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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시작하기 전에 전제해둬야 할 게 있다. 어쭙잖은 경험담이 자칫 '독일 예찬론'처럼 보이며 어쩌나 싶어서다. 읽기 불편하시다면 그저 '남의 떡이 커 보이는 것'이라고 무질러도 좋고, 적당히 걸러서 이해해도 괜찮겠다. 그럼에도 독일은 한 달을 사는 동안 부러운 게 참 많은 나라였다.

독일에서 맥주 마신 이야기
 
한 달 동안 마셔본 맥주의 종류만도 얼추 50여 종은 넘은 듯하다. 도시마다 카페마다 맛이 확연히 다른 맛에 과연 독일은 맥주의 나라라는 점을 실감할 수 있었다.
▲ 독일 여행? 맥주 여행! 한 달 동안 마셔본 맥주의 종류만도 얼추 50여 종은 넘은 듯하다. 도시마다 카페마다 맛이 확연히 다른 맛에 과연 독일은 맥주의 나라라는 점을 실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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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히 알려진 대로, 독일은 맥주의 나라이니 술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자. 어느 나라에서건 술이 싸다는 걸 비유적으로 표현할 때 대개 '물보다 싸다'고 말하는데, 독일에선 진짜로 물보다 싼 맥주가 많다. 우리나라에 견줘 전반적으로 물가가 조금 비싼 독일이지만, 맥주 가격만큼은 착하다.

마트에 가면 종류가 무척 다양하고 가격도 천차만별이지만, 500ml 캔 맥주를 기준으로 0.7유로에서 아무리 비싸도 1.3유로를 넘지 않는다. 우리 돈으로 치면, 900원에서 1500원 남짓 된다. 이름을 밝히긴 곤란하지만, 우리에겐 4캔에 만 원인 맥주가 여기선 8캔에 만 원이었다.

값이 싼 이유도 있겠지만, 독일 사람들은 밤이고 낮이고 맥주를 입에 달고 산다. 아침의 빵집마다 샌드위치나 크루아상과 함께 맥주를 사서 마시는 독일인들을 만나는 건 어렵지 않다. '낮술을 마시면 아버지와 어머니의 얼굴도 몰라 본다'는 말은 적어도 독일에서는 통용될 수 없는 속담이다.

하물며 점심과 저녁은 맥주로 식사를 대신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모든 손님들의 식탁 위에는 맥주병이 올라와 있다. 맥주병을 볼 수 없는 곳이라곤 일절 술을 입에 대지 않는 무슬림이 운영하는 식당 정도다. 마트의 판매 가격에 견줘 많이 비싸긴 해도, 식사할 때 맥주는 독일인들에게 '기본 옵션'이다.

그렇듯 맥주를 삼시세끼처럼 챙겨 마시지만, 식당이든 카페든 바든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독일인들을 단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다. 그들이라고 모두 알코올 해독 능력이 뛰어날 리 없을 텐데도, 불콰해진 얼굴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그들처럼 매 끼니마다 맥주를 마시며 관찰해본 경험으로 미루어, 자주 마시되 과음하지 않는 음주 습관 때문이 아닐까 싶다.

같은 자리에서 연거푸 서너 잔을 주문해 마시는 독일인들은 드물다. 족히 한 시간도 더 지난 김빠진 맥주라도 폼 나게 즐기고, 한 잔을 마셔도 열 잔을 마신 듯 옆 테이블의 사람들과 즐겁게 어울리는 그들의 오지랖이 부러울 뿐이다. 주유소에 딸린 간이 마트에서조차 버젓이 맥주를 판매하는 독일에서, 맥주는 더 이상 술이 아니다.

독일에서 축구 관람한 이야기
 
독일 축구를 직관하게 되면, 이따금 섬뜩할 때가 있다. 마치 사이비 종교 의식과 같은 기운이 느껴지기도 한다.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홈 경기 관중들의 응원 모습
▲ 열정과 광기의 사이, 독일 축구 독일 축구를 직관하게 되면, 이따금 섬뜩할 때가 있다. 마치 사이비 종교 의식과 같은 기운이 느껴지기도 한다.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홈 경기 관중들의 응원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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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선 축구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겠다. 이방인 여행자의 시선에선, 축구를 넘어 온갖 스포츠에 대한 독일인들의 열광적인 집착이 낯설기까지 하다. 퇴근 뒤 자신이 응원하는 팀의 경기장을 찾아가는 게 일상이고, 혹여 사정의 여의치 않다면 인근의 스포츠 바를 찾아 맥주를 마시며 이웃들과 함께 관람하는 게 보통이다.

홈경기가 있는 날이면, 선수들의 이름이 적힌 저지와 응원용 배너(수건)를 몸에 걸친 남녀노소의 팬들이 도시를 장악하다시피 한다. 지하철이나 경기장과 가까운 카페나 식당은 온전히 그들의 차지가 된다. 선수 복장을 한 그들이 삼삼오오 보이면 어김없이 홈경기가 있는 날이란 뜻이다.

사실 독일 왕복 항공권을 끊기 전에 분데스리가 경기 일정을 먼저 알아봤을 정도로 축구를 좋아해서 출국 전부터 설렜던 게 사실이다. 자타공인 축구의 나라이니 경기장을 찾지 않더라도 어느 곳에서든 TV로 축구를 시청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또 우리나라처럼 시차도 나지 않으니 영국과 스페인 리그의 주요 경기도 이따금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독일인들은 적어도 축구를 비롯한 스포츠에서만큼은 '국뽕'에 취해 있는 듯하다. TV에서는 종목에 상관없이 자기 지역 연고팀이나 국가대표의 경기만 반복해 보여주고, 타 지역과 다른 나라의 경기는 스포츠 뉴스 꼭지에서 짤막하게 다룰 뿐이다. TV의 수많은 스포츠 채널이 오로지 독일과 해당 지역 위주로만 편성되어 있는 것이다.

예컨대, 독일인들에게는 영국 프리미어리그의 최상위권 팀인 첼시와 아스널 경기보다 같은 날 벌어진 독일 분데스리가의 베를린과 뉘른베르크 경기가 훨씬 더 중요한 '빅 매치'인 셈이다. 우리라면 내로라는 축구광들조차 낯설어할 팀이지만, 그들은 마치 한 가족처럼 살가워한다. 뉘른베르크의 경우 현재 분데스리가의 꼴찌 팀인데도 말이다. 물론, 그날도 참패를 당했다.

이런 이야기도 있다. 독일의 팀이 출전하는 경기가 아니라면, 유럽 내 최고 축구 클럽을 가리는 챔피언스리그나 유로파리그보다 분데스리가 2부 경기가 더 인기가 있다고 한다. 하긴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자신이 응원하는 팀의 승리를 바랄 뿐, 1부인지 2부인지 연연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분데스리가 2부의 경기를 생중계해주는 TV 채널도 적지 않다.
 
맥주를 마시면서 각종 경기를 관람할 수 있는 스포츠 바가 곳곳에 있는데, 가게 벽면에는 연고 팀의 배너(응원용 수건)가 마치 벽지처럼 붙어있다.
▲ 도심의 한 스포츠 바 모습 맥주를 마시면서 각종 경기를 관람할 수 있는 스포츠 바가 곳곳에 있는데, 가게 벽면에는 연고 팀의 배너(응원용 수건)가 마치 벽지처럼 붙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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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동안 거의 매일 저녁마다 스포츠 바를 찾았다. 겨울철 독일은 해가 짧아 오후 4시만 되어도 주위가 어둑해지는데, 시끌벅적한 클럽을 찾을 게 아니라면 긴 저녁 시간을 보내는 데는 스포츠 바만 한 곳이 없다. 스포츠라는 공감대만 있으면 처음 보는 독일인들과도 맥주를 함께 마시면서 쉽게 친해질 수 있다.

대부분의 독일인에겐 동고동락하는 축구팀이 하나쯤 있지만, 비단 축구에 한정되는 것만도 아니다. 요즘 같은 겨울의 경우, 3~4일에 한 번씩 치러지는 축구 경기 사이에는 어느새 핸드볼 국가대항전과 지역을 연고로 하는 아이스하키 팀의 경기에 빠져든다. 스포츠 바마다 종목과 상관없이 지역을 연고로 하는 팀과 인기 팀의 응원용 배너가 마치 벽지처럼 붙어 있다.

TV 중계 화면을 보노라면, 축구는 말할 것도 없고, 핸드볼과 아이스하키 경기장도 빈자리 하나 찾아보기 힘들 만큼 항상 만원이다. 듣자니까, 독일 핸드볼 대표팀의 골키퍼는 내로라는 연예인의 인기를 능가한다고 한다. 지방의 소도시에도 종목별 전용 경기장이 갖춰져 있을 정도로 독일은 축구를 넘어 스포츠에 '눈 먼' 나라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손자 3대가 손을 잡고 스포츠 바를 찾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물론, 그들의 목에는 응원용 배너를 둘렀고, 두 시간 넘도록 이어지는 대화의 주제는 오로지 스포츠다. 현재 순위와 경기 전망은 기본이고 포지션별 선수의 기량과 근황 정도는 두루 꿰고 있어, 해당 종목에 대해 문외한이라면 꿔다놓은 보릿자루마냥 데면데면해지기 일쑤다.

이건 몰랐다, 채식주의자의 천국 독일
 
독일에선 어딜 가든 채식주의자들을 위한 코너가 마련되어 있다. 식당 메뉴판에도 채식주의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메뉴가 다양하게 구비되어 있어, 채식주의자로서 여행이 조금도 불편하지 않았다.
▲ 마트의 비건 전용 판매대 독일에선 어딜 가든 채식주의자들을 위한 코너가 마련되어 있다. 식당 메뉴판에도 채식주의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메뉴가 다양하게 구비되어 있어, 채식주의자로서 여행이 조금도 불편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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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독일 하면 채식주의자가 많기로 유명하다. 마트에서 파는 식자재는 말할 것도 없고, 식당이든 카페든 길거리의 작은 빵집이든 먹거리를 파는 곳이라면 어김없이 안내 표지를 붙여놓고 있다. 대형 마트의 경우에는 아예 채식 관련 부스를 별도로 만들어 놓아 소비자들의 다양한 기호와 선택을 돕고 있다.

얼추 20년차 채식주의자로서, 해외여행 계획을 세울 때 가장 고민스러운 점이 음식 문제였는데, 독일만큼은 애초 걱정이 없었다. 여느 나라의 경우엔 음식을 주문할 때 무엇이 들었는지 일일이 물어 확인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하지만 독일에선 메뉴판에 이미 모든 정보가 적혀 있을 뿐만 아니라 아예 나뭇잎 모양의 표시가 되어있어 신경 쓸 필요가 전혀 없다.

채식주의자가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독일인들에게 채식에 관한 기본적인 지식은 상식에 가깝다. 음식을 주문할 때 채식주의자라고 밝히면, 예외 없이 '비건'인지 '페스코'인지 '락토오보'인지 등을 물어온다. 참고로, '비건'은 완전 채식을 의미하며, '페스코'는 육류만을 피하는 채식을, '락토오보'는 유제품과 동물의 알을 제외하고 일체의 육류와 생선 등을 먹지 않는 채식의 유형을 일컫는다.

독일에선 학교나 회사의 단체 급식에서조차 채식주의자들을 꼼꼼하게 챙기고 있다. 별도의 식단을 마련하는 등 채식주의자들이 불편을 겪지 않도록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나아가 채식을 단순히 육류 소비를 줄이는 차원을 넘어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에 길들여진 자본주의의 폐해를 성찰하려는 문화운동으로까지 의미가 확대되고 있다.

감히 우리나라에선 상상조차 못할 일이다. 채식주의자라고 하면 까칠하고 유난스럽다는 핀잔을 들을까 두려워 마치 죄인인 양 숨기고 움츠러드는 마당에 독일의 현실은 언감생심일 뿐이다. 채식주의자들을 또 하나의 소수자로 인정하고 공존하려는 사회적인 배려로서, 독일 사회의 성숙함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독일인 열 명 중 한 명이 채식주의자라는 통계는 그 숫자에만 의미를 둘 건 아니다. 채식주의만 따로 떼어내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어쩌면 이는 모든 교통시설의 설치 기준을 장애인들의 통행에 두고, 해마다 성소수자들의 퀴어 축제를 후원하며, 세계 각지의 수많은 난민들을 기꺼이 포용하는 사회이기에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태그:#독일 여행, #채식주의자, #맥주, #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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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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