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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전부 내고, 추가로 기여금까지 달라.' 미국이 방위비분담금 협상 전략을 공세적으로 바꿀 거라는 외신 보도가 나왔다. <워싱턴포스트>는 9일(현지시간) 트럼프 행정부가 동맹국에 미군 주둔 비용 전액과 50% 추가금(안보 기여 명목)을 요구하는 입장을 확정했다고 전했다. WP에 따르면 "이 전술에 부딪힌 첫 번째 동맹국은 한국"이라고 한다.
 
사실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선 과정부터 해외 주둔군 비용 절감을 일관되게 주장해왔다. 지난 2월 10일 타결된 2019년 한미 방위비분담금 협상에서도 미국은 한국 측 분담금의 즉각 2배 증액을 요구했다가 '유효기간 1년'이라는 조건을 걸고서야 8.2% 인상을 받아들인 바 있다. 그러나 지난 2월 협상과 이번 '전액+50' 보도는 느낌이 확연히 다르다.

2월말 하노이 회담 결렬 때문이다. 정부여당과 언론, 심지어 보수야당까지 성사를 낙관했던 회담이 급작스레 어긋났다. 트럼프가 달라진 탓이다. 트럼프는 그간 자신의 정치적 성과를 위해서라면 미국의 관성적 외교노선에서 엇나갈 수 있는 인물로 평가됐다. 2018년 6월 12일 1차 북미 정상회담 때까지는 정말로 그랬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진짜 이유를 두고 아직 갑론을박이 있지만, 하노이에서는 눈앞의 합의문을 포기하고 관성적 외교노선을 택했다.
 
미국에게 북한 핵의 의미

복잡한 사안일수록 큰 틀에서부터 체계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북핵 문제는 단순히 한반도 안의 일이 아니다. 미국의 세계전략 차원에서 다뤄야 한다. 한반도 비핵화와 종전선언, 그리고 평화협정이라는 로드맵은 동북아시아의 오랜 역학구도와 직결돼 있기 때문이다. 동북아 안보정세의 최대주주인 미국의 진의를 파악하지 못하면 미래 예측도 어렵다.
 
미국의 전통적 외교방침은 유라시아 일대의 패권 유지다. 유라시아에서 미국을 위협할 강국의 출현을 막는 것이 모든 외교의 대전제다. 수단은 대규모 미군 파병 및 주둔이다. 냉전기에는 소련, 탈냉전 이후에는 중국의 세력 확장을 막는 것이 핵심이다. 소련 붕괴 이후 해외주둔군 철수 정책(넌-워너 수정안, 1989)이 잠시 시행된 적이 있지만, 3년 만인 1992년 곧바로 중단됐다. 1995년 조지프 나이 당시 국방부 차관보가 작성한 '동아시아전략보고서(East Asia Strategic Report, EASR)' 발표 이래, 아시아 주둔 미군은 10만 아래로 떨어진 적이 없다. 그리고 이 시스템에 가장 강력한 당위를 제공해온 나라는 중국이 아니다. 탈냉전 직후 핵개발을 시작한 북한이다.
 
하노이 회담, 달라진 트럼프

여기에 반기를 든 최초의 대통령이 트럼프다. 트럼프는 원래 미군의 대규모 아시아 주둔에 강한 불만을 가진 인물이었다. 이유는 비용이다. 2018년 발간된 밥 우드워드의 <공포: 백악관의 트럼프>에는 미군 해외 주둔의 필요성을 두고 트럼프 대통령과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 허버트 맥매스터 안보보좌관이 벌이는 언쟁이 여러 차례 나온다. "우리가 어리석지 않았다면 벌써 부자가 됐을 것", 매티스의 입을 다물게 만든 트럼프의 명대사다.
 
그러나 하노이 회담에서 트럼프는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단계적 해법을 원하는 북한과의 정상회담장에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갑자기 배석시켰다(2018년 6‧12 회담 때는 볼턴을 완전히 배제했었다). 볼턴은 비핵화의 범위에 탄도미사일과 생화학무기를 포함시키는 예의 입장을 다시 들고나왔고, 협상은 깨졌다. 트럼프는 회담 직후 기자회견에서 결렬의 이유로 '영변 외 비밀 핵시설'과 '북한의 전면 제재 해제 요구'를 들었지만, 리용호 북한 외무상의 반박 기자회견 내용이나 볼턴의 추후 인터뷰 내용을 보면 석연치 않은 것이 사실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 기조가 볼턴식 강경 개입주의로 선회한 것으로 보인다. 그간 대화주의를 견지해온 스티브 비건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조차 11일(현지시간) "단계적 비핵화는 없다"며 달라진 입장을 못박았다.
 
이번 회담만이 아니다. 트럼프 행정부의 기조 변화는 사실 여러 차례 감지됐다. <공포>에서 고수하던 실리적 고립주의에서 벗어나, 중국 견제를 위한 군사적 패권 유지 노력의 필요성을 점차 인정하는 방향이다. 가장 대표적 사례가 INF(중거리핵전력조약, Intermediate-Range Nuclear Forces Treaty) 파기다. 1987년 미국-소련간 체결된 미사일 개발 제한 협정인 INF가 30여년 만에 깨진 핵심적 이유는 중국이다. 트럼프는 파기 입장을 밝히면서 "중국이 INF 체결국이 아니라는 이유로 핵미사일을 개발하고 있다"고 말했다. 주한미군이 2월 사드 부지 사업계획서를 제출하고 정식 배치 수순을 밟는 일도 같은 맥락의 변화다. <공포> 당시의 트럼프는 "사드를 빼서 포틀랜드에 배치하라"는 입장이었다.
 
돈을 안 써도 된다면, 북한 비핵화는 안 하는 게 낫다?

결국 정리하면 이렇다. 미국의 대북 정책은 점차 중국 견제라는 관성적 방향으로 수렴되고 있다. 트럼프의 개인적 불확실성이 옅어지고 볼턴+주류사회의 전통적 개입주의가 힘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우선주의에 기인한 트럼프의 '비용극소화주의'는 그대로다. 해외 주둔 비용을 가능한 한 동맹국에 미루고, 대규모 기동 훈련은 최소화하는 방식이다. 즉, 패권 유지는 해오던 수준으로 하되, 들어가는 돈은 최대한 줄인다! 이것이 트럼프 행정부의 미국이다.
 
"이 전술을 마주할 첫 번째 동맹국은 한국이 될 것"이라는 WP의 지적처럼, 최전선에 한국이 있다. 미국의 패권 강화를 위한 북핵 긴장 유지와, 방위비분담금 전액 부담 요구라는 두 가지 악재를 동시에 헤쳐나가야 한다. 글의 진단이 틀리지 않았다면, 미국은 현재의 동북아 정세를 계속 유지하려고 할 가능성이 작지 않다. 대규모 한미연합훈련까지는 필요 없지만 기본적 핵억지와 미군 주둔은 반드시 해야 하는 저위협 핵보유국으로서 북한을 관리해가는 것이 미국에게 최상의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중국 견제라는 미국의 안보이익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돈이 따로 들지 않는다면, 트럼프에게 이보다 더 좋은 상태는 없다.
 
한국에게 딱 떨어지는 해법은 없다. 다만 북미간 교착 사태를 단순히 비핵화 말싸움이라는 미시적 관점에서 분석하면 안 된다. 미국의 동아시아 외교전략이라는 거시적 관점에서 바라봐야 길을 찾아낼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도 모르지 않는다. 대미 협상 전문가인 김현종 전 외교부 통상교섭본부장을 국가안보실 2차장으로 전보시키고 비핵화 업무(원래 군사 담당 1차장 소관)를 맡긴 일이 그렇다. 비핵화가 군사안보 내지 남북관계의 영역이라기보다 대미 외교에 속한다고 여기는 듯하다. 물러서 있던 정의용 안보실장도 볼턴과의 대화 채널을 다시 가동시키는 분위기다.
 
정말 어려운 길이다. 미국의 안보이익과 정반대 방향으로 가야 한다. 미중간 패권경쟁이라는 대전제를 애써 외면한 채 트럼프 개인의 불확실성에 베팅했던 한국의 기대는 하노이 회담 결렬로 한계를 드러냈다. 북미 양쪽에서 나오고 있는 후속 동향은 갈수록 악화일로다. 미국이 내년부터 방위비분담금 전액 부담에 기여금까지 요구한다는 보도는 엎친 데 덮친 격이다. 북핵을 둘러싼 한반도 냉전체제를 계속해서 끌고나가겠다는 의지가 엿보이기 때문이다. 비핵화와 종전, 평화협정, 궁극적으로 통일까지 안 그래도 갈 길이 구만리인 한국외교에 먹구름까지 드리웠다. 해법이 보이지 않아서 더 어둡다. 방위비분담금 기사가 섬뜩했던 이유다.

덧붙이는 글 | 혹시 쓰실 경우에 제목 부제 소제목은 마음대로 손보셔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태그:#트럼프, #방위비분담금, #볼턴, #교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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