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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떠나겠단 건 다시 돌아오겠단 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굳이 여행까지 가서 글을 쓰겠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이 여행기의 의미는 어느 졸업예정자, 취준생, 여자, 집순이, '혼행러', 그리고 채식주의자가 먹방부터 감성까지 여행에서의 모든 것을 꾹꾹 눌러 담아 돌아오겠단 거창한 선언에 있다. - 기자말

스리랑카 여행을 통해 느낄 수 있었던 것 중 하난, 여행객을 향한 현지인들의 따뜻한 시선이었다. 하지만 명백한 대가가 있는 조건부 호의도 분명 있었다. 그 대가는 '여성'이라는 성(sex)이었다. 

"결혼은 했냐"고 묻기 시작하면 무조건 의심하기

고산지대 '누와라 엘리야'로 가는 길, 기차역에서 내려 툭툭(tuk tuk, 스리랑카 택시)을 타고 숙소에 가기로 했다. 고산지대의 바람을 맞으며 가던 중, 툭툭 기사가 내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스리랑카에 온 지는 얼마나 됐는지 등 여행자를 향한 흔한 질문이었다.

웃으며 답을 하던 중, 대화가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몇 살이냐', '결혼은 했냐' 등의 질문부터 '너무 예쁘다', '아름답다' 따위의 칭찬이 이어지는 것이었다. 뭔가 불편해져 대화를 그만두려 하자 그는 돌연 페이스북 친구를 하자며 휴대폰을 들이밀었다.

내가 다음 날 가기로 한 곳을 듣곤 자신의 차를 이용하면 싸게 해주겠다며 번호까지 받아 간 그는 숙소에 다 와 내릴 때가 되자 "only you", 즉 다른 사람은 안 되고 나만 그 가격에 해주겠다고 단호히 말했다. 아무리 싼 가격이라도 그룹으로 하면 더 싸기에 나만이라면 이용할 이유가 없었다. 아무래도 이상했다.

호스텔에 내려서 바로 번호를 지우려는 찰나, 전화가 왔다. 너무 놀라 휴대폰을 떨어뜨렸다. 무시하자 계속해서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받으니 숙소에 잘 들어갔냐는 것이었다. 이후부턴 문자와 페이스북 메시지로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어디에 있냐', '너 같은 사람을 못 봤다' 등의 연락이었다.
 
스리랑카에서 만난 운전기사에게서 온 SNS 메시지
 스리랑카에서 만난 운전기사에게서 온 SNS 메시지
ⓒ 조윤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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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름이 끼쳤지만 내가 삼일 동안 묵을 숙소의 위치까지 다 알고 있는 사람이니 혹시 함부로 말했다간 찾아와 해코지를 할까 무서워 좋게 하지 말라고 답을 했다. 그러자 그는 며칠 후 돌연 내게 "bad girl"이라 말을 하다가 하트 이모티콘을 함께 보냈고, "bad girl"에 화가 난 내가 단호히 말하자 "fucking girl"이라며 욕을 내뱉었다. 

스리랑카 여행 12일 차, 나는 먼저 꼬리쳐 놓고 사람 무시하는 '썅년'이 됐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내가 한 것이라곤 웃으며 대화를 한 것이 '전부'다. 아니, 이렇게 "나는 아무런 오해살 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어요"라고 어필하지 않아도, 설령 내가 그에게 호감을 표시했다 하더라도 이런 거절의 의사 표시에 "썅년"이란 말을 들어야 할 이유는 없다. 
 
연락을 하지 말라고 하자 돌연 화를 낸다
 연락을 하지 말라고 하자 돌연 화를 낸다
ⓒ 조윤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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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함부로' 웃지 않기로 했다

이것은 비단 그 운전 기사 한 명만의 일이 아니다. 툭툭을 탈 때마다 세 번에 한 번 꼴로 남성들은 온갖 그럴듯한 이유를 들며 내게 페이스북 계정이나 번호를 물었고, 결혼했다고 하자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런데 왜 혼자 왔냐", "남편은 뭐 하는 사람이냐" 등을 꼬치꼬치 묻는 사람도 있었다.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마트 계산원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남성인 스리랑카에서, 나는 이제 길을 걸을 땐 모자를 푹 눌러 쓰고, 최대한 굳은 표정으로 다니기 시작했다. 남성들의 호의는 모두 무시했고, 내 무시에 어떤 이는 기분 나쁘단 표정을 짓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기로 했다. "그냥 도와주려고 한 건데 진짜 예민하게 구네"라는 반응이 차라리 낫기 때문이다. 웃지도, 말을 하지도, 쳐다보지도 않는 내 모습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쌍년"이란 말을 들은 것이 너무 분하고 억울해서 나도 모르게 한국어로 욕을 했지만, 그는 다시 내게 하트 이모티콘을 보냈다. 나와 10분 대화한 그는 마치 나와 사귄 지 100일은 된 사람 같았다.

내 탓이 아니란 걸 알지만 꼭 내가 '함부로' 웃어서 이런 일을 당한 것만 같아 화가 났다. 그의 계정과 번호를 차단한 후, 나는 이제 연습을 시작했다.

"sns는 없고, 유심 없어서 번호도 없어요. 결혼했고, 남편은 변호사고, 일 때문에 저만 왔어요."

스리랑카는 꼭 다시 오고 싶을 만큼 너무나도 좋고, 혼자 여행하는 것도 너무 즐겁다. 하지만 나는 문득 내가 남성이 아닌 것이 슬퍼졌다.

태그:#스리랑카, #여행, #여성, #여성여행자, #여자혼행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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