 신덕왕후와 사이가 좋지 않던 태종 이방원에 의해 도성 밖(지금의 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겨지지만, 정릉이 있던 곳이어서 '정동'이라는 이름이 남았다.

선조 때 사림은 이조 전랑 자리를 두고 갈등하며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으로 나뉜다. 강경파 김효원의 집이 동쪽에, 온건파 심의겸의 집이 서쪽에 있어서 각각 동인과 서인으로 불렸다. 동인을 대표하는 김효원의 집은 낙산 건천동에, 서인을 대표하는 심의겸의 집은 지금의 정동에 있었다. 정동은 당쟁의 진원지이기도 했다. 

열강의 각축장 정동 
 
‘아관파천’의 현장, 러시아 공사관 ‘아관파천’은 일국의 왕이 자신의 나라에 있는 타국 공사관으로 피신한 초유의 사건이다. 러시아 공사관은 사바틴이 설계했다. 사바틴은 독립문을 비롯해 경운궁의 구성헌, 돈덕정, 정관헌과 러시아 정교회, 손탁호텔 같은 서양식 건물을 설계한 사람이다. 러시아 공사관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건물 대부분이 파손되어 지금은 3층 전망탑과 건물 일부만 남아 있다.
▲ ‘아관파천’의 현장, 러시아 공사관 ‘아관파천’은 일국의 왕이 자신의 나라에 있는 타국 공사관으로 피신한 초유의 사건이다. 러시아 공사관은 사바틴이 설계했다. 사바틴은 독립문을 비롯해 경운궁의 구성헌, 돈덕정, 정관헌과 러시아 정교회, 손탁호텔 같은 서양식 건물을 설계한 사람이다. 러시아 공사관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건물 대부분이 파손되어 지금은 3층 전망탑과 건물 일부만 남아 있다.
ⓒ 백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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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은 19세기 후반 서구 열강의 공사관이 모여 있던 곳이다. 1883년 미국 공사관, 1884년 영국 공사관, 1885년 러시아 공사관에 이어, 1889년 프랑스 공사관, 1891년 독일 공사관이 자리를 잡았다. 1901년 벨기에 공사관과 1902년 이탈리아 공사관이 정동과 가까운 서소문동에 각각 자리 잡았다. 이 일대에 외국 공사관이 몰린 이유는 뭘까? 교통이 편리하고 도성 안이면서 상대적으로 외진 곳이라 공사관이 자리 잡을 공간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1895년 중전 민씨(명성황후로 추존)가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은 1896년 2월 11일 정동에 있던 러시아 공사관으로 1년 동안 피신한다. 이른바 '아관파천'. 일국의 왕이 자신의 영토에 있는 다른 나라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고종은 일본의 위협을 견제하기 위해 친일 내각을 치고 친러 내각을 구성한다. 아관파천으로 고종은 러시아의 힘을 빌려 일본의 한반도 침략에 맞서려 했으나 러시아와 일본은 '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를 맺으며 조선에서 이익을 챙기기 바빴다.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지 1년 만인 1897년 2월 20일 고종은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환궁한다. 고종은 중전 민씨가 시해된 경복궁보다 외국 공사관으로 둘러싸인 경운궁이 더 안전하다고 느꼈다. 근대화 추진 장소로도 외국 공사관과 배재학당, 이화학당, 러시아정교회, 성공회 성당이 모여있는 정동이 더 적합했을 것이다. 

외세에 흔들리지 않는 독립국가 건설의 필요성을 느낀 고종은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환구단에서 황제에 즉위한다. 황제 즉위와 함께 고종은 '광무개혁'을 단행한다. 근대적 토지조사사업과 상공업 진흥 정책을 추진하고, 각종 학교와 공장을 설립하며, 철도와 전차, 전화 같은 신문물을 도입했다.

구성헌, 돈덕전, 석조전, 정관헌, 중명전 같은 서양식 건물이 경운궁에 세워진 것도 이 때다. 경운궁에 있는 서양식 건물은 근대화를 이루려 한 고종의 의지를 담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러나 이름과 달리 대한제국은 '제국'도 '왕국'도 아닌 일본의 '속국'이나 다름없는 상황으로 전락하고 있었다. 

'황실 도서관' 수옥헌
 
‘황실 도서관’ 중명전 중명전의 옛 이름은 ‘수옥헌’이다. 수옥헌은 ‘황실 도서관’이었다. 수옥헌의 설계자는 다이라는 설과 사바틴이라는 설이 있다. 1899년 단층으로 지은 수옥헌의 설계자가 다이(J. H. Dye), 화재 후 1902년 재건한 중명전 설계자가 사바틴(Sabatin)일 가능성도 있다. 김정동 교수는 수옥헌이 건물이 아닌 경운궁 궁궐의 영역, 즉 ‘궐역’이었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 ‘황실 도서관’ 중명전 중명전의 옛 이름은 ‘수옥헌’이다. 수옥헌은 ‘황실 도서관’이었다. 수옥헌의 설계자는 다이라는 설과 사바틴이라는 설이 있다. 1899년 단층으로 지은 수옥헌의 설계자가 다이(J. H. Dye), 화재 후 1902년 재건한 중명전 설계자가 사바틴(Sabatin)일 가능성도 있다. 김정동 교수는 수옥헌이 건물이 아닌 경운궁 궁궐의 영역, 즉 ‘궐역’이었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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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극장 옆으로 난 골목길로 들어서면 '중명전'(重眀殿)이라는 건물을 만날 수 있다. 중명전의 원래 이름은 '수옥헌'(漱玉軒)으로 1899년 6월 지은 '황실 도서관'이다. 1897년 9월 30일 미국의 알렌(Horace Newton Allen) 공사가 본국에 보낸 <주한미국공사관 주변과 도로의 약도>에는 이곳을 'King's Library'로, 1901년 영국 공사관의 브라운(Browne) 대령이 그린 <서울 지도>에는 'Library Imperial'로 표시하고 있다. 

수옥헌의 설계자는 누구일까? 대한제국 내부 소속 기사인 미국인 다이(J. H. Dye)라는 설(이순우)과 스위스계 러시아인 사바틴(A. I. S. Sabatin)이라는(김정동) 두 가지 설이 있다. 사바틴은 1891년 경복궁 건청궁에 서양식 서재 관문각을 지은 사람이다.

지은 지 10년 만에 헐리지만 관문각은 궁궐에 지은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다. 중전 민씨 시해 사건 당시 경복궁 안 관문각에 머문 사바틴은 을미사변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훗날 인천부립도서관 건물로 쓰인 제물포 세창양행 사택을 설계한 사람도 사바틴이다. '대한제국 건축가'로 조명받고 있는 사바틴은 '대한제국 도서관 건축가'이기도 했다. 

고종은 경복궁 집옥재에 4만여 권의 장서를 가지고 있었다. 아관파천으로 경복궁을 떠나 1897년 경운궁으로 환궁하면서 집옥재 일부 장서도 수옥헌으로 옮겨 왔을 것이다. 황실 도서관 수옥헌의 책은 집옥재 장서 일부와 경운궁 환궁 이후 모은 장서였을 것이다. 

지은 지 2년 만인 1901년 11월 16일 수옥헌은 화재로 소실된다. 당시 수옥헌에는 '귀한 서책이 숱하게 있었다'고 하는데 가구와 함께 모두 불타버리고 만다. 규장각을 다시 강화하고 경복궁 집옥재에 근대 문물에 대한 책을 열정적으로 수집한 고종의 행보로 볼 때 수옥헌에도 상당한 장서가 있었을 것이다.

화재로 책과 건물이 불타버렸기 때문인지 수옥헌 장서는 규장각과 집옥재와 달리 목록이 따로 전하거나 알려진 내용이 없다. 화재 나기 전 1층 건물이던 수옥헌은 1902년 5월 이후 지하 1층, 지상 2층 벽돌조 건물로 새롭게 지어진다.

싸움 한번 해보지 못하고 체결한 을사늑약
 
을사늑약 체결 현장 중명전 1층 전시실에 재현되어 있는 을사늑약 체결 현장. 왼쪽부터 이근택(군부대신), 권중현(농상공부대신), 이지용(내부대신), 이완용(학부대신), 하야시 곤스케(일본 정부 특명 전권공사), 이토 히로부미, 박제순(외부대신), 한규설(참정대신), 민영기(탁지부대신), 이하영(법부대신) 순이다. 참정대신 한규설을 제외한 민영기와 이하영도 을사늑약 체결에 협조적이었기 때문에, ‘을사오적’이 아닌 ‘을사칠적’으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 을사늑약 체결 현장 중명전 1층 전시실에 재현되어 있는 을사늑약 체결 현장. 왼쪽부터 이근택(군부대신), 권중현(농상공부대신), 이지용(내부대신), 이완용(학부대신), 하야시 곤스케(일본 정부 특명 전권공사), 이토 히로부미, 박제순(외부대신), 한규설(참정대신), 민영기(탁지부대신), 이하영(법부대신) 순이다. 참정대신 한규설을 제외한 민영기와 이하영도 을사늑약 체결에 협조적이었기 때문에, ‘을사오적’이 아닌 ‘을사칠적’으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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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삼기 위해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다. 같은 해 7월 29일 일본 총리이자 외상 가쓰라 다로와 미국 육군장관 윌리엄 태프트는 이른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는다. 일본의 조선 지배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상호 승인한다는 내용이다. 

같은 해 8월 12일 일본과 영국은 '제2차 영일동맹'을 통해 일본의 조선 지배와 영국의 인도, 버마(미얀마) 지배를 묵인하기로 했다. 9월 25일 일본은 포츠머스에서 러시아와 강화조약을 통해 한국에 대한 지배적 권리를 보장받는다.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 러시아-일본을 중재해서 평화를 이끈 공으로 미국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1906년 노벨평화상을 받는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성사시킨 윌리엄 태프트는 루스벨트에 이어 미국의 27대 대통령이 된다. 대한제국은 '국제사회의 일원'이 아닌 '열강의 전리품'일 뿐이었다. 

서구 열강의 묵인을 얻은 일제는 1905년 11월 9일 이토 히로부미를 특사로 파견, 고종 황제와 내각 대신에게 조약 체결을 강요한다. 이토가 여러 차례 알현하며 조약 체결을 강요하자 고종은 '대신들과 의논하여 조처하라'며 뒤로 물러서고 만다. 

11월 17일 고종이 불참한 채 이토가 주재한 어전회의가 수옥헌에서 열린다. 경운궁 주위에 일본군을 배치한 이토는 내각 대신 8명에게 개별적으로 조약 체결에 대한 찬반을 물어 5명으로부터 찬성을 확인한다. 1905년 11월 18일 새벽 1시였다. 조약에 찬성한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외부대신 박제순, 학부대신 이완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은 '을사오적'이라 불리게 된다. 

을사오적으로 꼽히지 않았을 뿐 탁지부대신 민영기는 문안 수정 작업에 참여해서 결과적으로 찬성한 것이나 다름없고, 법부대신 이하영은 오래전부터 친일 행각을 했다. 궁내부대신 이재극도 고종과 이토 사이에서 조약 체결을 위해 큰 역할을 했다. 참정대신 한규설을 제외하고 대한제국 대신이 모두 일제 지배를 적극 찬동하거나 받아들인 점이 충격적이다.

고종 역시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고종 입장에서는 내각 대신에게 미룸으로써 우회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명한 것일 테지만 결과적으로 조약 체결의 길을 터준 셈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매국노를 대신으로 임명한 사람도 고종 자신 아닌가. 

전쟁이 아닌 조약 체결로 식민지 전락한 대한제국
 
을사늑약문 을사늑약은 각 나라 통수권자가 조약 체결 당사자에게 주는 ‘전권위임장’ 없이 체결되고, 고종의 어새와 비준 절차 또한 없었다. 무력과 강압에 의해 체결된 조약으로 국제법상 효력 없는 조약이었으나 일제는 대한제국을 강점했고 대한제국은 일제를 몰아낼 힘을 갖추지 못했다. 을사늑약문은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이 소장한 문서로 중명전에서 재촬영한 사진.
▲ 을사늑약문 을사늑약은 각 나라 통수권자가 조약 체결 당사자에게 주는 ‘전권위임장’ 없이 체결되고, 고종의 어새와 비준 절차 또한 없었다. 무력과 강압에 의해 체결된 조약으로 국제법상 효력 없는 조약이었으나 일제는 대한제국을 강점했고 대한제국은 일제를 몰아낼 힘을 갖추지 못했다. 을사늑약문은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이 소장한 문서로 중명전에서 재촬영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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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나 분위기가 스산하고 쓸쓸하다는 표현으로 '을씨년스럽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을사년스럽다'는 말이 '을시년스럽다'를 거쳐 변한 말이다. '을사년 망국'의 충격이 얼마나 컸으면 을씨년스럽다는 말이 널리 퍼졌을까. 

여기서 궁금한 건 한 나라가 싸움 한번 제대로 해보지 않고 조약 체결로 '속국'으로 전락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병자호란 때 청에 굴욕적인 항복을 할 때도 망하지 않은, 518년이나 이어온 조선은 어떻게 조약 체결로 식민지로 '추락'했을까. 이를 지켜본 외국인도 이상하게 느낀 모양이다. 수옥헌 근처에서 을사늑약 체결을 지켜본 미국 공사관 윌러드 스트레이트(Willard Straight) 부영사는 이런 기록을 남겼다. 

"한 나라 운명이 내가 서 있는 곳에서 50야드 안쪽에서 결정되고 1200만 명의 독립 제국이 투쟁도 없이 착취당하고 괴롭힘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 불가능하게 보였다. 하지만 (조선의) 각료들은 서명을 끝마쳤다."

*②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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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해서 책사냥꾼으로 지내다가, 종이책 출판사부터 전자책 회사까지 책동네를 기웃거리며 살았습니다. 책방과 도서관 여행을 좋아합니다.

사람사이에 조용히 부는 따스한 봄바람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아이들, 동물, 책을 좋아하는 고양이 집사입니다. 도서관 사서로 일하다가 지금은 소박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