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의>.

<빙의>. ⓒ OCN

  
OCN 수목 드라마 <빙의>에는 끔찍한 악령에 빙의된 사람들이 등장한다. 극 중 이들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악명 높은 연쇄살인범 황대두(원현준 분)의 유령에 빙의된다.
 
어우당 유몽인의 <어우야담>에는 이와 달리 좀 뜻밖의 것으로 인한 빙의가 소개돼 있다. 여우 귀신한테 빙의된 궁녀 시신의 이야기가 나온다. 빙의 문제에 관한 옛날 사람들의 상상력이 꽤 대단했음을 보여주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광해군의 측근으로 종2품(차관)을 지낸 대학자 유몽인(1559~1623년)은 시중에 전해지는 귀신 이야기들을 <어우야담>에 수록했다. 여기에 한양 부자 황건중의 귀신 빙의담이 소개돼 있다.
 
옛날 책에서 황건중 같은 부자 이야기를 접할 때 유의할 게 있다. 이런 사람들이 실제로는 상당한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했는데도, 옛날 기록에서는 한심한 사람으로 묘사되는 일이 많았다는 점이다.
 
황건중은 강원도 철원에 별장을 갖고 있었다. 1년에 절반 정도는 거기서 시간을 보냈다. 또 첩을 두고 있었다. 당시 첩을 둔 사람은 거의 다 상류층 남성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그는 건물주나 지주였다.
 
선비들은 눈에 띄는 가사노동을 하고 있거나 생업을 갖고 있거나 관직을 갖고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하루종일 성리학 책이라도 읽고 있어야 '일을 하는 사람'으로 간주했다. 황건중처럼 '부동산 관리'만 하는 사람은 선비들이 보기에 실업자나 한량이었다.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옛날 기록들은 거의 다 선비들이 남긴 것이기 때문에, 이런 책들 속에서 황건중 같은 사람은 실제와 달리 한심하게 묘사되기 쉬웠다. 황건중을 소개하는 첫 대목에서 유몽인은 "화류계를 활보"하는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황건중에 대한 부정적 선입견을 독자들에게 먼저 주입시킨 뒤 스토리를 전개했던 것이다.
 
황건중이 대화 나눈 여성, 알고 보니 귀신?
 
 OCN 드라마 <빙의> 한 장면.

OCN 드라마 <빙의> 한 장면. ⓒ OCN

 
황건중이 철원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 그날 밤은 혼자 잠을 자고 있었다. 갑자기 낯선 여성이 방안에 불쑥 들어왔다. 여성의 외모에 끌린 그는 누군지 묻지도 않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마음이 헷갈려 안정을 하지 못하고, 욕망을 억제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어우야담>은 말한다. '일이 없는 사람'들을 폄하하는 선비들의 인식이 이런 문장에서도 드러난다. 잠시 뒤 느끼게 되겠지만, 황건중은 그렇게까지 억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여성과 대화를 나누면서 살펴보니, 옷차림이 특이했다. 칡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귀신이 맞다는 생각에 그때부터 황건중은 멀리하기 시작했다. "여자가 교태 있고 부드러운 말로 온갖 아양을 떨며 밤이 다하도록 나가려 하지 않았지만" 황건중은 경계 모드를 유지했다. 결국 새벽녘에 여성을 돌려보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여성은 다음날 밤중에 또다시 불쑥 들어왔다. 매일 밤 그렇게 했다. 아내나 첩이 함께 있을 때도 개의치 않았다. 황건중은 노이로제가 걸릴 정도였다.
 
드라마 <빙의> 속의 강필성 형사(송새벽 분)도 영매 기질을 가진 홍서정(고준희 분)과 접촉한 뒤로 자기 방에서 낯선 귀신들을 보게 된다. 인간과 혼령을 매개하는 능력을 가진 홍서정 때문에 강필성의 눈에도 귀신이 보이게 된 것이다.
 
강필성 역시 노이로제가 걸렸다. 그래서 방울을 시끄럽게 울려대는 등의 방법으로 귀신들을 쫓아보려 애썼다. 하지만 결국 포기하고 제사상까지 차려준다. 혼자 사는 원룸 한쪽에 밥상 하나를 놓아둔 것이다.
 
 <빙의>.

<빙의>. ⓒ OCN

  
강필성과 달리 황건중은 저항력이 대단했다. 도사와 무당까지 불러 여성을 내쫓고자 했다. 그러자 여성이 화를 벌컥 냈다. "저는 당신을 괴롭히려는 게 아닙니다"라면서 "돌아가신 당신 조상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저승에서나마 덕을 갚고자 하는 겁니다"라고 항변했다. 황건중이 무슨 말이냐고 묻자, 이렇게 답했다.
 
"저는 궁예가 철원에 있을 당시의 궁녀였는데, 태봉(후고구려)이 망할 때 전투 중에 죽었습니다. 당신의 조상인 황계윤께서 저를 서도산 밖 몇 리 되는 곳에 묻어주셨는데, 그때 날씨가 더워서 칡베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옛 옷을 입고 있는 겁니다. 제발 의심하지 마십시오."
 
왕건이 쿠데타를 일으켜 궁예를 몰아낸 때가 918년이다. 귀신의 말처럼 쿠데타를 일으킨 시점이 실제로 더운 여름이었다. 음력으로 6월 16일, 양력으로 7월 26일이었다. <어우야담> 속의 이 이야기는,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대략 1500년대 이야기로 추정된다. 이 당시 귀신은 사후 600년 정도 됐던 것이다.
 
귀신이 조상과의 인연까지 들먹이며 받아달라고 했지만, 황건중은 그래도 싫었다. 철원에서는 도저히 벗어날 길이 없겠다고 판단한 그는 짐을 싸서 한양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귀신도 함께 상경했다. 한양에서도 귀신은 "저를 받아주세요"라며 매일 같이 못살게 굴었다.
 
마침내 귀신 쫓아냈지만... 떠나기 전 남긴 의문의 말
 
 OCN 드라마 <빙의> 한 장면.

OCN 드라마 <빙의> 한 장면. ⓒ OCN

 
황건중의 고민을 들은 집안 사람들이 아이디어를 냈다. 개 목에 방울을 달아두자는 것이었다. 그 소리로 귀신을 내쫓자는 제안이었다. <빙의> 속의 강필성은 방 안에 방울을 달아두기는 했지만, 반려견을 두지는 않았다. 황건중은 시키는 대로 했고, 2개월 뒤 효험을 보게 됐다. 여성이 더는 못 있겠다며 하직인사를 하게 된 것이다.
 
한동안 괴롭긴 했지만, 그래도 자기 좋다고 따라다닌 귀신이었다. 미운 정이나마 정이 들었는지 황필성은 미안한 마음을 표하면서, 가는 길에 내년 운명이나 들려달라고 부탁했다. 귀신은 다섯 글자를 써주었다.
 
"金鷄屋上樑(금계옥상량)"
 
'황금 닭이 집 대들보 위에'라는 글자였다. 귀신은 무슨 뜻인지 알려주지 않고 떠났다. 황건중은 그 의미가 무척 궁금했다. 집안 사람 누구도 뜻을 풀지 못했다. 갑자기 나타나 못 살게 굴던 귀신이 지독한 궁금증마저 남기고 사라졌던 것이다.
 
그 의미는 이듬해에 풀렸다. 황건중은 불량배들과 어울려 동네를 헤집고 다니다가 법률에 저촉돼 감옥에 들어가게 됐다. 웬만하면 감옥에 들어가지 않을 수 있었을 경제적 지위를 감안하면, 꽤나 불량하게 놀았던 모양이다.
 
그때 그가 갇힌 감방의 대들보 위에 누런 닭 한 마리가 있었다. 기둥과 기둥을 가로지르는 대들보 위에 황금 닭이 있었던 것이다. 죄수들이 시계 대용으로 키우는 닭이었다. 그때서야 황건중은 '금계옥상량'의 의미를 이해하게 됐다. 그가 감옥에 가게 될 거란 예언이었던 것이다.
  
 OCN 드라마 <빙의> 한 장면.

OCN 드라마 <빙의> 한 장면. ⓒ OCN

 
여기까지 스토리를 소개한 뒤, 유몽인은 끝부분에 자기 의견을 달았다. 시중에 도는 스토리에 자기 의견을 첨부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귀신의 정체에 대해 유몽인은 이렇게 해석했다.
 
"여자는 여우의 혼령이기 때문에 개를 두려워했던 것이다. 아마도 들여우가 궁녀의 무덤에 들어가 귀신의 빌미를 만들었기에 궁예 때 일을 알게 됐을 것이다."
 
후삼국 시대를 살다가 죽은 여우의 혼령이 후고구려 궁녀의 시신에 빙의된 채 자기 시대까지 이승을 헤매고 있었으리라는 추측을 단 것이다. 추측을 다는 형식으로 기존 스토리를 리메이크한 셈이다. 유몽인은 대학자로 유명했으니, 그의 해석이 당대 사람들한테 상당한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만약 황건중이 관료였거나 선비였다면, 유몽인이 그런 해석을 달지 못했을 수도 있다. 황건중 같은 사람을 할 일 없는 한량으로 무시했기에, 여우 귀신한테 홀렸다가 간신히 벗어나더니 여우 귀신의 예언대로 감옥살이를 하게 된 한심한 건달로 묘사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대학자 유몽인의 리메이크에 의해, 황건중은 화류계를 지나치게 좋아하더니 결국 궁녀 시신에 빙의된 여우 귀신의 유혹까지 받게 된 딱한 남자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됐다.
빙의 황건중 여우귀신 유몽인 어우야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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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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