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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끝 지심도 남쪽 끝에 마파람 부는 마끝이 있다. ⓒ 정명조
 
도리수요요(桃李雖夭夭) 복사꽃 자두 꽃 아름다워도
부화난가시(浮花難可恃) 부박한 꽃 믿을 수 없도다.
송백무교안(松柏無嬌顔) 송백은 아리따운 맵시 없지만
소귀내한이(所貴耐寒耳) 추위를 견디기에 귀히 여기도다.
차목유호화(此木有好花) 이 나무 아름다운 꽃 있어
역능개설리(亦能開雪裏) 눈 속에서도 꽃 피우도다.
세사승어백(細思勝於柏) 곰곰이 생각하면 잣나무보다 나으니
동백명비시(冬柏名非是) 동백이라는 이름 옳지 않도다.
 
고려 문신 이규보의 시 '동백화(冬柏花)'이다. 동백이란 이름이 최초로 등장한 문헌이다. 잣나무는 추위를 견디기에 귀하게 여긴다. 동백은 추위를 견디고, 아름다운 꽃도 피운다. 누가 잣나무와 비교하여 '겨울 잣나무'라고 하는가. 동백을 찬탄하며 노래했다. 그래서일까. 동백을 중국에서는 샨차(山茶), 일본에서는 츠바키(椿)라고 한다.
 
동백꽃 초록 잎사귀와 붉은 꽃잎, 노란 수술로 겨울이면 강력한 색조를 자랑한다. ⓒ 정명조

시골집에 동백나무가 있다. 겨울이면 강렬한 색조를 자랑한다. 짙은 초록 잎사귀와 붉은 꽃잎, 노란 수술이 인상적이다. 늦가을부터 이른 봄까지 꽃이 쉼 없이 피고 진다.

다른 꽃처럼 가지에 매달린 채 시들지 않는다. 구차하게 아등바등하지 않는다. 싱싱한 꽃잎은 바람이 없는데도, 때가 되면 통째로 톡 하고 떨어진다. 새빨간 꽃잎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땅에서도 한참 아름다운 모습을 자랑한다.
 
꽃이 지고 나면, 열매가 열린다. 씨가 떨어져 땅속에 묻히면, 다음 해 봄에 싹이 난다. 어린 동백나무가 어미나무 밑에서 빼곡히 자란다. 동백나무가 군락을 이루는 이유이다.
 
우리 집에도 동백나무가 있다. 언젠가 시골집에서 한 그루 가지고 왔다. 화분에 심었다. 물만 주어도 잘 자랐다. 10여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70cm 정도이다. 분재 수준이다. 아무래도 실내에 있어서 자람이 더딘 모양이다.
 
지심도 가는 길
 
지심도 가는 길 장승포항에서 배를 타면 10여 분만에 지심도에 도착한다. ⓒ 정명조

새벽을 달렸다. 장승포항에 도착하니, 익숙한 바다 내음이 물씬 풍겼다. 바닷길 10여 분 후, 동백꽃이 불타는 동백섬 지심도에 도착했다. 하늘과 바람과 바다가 키운 섬이다. 거제 8경 중 하나로, 11만 평의 작은 섬이다. 최고 높이는 97m이고, 해안선 3.7km 대부분은 절벽이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모양이 마음 심(心)자를 닮았다 하여 지심도(只心島)라고 불린다. 상록수림이 자연 군락을 형성하고, 동백나무가 70%를 차지한다. 남해안 여느 섬보다 동백나무 묘목 수나 수령이 압도적이다.
 
선착장에서 마을로 오르는 비탈길을 제외하면, 부드럽고 평탄한 오솔길이다. '파도 소리 벗 삼아 즐기는 낭만의 걷기 여행, 지심도 둘레길'로, 전국에서 걷고 싶은 길 17선에 선정되었다.
 
동백 숲길
 
해안선전망대 활처럼 휘어진 절벽이 해송을 뒤집어쓰고 있다. ⓒ 정명조
 
샛끝벌여 지심도 동쪽 끝 낚시꾼에게 허락하는 길을 따라 내려가면 샛끝벌여가 있다. 벌집을 닮은 바위이다. ⓒ 정명조

숲길을 걸었다. 수령 수백 년 아름드리 동백나무가 늘어서 있다. 동백 터널도 있다. 거리가 상당하다. 동백나무가 빽빽이 들어서서, 하늘도 바다도 보이지 않는다. 햇빛은 나뭇잎 사이를 뚫고 어렵게 스며든다.
 
지심도 남쪽 끝에 마끝이 있다. 마파람 부는 곳이다. 가는 길은 원시림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절벽 위 곰솔이 푸른 바다와 잘 어울린다. 마끝에서 내려다본 거제 바다는 눈이 시리도록 아름답다. 동쪽 끝은 샛바람 부는 샛끝이다. '그대 발길 돌리는 곳'으로 소개하고 있다. 해안 침식 절벽이 특히 아름답다. 낚시꾼이 즐겨 찾는 샛끝벌여도 있다. 벌집을 닮은 바위이다.
 
지심도 동백꽃은 3월이 절정이다. 한겨울에 피기도 하지만, 추우면 꽃망울을 잘 터트리지 않는다. 본능이다. 가루받이 전에 꽃이 얼면,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삭풍이 잦아들고 기온이 오르면, 꽃망울이 터지기 시작한다. 서로 뒤질세라 앞다투어 꽃이 핀다.
 
동백꽃 있는 곳에 동박새가 있다. 동박새는 남해안에 서식하는 크기 10cm 정도의 텃새이다. 동백꽃이 피면, 부지런히 옮겨 다니며 꿀을 먹는다. 부리에 묻은 노란 꽃가루를 옮기며, 수분을 돕는다. 동백꽃은 새를 통해 가루받이하는 유일한 꽃이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동박새는 내내 숲길을 함께 했다. 동백꽃과 정겹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낙화 동백꽃 나무에 피었을 때도 아름답지만, 땅에 떨어졌을 때 더 아름답다. ⓒ 정명조

떨어진 동백꽃을 보니, 문득 최영미 시인의 시가 생각났다.
 
선운사에서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사람이 사랑하고 이별하는 것을 꽃이 피고 지는 것에 비유했다. 잊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불같이 붉은 동백꽃처럼 열렬히 사랑했으리라. 그래서 잊는 건 영영 한참이리라. 이별 아픔을 가슴에 묻고 평생 살아가리라.
 
일제 흔적
 
일제 강점기에 일본군이 해안 방어용 진지를 구축한 흔적이 있다. 주민을 내쫓고 섬을 요새화했다. 탄약고와 포진지 등이 그대로 남아 있다. 중일 전쟁 때, 연합군 습격에 대비하여 군사 거점으로 삼았다.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이다.
 
지심도에 의외로 대나무가 많다. 포 진동으로 지반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심었다고 한다.
 
장승포항 지심도를 비롯하여 해금강, 외도, 매물도 등 섬 여행 길목이다. ⓒ 정명조

섬을 떠난다. 뒤돌아보니, 동백꽃이 겨울 끝자락을 가까스로 붙들고 있었다. 겨울은 이미 아득히 멀어지고 있었다. 장승포항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동백꽃에 물든 빨간 얼굴이 한잔 술에 더욱더 빨갛게 물들었다. 나무에서 한 번, 땅에서 또 한 번 핀 동백꽃이 우리 마음속에서 세 번째 활짝 피어나고 있었다.
 
그날 밤, 나는 꿈속에서 빨간 동백꽃 속으로 푹 파묻혔다. 달콤한 향기에 취해 실실거렸다. 밤새 길을 잃고, 정신없이 산속을 헤매고 다녔다. 봄은 이미 우리 곁에서 그렁저렁 무르익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우리 마음을 설레게 하고 있었다.
태그:#동백꽃, #지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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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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