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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 87>(내인생의 책 펴냄)은 '0%보다 조금 높은 생존율'에 목숨을 걸고 지중해를 건너 유럽으로 향하는 보트에 몸을 실은 난민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이다.

화자인 나 '시프'는 수학과 체스를 좋아하고, 장차 엔지니어가 되고 싶었던 열네 살 평범한 소년이었다. 얼마 전까지 엄마와 여동생과 살았다. 아버지가 몇 년 전에 병으로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난민 87> 책표지.
 <난민 87> 책표지.
ⓒ 내인생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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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를 졸업하는 열네 살에 군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자랐다. 주변의 형들이 그랬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얼마 후 입대해야 한다는 사실에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웃에 사는 단짝 친구 비니 역시 그랬다. 그런데 이런 내게 엄마는 징집을 피해 내일 당장 도망가야 한다고 완강하게 말한다.

"실은 아버지가 죽지 않았다. 교사였던 아버지가 한 모임에서 '교사들의 강의 수준을 높이려면 급여를 올려주는 것이 좋겠다'는 제안을 했다는 이유로 반정부 인사로 낙인 찍혀 군인들에게 끌려가 행방불명이다. 비니 아버지도 네 아버지처럼 끌려갔다. 그런 아버지들 아들인 너희들은 다른 아이들과 달리 2년간의 의무복무로 끝나지 않는다. 10년이고 20년이고, 아니 살아 있는 한 절대 제대하지 못하며 혹독한 노동에 시달릴 것이다. 비니와 함께라면 어떤 어려움도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국경을 넘어 유럽으로 가는 배를 타야 한다"고.

그동안 전혀 몰랐던 이와 같은 엄청난 사실까지 들려주며, 그리고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하며 기다려 왔다는 듯 구체적인 탈출 경로는 물론 도와줄 사람까지 자세히 알려주며 어떻게든 떠나야 한다고 재촉한다. 그러나 시프와 비니는 날이 채 밝기도 전 들이닥친 군인들에게 끌려간다. 그렇게 '사막감옥'에 갇힌다.

사막 한가운데 선박용 컨테이너 여러 개를 놓아 만든 감옥이었다. 다리조차 제대로 펼 수 없도록 많은 사람들을 짐짝처럼 던져 넣고 방치해 형벌 없이도 그리 오래지 않아 다리가 힘을 잃어 제대로 설 수 조차 없게 되는, 그리하여 문을 열어둬도 도망칠 힘조차 없이 죽어갈 날만을 기다리는 사람들 속에 던져져 버린다.
 
 "우리 대부분은 다른 수용소에서 이감되어 왔지. 여기 도착했을 때부터 이미 체력적으로 불가능했어. 처음 여기로 온 사람들도 우리처럼 저질체력이 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그때는 또 별다른 계획도 없었고. 계획이 생겼을 때는 이미 우린 늦어버렸어."
"그렇지만 언젠가는 석방시켜 주지 않을까요?"비니가 물었다.

"난 여기서 십오 년을 썩었다. 그동안 그 누구도 자유를 쟁취하는 꼴을 못 봤어. 수용소를 빠져 나가는 아주 간단한 수가 있기는 있지. 죽어서 얼굴에 천을 덮으면 돼" 네바이가 말을 이었다. "모범수라해도 별 특전이 없어. 우리와 같이 썩고 싶다면 말리지는 않으마." (...)

"그런데 수용소를 빠져나갈 확률이 얼마나 될 것 같아요?" 비니가 정말 궁금하다는 투로 물었다. 테스파이가 잠시 말을 멈췄다. "이렇게 정리하면 돼. 너희를 석방시켜줄 확률은 제로야. 그런데 너희가 수용소를 빠져나갈 확률은 그보다는 살짝 더 높아."-131~145쪽.
 
죄수번호 87, 88번이 된 시프와 지니는 죽음만을 기다리는 수용자들로부터 뜻밖의 제안을 받는다. '0%보다 약간 높은 확률에 목숨을 걸어야하는 탈출'이었다. 수용자들이 소년들을 탈출하도록 하려는 이유는 존재조차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막감옥에서 자신들처럼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누군가에게든 알려야 한다는 절박함 때문이었다.

탈출 직후 총에 맞은 비니가 시간을 끌며 필사적으로 저항한 덕분에 간신히 탈출에 성공한 시프는 외롭고 험난하며 기약 없는 난민의 길에 오른다. 그런 소년을 노리는 것은 난민들이 있을 만한 국경 부근 마을이나 시장 등을 무리지어 어슬렁거리다가 난민들을 납치해 노예로 팔아넘기는 인신매매범들.
 
"난민캠프로 가면 안 돼. 수용소에서 탈출한 사람들을 납치하는 하이에나 같은 무리들이 있어. 큰 도시 외곽에 천막을 치고 살지. 시장이나 버스 정류장을 돌아다니며 우리 같은 사람들을 찾아다녀. 그들은 우리한테 도와줄 친구도, 친척도 전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어"
"잡아서 캠프로 돌려보내나요?"내가 물었다.
"아니, 팔지."
"사람을 판다고요?"
"그래, 노예로 팔아. 캠프로 가는 길에 너를 잡지 못한다 해도, 여기서 잡을 거야. 낯선 사람들이 지나다니는지 기다리며 캠프로 배회하는 패거리가 있거든. 아이들이 좋은 값을 받아. 팔기만 하지 않아. 그들은 전문가거든. 팔기 전에 가족에게 돈을 요구해."
"어떻게요? 그 사람들은 우리 가족의 주소를 모르잖아요." 
"너에게 부자 친척이나 가족의 전화번호를 불게 만들지. 너를 바다 너머로 보내주는 대가라고 하면서. (…)네가 말썽을 피우면 말이지 너를 죽이거나 팔 거야."-201~202쪽.
 
소년은 굶주림과 부상으로 인한 고통이란 처참한 현실과 인신매매범들에게 납치될 뻔한 몇 차례의 위기에서 간신히 벗어나는 우여곡절을 겪으며 유럽으로 향하는 보트에 몸을 싣는다. 그러나 사람을 너무 많이 태워 처음부터 위태위태하게 항해하던 보트는 파도에 휩쓸리고, 소년은 거대한 바다에 다시 던져진다.

작가 엘르 파운틴은 이 소설을 쓰고자 3년 동안 에티오피아에 체류했다고 한다. 대도시는 물론 오지에서도 머무르며 난민들의 현실을 촘촘하게 취재했다고 한다. 아울러 유엔보고서나 엠네스터, 국제자선단체 등 난민 관련 국제단체에 도움을 요청, 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가는 난민루트와 난민들의 현실에 관한 최대한의 자료를 수집했다고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나온 소설이기 때문일까. 군사독재로 부당한 현실에서 태어나 자라지만 꿈 많았던 한 소년이 난민이 되어 떠도는 과정을 소설은 팽팽한 스릴과 긴장으로 들려준다. 소설이라지만 어느 정도의 허구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소년이 이미 잘 알고 있는 누군가로 느껴졌다. 어느 순간부터 소년이 걱정스러워 어떻게 헤쳐나갈까? 읽다보니 어느새 소설 끝부분이었다. 

참고로 이 소설은 출간 3일 만에 초판 5천부가 모두 팔린 베스트셀러이자 난민들의 현실을 가장 실감 있게 다룬 난민 최고 소설로 자리매김했다고 한다.

소설에는 나라 이름은 물론 어떤 지역명도, 혹은 추측하게 하는 표현도 없다. 주인공 시프의 상황을 통해 차드, 시리아, 예맨, 미얀마, 그리고 여러 나라 난민들의 현실을 알리는 한편, 난민 문제를 특정 나라의 정치적 상황에 함몰시키지 않고자, 또한 자국의 보복을 두려워하는 난민들의 신변보호를 위해 작가가 의도했다고 한다. 이런 점도 알고 읽으면 작가의 의도에 보다 공감할 수 있으리라.

난민 소식이 종종 들려온다. 주로 독재로 인한 정치적인 문제나 종교문제로 발생한 내전으로 인한 처참한 상황과 함께 잠깐 비쳐진 그들의 모습은 쉬이 잊히지 않고 한동안 잔영으로 남곤 했다. 안타까움과 함께 말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먼 나라 소시민이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사실 상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지만 외면하고 말기에는 막연히 개운치 못한, 그래서 한편으로 난민은 슬픈 존재들이다. 그렇다면 무엇이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그리고 제대로 아는 것, 그래서 삶이란 절박한 끈을 붙잡으려 목숨 걸고 찾아온 그들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오해하지 않는 것. 보듬을 수 있다면 보듬어 줘야할….<난민 87>을 읽으며 들었던 생각 일부이다. 

난민87 - 제로보다 약간 더 높은 확률에 내 인생을 건다

엘르 파운틴 지음, 박진숙 옮김, 내인생의책(2019)


태그:#난민, #난민루트, #시리아내전, #에티오피아, #난민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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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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