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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 염농산의 '제언공덕비'는 용암의 한 농민이 자기 집 옆에 공덕비가 있다고 제보하면서 알려졌다.
 앵무 염농산의 "제언공덕비"는 용암의 한 농민이 자기 집 옆에 공덕비가 있다고 제보하면서 알려졌다.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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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오랜만에 '동 영부인(同令夫人)'하여 봄나들이를 나서는데, 어딜 가느냐고 아내가 물었다. 굳이 답을 구하는 물음은 아니었지만 나는 '앵무'를 찾으러 '성주'로 간다고만 말해 두었다. 아내는 "앵무? 앵무새가 성주에?" 하더니만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답을 들어도 시원찮으리라는 걸 눈치챈 것일까. 

앵무를 찾아서

앵무는 성주에 있다. 그것도 성주군 용암면 용정리에 오래된 빗돌로 남았다. 앵무를 알게 된 두어 해 전인데 이제야 길을 나서게 된 것은 마음과 달리 몸이 굼떠서다. 앵무가 성주 용암에 빗돌로 남은 것은 그가 용암들에다 제방을 쌓은 공덕을 사람들이 기린 덕분이다.   
 
"기생이었다고? 기생이 거기다 방천(防川)을 쌓았다고? 돈이 많았던 모양이지?"
"국채보상운동에도 힘을 보태고, 폐교될 지경이 된 교남학교에도 거금을 희사해 살린 이래."

눈치챘듯이 앵무(鸚鵡)는 달성권번(券番)의 초대 회장이었던 염농산(廉嚨山, 1859~1946)의 기명이다. 본명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고 앵무와 마찬가지로 '농산(隴山)'도 예명으로 쓰인 듯하다. 농산은 중국 산시성(陝西省)에 있는 앵무새가 많이 나는 산이라 한다. 

앵무는 1907년에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함으로써 우리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대구에서 서상돈(1851~1913)이 주도한 국채보상운동은 당시 대한제국의 국채(國債) 1300만 환을 2천만 국민이 석 달 동안 흡연하지 않고 담뱃값 20전씩을 거두어 갚자는 것이었다.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은 유네스코 기록문화유산이 되었다.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은 유네스코 기록문화유산이 되었다.
ⓒ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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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연간 국가 예산의 두 배에 가까운 국채가 대한제국의 존망을 위협하자, 시작된 이 운동은 유생과 상인뿐 아니라 농민과 부녀자 등 각계각층이 참여하는 범국민운동으로 발전하였다. 대구에서 모금이 전개되자 가장 먼저 지화(紙貨) 100환을 기부한 앵무는 이렇게 일갈했다.
 
"금번 의금(義金)에, 힘에 따라 내는 것이 국민의 의미이거늘 여자로서 감히 남자보다 한 푼이라도 더 낼 수가 없으니 누구든지 1천 원을 출연하면 죽기를 무릅쓰고 따라 한다."

이에 감동한 서상돈, 김병순, 정재학 등이 각기 기만 원씩 출연하기로 결의하면서 국채보상운동은 힘을 받기 시작했다. 대구 기생 앵무가 100환(당시 쌀 한 말이 1환 80전)을 쾌척했다는 소식은 운동을 삽시간에 부녀자와 하층민중에게까지 확산하였다.

이에 자극받은 대구 남일동의 부인들은 '경고(警告), 아부인동포(我婦人同胞)라'는 제목의 격문을 발표하여 근대적 여성의식을 드러냈다. [김중순, 근대화의 담지자로서의 기생Ⅰ(<한국학논집> 제43집, 2011) 참고. 이하 같음.]
……여자가 남자 하는 일에 간섭할 것은 아니나,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일에 남녀의 차별이 있을 수 없는 것인데 어째서 남자들의 참여 방법만 제시하고 여자의 참여에 대해서 논하지 않았는가. 여자는 국민이 아니며 임금의 자녀가 아니란 말인가.

  - <대한매일신보>(1907. 3. 12.)

국채보상운동에 거금 1백환 쾌척, 기생들도 동참

운동은 고종이 단연에 참여하겠다고 발표하자 대신들이 동참하면서 고조되었는데, 일반 백성들이 운동의 주역으로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북촌의 인력거꾼들도 담배를 끊을 것을 결의하고, 대구에서는 걸인들까지 의연금을 내기에 이를 정도였다. 

반찬 수를 줄여 빚을 갚자는 뜻으로 부인감찬회(婦人減餐會), 금반지 등 패물을 팔아 빚을 갚자는 뜻으로 패물폐지부인회(佩物廢止婦人會)를 조직하기도 하는 등 여성들의 참여도 이어졌다. 대구단연상채회 사무소를 통해 <대한매일신보>에 들어온 부인 의연(義捐)자 수는 227명으로 진주 애국부인회에 이어 전국에서 두 번째로 많았다. 
 
일제 강점기 관기 복장의 기생을 담은 그림엽서. 이들도 국채보상운동에 기꺼이 참여했다.
 일제 강점기 관기 복장의 기생을 담은 그림엽서. 이들도 국채보상운동에 기꺼이 참여했다.
ⓒ <말하는 꽃> 기생 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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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가 의연금을 낸 뒤 대구 권번의 기생 14명도 적게는 50전에서 많게는 10원까지 모금에 참여했다. 이에 평양의 주희(酒姬) 31명은 "우리가 비록 천업(賤業)을 하고 있지만, 백성 된 의무에 신분 고하가 다를 수 없다"며 성금 32원을, 또 다른 평양기생 18명도 50전씩 내어 모금에 동참했다. 

대구뿐 아니라 경남, 황해, 평안, 함경지역에 이르기까지 여성들의 참여는 전국적이었다.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 등 4개 신문에 실린 국채보상 의연자 명단에서 여성은 모두 1821명이었는데 그중 양반과 유지 부인층이 63%, 기생과 주희 등이 무려 21.8%에 달할 정도였다. 

노비, 백정과 함께 '팔천(八賤)'으로 불린 기생은 사실상 국가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 천민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처하자, 스스로 백성의 일원으로 자임하며 쌈짓돈을 털었다. 그것은 더디게 진행되던 개화와 함께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는 일종의 인간선언이기도 했다.

나라의 위기에 여성들이 힘을 모은 사례는 있지만 '여성이 국민이 된 권리와 의무를 내세우면서 독립된 참여와 활동'은 국채보상운동에서 처음이었다. 망국의 위기에 처하면서 마침내 여성들이 남녀동등의 권리를 인식한 것이었다. 나라를 살리고자 한 모금운동을 통하여 바야흐로 여성들의 근대적 각성이 분출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거금 100환을 서슴없이 낼 만큼 당시 앵무는 재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마흔여덟 살의 앵무는 당시 기계(妓界)에서 나름의 지위를 굳히고 있었던 듯하다. 그는 12년 후에 성주 용암들에 큰돈을 들여 제방을 쌓았고, 1938년에는 교남학교에 2만 원 상당의 토지를 희사했다.  

1895년 감영제(監營制)가 사라져 관기(官妓) 제도가 무너지면서 급격한 변화에 내몰린 기생들은 기생조합의 설립으로 대응했다. 관기 정염이 대구기생조합을 세운 것은 1910년 5월이었다. 1914년 일제는 이를 일본식 이름인 '권번(券番)'으로 바꾸게 했다. 

달성권번 초대회장 염농산

소속 기생이 32명으로 경성을 제외한 지역 기생조직으로서는 수원 다음으로 큰 조직이었던 대구기생조합이 '대구권번'으로 이름을 바꾼 것은 1920년대 초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927년 1월에 자본금 1만2천 원으로, 기생의 화대 취입 지불 금융합작회사인, 대구권번의 전통을 이어받은 달성권번을 설립한 이가 염농산이었다.

염농산이 다시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1919년 5월이다. 바로 우리가 찾아가는 용정리 용암파출소 옆에 세운 '염농산 제언 공덕비(廉隴山堤堰功德碑)'라는 빗돌에서다. <성주군지(星州郡誌)>(1996)에 따르면  성주 용암에는 매년 큰 물난리가 나서 마을이 피폐했는데, 염농산이 나서서 속칭 '두리 방천'을 쌓았고, 마을 사람들이 이를 기려 이 빗돌을 세운 것이라 한다. 

내비게이션을 따라 성주 용암면 용정리에 닿은 것은 정오가 겨워서였다. 용정2리를 먼저 찾아 경로당 노인께 여쭈니 아무도 빗돌 따위는 모르고 있었다. 인터넷 기사로 용암목욕탕 앞이라는 걸 확인하고 가보니, 양옥 옆에 담을 세워 따로 만든 공간에 비석은 갇힌 듯 서 있었다.
 
앵무가 물난리에 시달리는 마을을 위해 제방을 쌓아주자 마을 사람들은 공덕비를 세워 그를 기렸다.
 앵무가 물난리에 시달리는 마을을 위해 제방을 쌓아주자 마을 사람들은 공덕비를 세워 그를 기렸다.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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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 용암들이 '앵무들'로 불린 까닭

정작, 이 비석이 세상에 드러난 것은 용암의 한 농민이 자기 집 옆에 '앵무비'가 있다고 제보하면서다. 용정 2리의 노인들이 빗돌의 존재를 몰랐던 것처럼 현지에서 앵무는 오래 잊힌 존재였던 듯하다. 마을 사람들이 빗돌을 세워 공덕을 기리고서도 그가 잊힌 세월의 곡절은 알 수 없다. 

왜 앵무가 용암들에 거금을 들여 제방을 쌓아 주었는지, 앵무와 현지는 어떤 연고가 있는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어쨌든 제방이 완공된 날 앵무는 학춤을 추었다 하고, 사람들은 들판을 '앵무들'이라 부르며 빗돌을 세웠다는 것이다. 
  
빗돌 앞면에는 '염농산 제언 공덕비'라 씌어 있고, 양옆으로 그를 칭송하는 글귀가 가지런했다.
 
石强扵弩 溪澗爲東  
里落故按 阡陌仍成  
魚龍古窟 禾稼登塲  

國計民有 幷被其功  
汝不吾信 視此林隴  
十蕢山積 俾也可忘  

돌이 쇠뇌에서 힘을 쓰니 개울물 불어 낙동수가 되고
물고기들의 묵은 늪에서 오곡이 용처럼 하늘로 치솟네. 
나라의 정책이 백성에 있으니 아울러 입었도다. 

그 공덕을 모두가 믿지를 못한다면 이를 보라. 
숲 진 농산의 방천을 여러 사람 한 삼태기씩 흙으로 산을 쌓았으니 
모두가 가히 잊으리로다.

 - <성주군지(星州郡誌>(1996)

<성주군지>에서는 염농산의 출생연도를 1889년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1938년 5월 24일 자 <동아일보> 기사에서는 염농산 여사가 일흔아홉의 고령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염농산이 폐교 위기에 처한 교남(嶠南)학교에 2만 원어치 부동산을 희사한 사실을 다룬 "고조되는 교육열"이라는 기사에서다. 

 
염농산이 교남학교에 2만 원 상당을 희사하자 이를 기리고 있는 당시 신문기사. <조선민보>(1937.4.27).
 염농산이 교남학교에 2만 원 상당을 희사하자 이를 기리고 있는 당시 신문기사. <조선민보>(1937.4.27).
ⓒ 조선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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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년생이라면 앵무가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한 것은 불과 열여덟 살 때고, 성주에 두리방천을 쌓은 것도 스물아홉 살 때다. 그러나 교남학교에 거금을 낼 때 염농산이 일흔아홉이었다는 신문 기사는 동명이인이 아닌 이상, 그가 1859년생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고 추론할 수 있다. 

생몰연대에 관한 논의는 여지가 있겠지만, 그가 어쨌든 기생으로 이룬 재산을 국채보상운동에 출연(出捐)하고, 물난리로 시달리는 시골에 제방을 쌓고 사립 교육에 거금을 희사하는 등 값지게 썼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것은 같은 기사의 한 구절로도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염농산 여사, 이렇게 대구의 사립 교육에 여자의 독지가는 뒤를 이어 나오는데 남자의 그것에는 기막히는 대조를 보이는 것이다."

앵무는 기생이었으나 '대구 근대화의 담지자'였다

이는 논문 "근대화의 담지자로서의 기생Ⅰ"을 쓴 김중순(계명대) 교수가 앵무를 가리켜 "당시의 여성으로서 극복하기 어려운 남녀평등의 가치 실현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던 기생 출신의 대구 근대화의 담지자(擔持者)였음에 틀림없다"라고 평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금 마을 사람들은 그의 존재도 잘 모르고, 더는 용암들을 '앵무들'이라고 부르지도 않는다. 그는 어떻게 지역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졌을까. 그가 쌓았다는 제방의 존재도 사람들의 기억에서 멀어진 것은 기생 출신이라는 그의 신분 때문이었을까.

사진을 찍고 나와 화장실을 이용하러 바로 옆, 파출소에 들렀을 때 경찰관들은 앵무는커녕 비석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다. 불과 한 세기 이전의 역사지만, 인간이 기억하는 역사의 깊이와 부피는 기실 하찮기 짝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인근의 용암농협 슈퍼에 들러 음료수 깡통 하나씩을 사 들고 앵무의 빗돌이 환기해 준 한 세기 전의 역사를 떠나 수륜면의 회연서원(檜淵書院)을 향해 다시 출발했다. 

태그:#염농산제언공덕비, #성주군 용암면, #대구 기생 앵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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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이 넘어 입문한 <오마이뉴스> 뉴스 게릴라로 16년, 그 자취로 이미 절판된 단행본 <부역자들, 친일문인의 민낯>(인문서원)이 남았다. 몸과 마음의 부조화로 이어지는 노화의 길목에서 젖어 오는 투명한 슬픔으로 자신의 남루한 생애, 그 심연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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