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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사로운 봄이 온다. 춥고 어두운 밤 길었던 겨울 속에서 얼마나 기다렸던 봄인가.
100년 전 대한민국 국민은 스스로 나라의 봄을 되찾았다. 그리고 지금, 수많은 희생의 역사를 딛고 바로잡은 새로운 봄을 맞이하려 한다.

'역사를 바로 세우자'는 취지의 연구모임인 천안역사문화연구회는 역사적인 길을 발굴해 올해부터 매월 걷는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동학3.1'혁명'의 길(아래 동학혁명길)과 '민촌 고향길'이다. 특히 동학혁명길은 천안이 독립운동의 발상지 역할을 했던 것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의 잠재적 근간이었던 동학농민운동에서 천안이 주요격전지임을 알려주는 역사적인 길이다.

매월 한 번씩 역사의 현장과 만나 
 
 동학혁명길을 오르는 참가자들. 세성산 초입이다.
▲ 동학혁명길  동학혁명길을 오르는 참가자들. 세성산 초입이다.
ⓒ 노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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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길은 매월 첫째 토요일에 걷는다. 지난달 2일 오전 9시. 약 30여 명이 동학혁명길을 걷고자 천안시 동남구 성남면 선진정공 앞 여우고개에 모였다. 여우고개에서 세성산으로 잠시 올라가자 너른 분지가 보였다.

이 자리에서 송길룡 천안역사문화연구회 연구실장은 "이 장소는 당시 1500~3000명으로 추산하는 동학혁명군이 주둔해 군사훈련을 했던 곳"이라며 "언덕 위에 새하얗게 깃발을 꽂아 관군이 혁명군의 위세를 느끼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분지 쪽은 세성산 능선이 병풍처럼 빙 둘러쌌지만, 능선 너머는 급격한 절벽을 이루고 있어 천연의 요새 같은 지형이었다.

이용길 천안역사문화연구회장은 "신동엽 시인의 '금강'이라는 대서사시에 이곳 전투를 그린 대목이 있다. 얼마나 감동적으로 묘사했는지 마치 혁명군의 함성이 들리는 듯한 시"라며 벅찬 감정을 전달했다. 참가자들은 모두 함께 느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바꿀 수밖에 없는 농민들의 항쟁이 귓가에 선연히 울렸다.

아우내를 한눈에 바라보는 세성산 
 
세상산 능선 위에서 북쪽을 바라본 보습. 멀리 세성산으로 옮겨오기 전 동학농민운동 작전지였던 작성산이 보이고 바로 아래 병천천이 흐른다. 탐방 당일은 미세먼지로 하늘이 뿌옇게 흐렸다.
▲ 병천천.  세상산 능선 위에서 북쪽을 바라본 보습. 멀리 세성산으로 옮겨오기 전 동학농민운동 작전지였던 작성산이 보이고 바로 아래 병천천이 흐른다. 탐방 당일은 미세먼지로 하늘이 뿌옇게 흐렸다.
ⓒ 노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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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고 굽이치는 세성산 능선을 따라 걸으니 금세 정상의 장군바위다. 산 아래를 굽어보니 산방천과 병천천이 만나 아우른 병천천이 보인다. 이곳의 지명이 아우내인 이유다. 이 병천천이 미우천과 만나면 금강을 따라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장군바위 앞 '천안 세성산성'이라는 표지석엔 동학혁명 이야기가 단 한 줄의 문장으로 기술돼 있었다. 세상산이 천안 최대 동학 격전지였고 이곳이 얼마나 역사적인 곳인지 제대로 된 설명은 찾을 수 없었다.

이용길 회장은 "예전에는 천안시가 '일본군의 협조를 받아 동학군을 몰살한 장소'라고 써놨었다. 분노한 시민들 200여 명이 제사 지내러 와서는 부숴버린 후 다시 세운 이 표지석도 설명이 충분치 않다. 어마어마한 사건이 일어난 곳을 천안시와 충남이 은폐한 것이나 다름없다"며 안타까워했다.

능선을 내려와 '갑오농민전쟁 세성산 전투 희생자 위령비'에 들러 묵념했다. 370여 명이 죽고 700여 명이 다쳐 희생이 컸던 전투 끝에는 농민의 이름으로 투쟁했던 이들을 위한 위령비 하나만 지키고 있었다.

이어 진곡사를 지나 세성교를 건너 병천천을 따라 걸었다. 길은 차분했고 평화로웠다. 송영배 천안역사문화연구회 사무국장은 "천안의 섬진강"이라며 병천천의 고즈넉한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김구응과 최정철 독립 열사 이야기 널리 알려야 
 
일제에 항거하다 모자가 한꺼번에 목숨을 잃었다. 최근 들어 김구응 열사의 행적이 다시 조명받기 시작했다.
▲ 김구응 열사와 최정철 열사의 묘 일제에 항거하다 모자가 한꺼번에 목숨을 잃었다. 최근 들어 김구응 열사의 행적이 다시 조명받기 시작했다.
ⓒ 노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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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 없이 걸어 시장기가 느껴질 무렵 드디어 김구응 열사와 최정철 열사의 묘에 도착했다.

송길룡 실장의 설명에 따르면 아우내장터에서 4월 1일 일제히 만세를 부른 만세운동은 헌병들의 무력진압으로 학살 규모가 컸다. 당일 19명이 총칼을 맞고 목숨을 잃었다. 11명의 무명 희생자는 헌병들이 돌려주지 않아 신원조차 알 수 없었다. 다행히 박은식 선생의 독립운동 기록사에 잘 정리돼 있어 이러한 내용을 알 수 있었다.

가장 앞자리에서 만세 시위를 했던 김구응은 두개골에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이 사실을 전해 들은 어머니 최정철 여사는 "정당한 일을 하는데 왜 총까지 쏘냐"고 항의하다 총검에 찔려 죽었다. 어머니와 아들이 한꺼번에 죽임을 당했다.

이용길 회장은 "얼마나 처절한 이야기인가. 김구응 열사와 최정철 열사는 '한국의 피에타'라 불릴 만하다"고 우러렀다.

송 실장은 "미국에서 발행한 신한민보에도 당시 김구응 열사 이야기 중심으로 아우내 만세운동을 소개한 기사가 나왔다"며 "해방 후 유관순이 전면 등장하며 완전히 아우내 이야기가 옮겨졌다"고 설명했다.

김구응은 당시 32세로 병천 일대에서 교사로 근무했다. 유관순 열사와 인연 깊은 매봉교회에서도, 병천 성공회 교회 학교에서도 교사를 맡아 교육 활동을 오래 했다. 사실상 아우내 만세운동 지도자로 활동한 셈이다.

김구응 열사 이야기는 많이 가려져 있었다. 사람들은 알지 못했던 역사와의 조우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모자 열사의 묘를 참배하고 나오는 길에 김구응 집안의 후손인 김민응씨를 만났다. 김민응씨는 모자의 죽음으로 김구응 열사 집안이 풍비박산이 난 이야기와 일제에 항거하기 위해 마을에서 씨름을 시작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일제 강점기부터 시작한 씨름은 70회를 이어오다 구제역 때문에 멈춘 상태다. 리 단위로는 가장 오래되고 전통 있는 씨름대회로 천안시가 보조금을 지원했던 전통마을문화였다.

또 김민응씨는 독립운동을 하다 변절해서 지역 면장으로 살던 마을 유지가 김구응 열사보다 더 독립유공자로 추대받았던 이야기도 해주었다. 일제에 끝까지 항거한 열사들의 집안은 몰락해 후손들이 영광을 누리기는커녕 더 어렵게 살고 있는 현실과 매우 비교되는 이야기였다. 가슴 아픈 현실에 미안함이 밀려왔다.

옥중에서도 일제에 항거한 유관순 
 
순국자 이름을 새긴 추모각 앞에서 송길룡 실장의 해설을 듣는 모습( 등을 보인 이가 송길룔 실장)
▲ 순국자 추모각에서 순국자 이름을 새긴 추모각 앞에서 송길룡 실장의 해설을 듣는 모습( 등을 보인 이가 송길룔 실장)
ⓒ 노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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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마친 일행은 유관순 열사 사당에 참배했다. 순국자 명단을 새긴 순국자 추모각 앞에서 독립 열사들의 예우에 대한 성토가 이어졌다. 송길룡 실장은 "유관순 열사가 훌륭한 건 만세운동보다도 감옥에서 참혹한 인권유린과 모진 고문을 견뎌낸, 10대 소녀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저항정신"이라고 말했다.

어린 소녀가 견딘 모진 고문은 차마 말하기 어려울 만큼 지독했다. 그 같은 고문이라면 무릎 꿇을 법도 하지만 유관순은 끝까지 저항했던 것이다.

매봉산에 오르며 송 실장은 또 자신이 찾아낸 유관순 관련 숨은 이야기를 재미나게 해주었다. 송 실장은 "매봉산의 중요한 실제 유적은 아우내 만세운동을 위해 사용한 봉화대 흔적"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현장을 보고 현장에서 듣는 역사해설은 더 기억에 남는다.
 
유관순을 모신 사당에서 참배하고 해설을 듣는 참가자들
▲ 유관순 열사 사당 참배 유관순을 모신 사당에서 참배하고 해설을 듣는 참가자들
ⓒ 노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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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혁명길을 걸은 한 참가자는 "이런 길은 처음 걷는다. 와보길 참 잘했다. 걷는 길도 예쁘고 알게 된 것도 많다. 다음에 또 걷고 싶다"고 말했다.

마을로 내려와 구미산에 있는 3.1혁명 기념비에 들른 후 3.1만세공원에 당도했다. 독립 열사들을 동상으로 제작한 만세공원에서 송 실장은 친일 작가들의 작품에 관해 설명했다. 참가자들은 독립 열사들의 동상마저도 친일 작가들의 손길이 묻어있다는 사실에 매우 안타까워했다.

3월 2일에 혁명길 탐방에 참여한 김경숙씨는 "전반적으로 세성산이 동학혁명격전지였음에도 제대로 된 표지판이 없고 관광 안내 수준이어서 아쉬웠다. 만세공원의 동상들이 친일 작가들의 작품이었다는 것이 놀라웠고 친일파를 미화시킨 동상도 보여 안타까웠다"고 소회를 밝혔다. 또 "천안역사문화연구회가 준비한 길을 다 걸어보고 싶다"며 "산악회 갈 생각이 있다면 이왕 걷는 거 뜻깊은 역사길을 걸어보는 것을 추천한다"고 말했다.

이용길 회장은 "앞으로도 지속해서 혁명길을 걸으며 천안이 동학혁명의 중요한 격전지였음을 세상에 알릴 것이다. 천안지역 동학운동 세성산 전투를 역사적으로 복원하고 재평가해야 하며 동학과 3.1혁명의 역학 관계를 규명해야 한다. 앞으로 아우내 4.1혁명의 역사적 배경, 인물, 조직, 사건 전개 등을 입체적으로 규명하고 균형 있게 평가하는 작업을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동학3.1'혁명'길 코스]

여우고개 -> 세성산 장군바위-> 희생자 위령비 -> 진곡사-> 세성교-> 김구응 열사 유택-> 유관순 열사 사당 -> 매봉산 -> 3.1혁명 기념비 ->성공회 병천교회 ->3.1만세공원.

동학3.1'혁명'길 코스는 세성산 동학농민혁명 격전지에서 아우내 3.1운동 발상지까지 걷는 길이다. 약 10Km로 1894년 동학혁명부터 1919년 3.1운동까지 큰 역사의 물줄기를 잇는 역사탐방코스다. 매월 첫째 토요일에 걷는다.

함께하는 전문가의 해박한 역사 지식과 설명은 가려진 우리 역사를 인식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우리 민족 항거의 사적지를 실제로 돌아보며 느끼는 감흥은 역사 문외한이라 할지라도 충분히 전달될 것으로 보인다. 탐방에만 약 4시간 정도 소요.

문의 : 041-570-0034 / 1522-3360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내용을 줄여 천안아산신문에도 올라갑니다.


태그:#동학농민혁명길, #3.1만세운동, #동학과 독립운동, #세성산 전투, #아우내만세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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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과 천안 아산을 중심으로 한 지역소식 교육 문화 생활 소식 등을 전합니다. 지금은 출판 분야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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