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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이용자와 도서관 사서가 함께 쓴 도서관 역사 여행기입니다. 대한제국부터 대한민국까지 이어지는 역사 속 도서관,  도서관 속 역사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편집자말]
길상사(吉祥寺) 이야기는 '요정 대원각'으로부터 시작하지 않을 수 없다. 길상사의 전신이 요정 대원각이므로. 대원각은 한때 삼청각, 청운각, 오진암, 한성, 회림, 옥류장과 함께 서울을 대표하는 요정으로 꼽혔다. 

대원각 주인은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그 철학에 감화받아 1995년 대원각 건물과 땅을 시주했다. 대한불교 조계종 송광사의 말사, 길상사는 이렇게 탄생했다. 대형 요정이 사찰로 바뀐 흔치 않은 사례여서 당시에도 큰 화제였다.

사찰로서 길상사의 역사는 짧다. 하지만 시민을 위한 선원과 템플스테이 같은 다양한 프로그램 갖춘 '도심 사찰'로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서울시는 2013년 길상사를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했다.

밀실 정치의 산실, 요정의 흥망성쇠
 
길상사 극락전 길상사는 한때 대한민국을 주름잡던 요정 ‘대원각’이 전신이다. 대원각 주인은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감화받아 한때 자산 가치 1천억 원대로 평가받던 대원각을 시주한다.
▲ 길상사 극락전 길상사는 한때 대한민국을 주름잡던 요정 ‘대원각’이 전신이다. 대원각 주인은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감화받아 한때 자산 가치 1천억 원대로 평가받던 대원각을 시주한다.
ⓒ 백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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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나온 김에 '요정' 이야기를 더 해 보자. 요정의 대명사 '명월관'이 광화문 네거리 황토현(지금의 일민미술관 자리)에 문을 연 것은 1903년 9월 17일. 명월관은 궁중 연회 때 음식과 기생 제공을 도맡을 정도로 유명했다.

요정은 손님 옆에 술시중 드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점에서 음식점과 다르다. 해방 전에는 권번 출신 기생이 한복을 입고 시중들면서 노래와 춤으로 술자리 흥을 돋웠다. 명월관 외에도 국일관, 송죽관이 이 시기 요정으로 유명하다.

1919년 3월 1일 민족 대표 33명 중 29명은 '유혈 충돌을 피하기 위해' 탑골공원 근처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문을 읽고 만세삼창을 했다. 민족 대표가 독립선언을 하고 경찰에 연행된 태화관 역시 유명 요정이다. 태화관은 요정으로 바뀌기 전 친일파 이완용이 살던 집터다.

해방 후 요정의 풍경은 사뭇 달라진다. 권번에서 교육받은 기생은 사라지고, 술자리에서 시중드는 화초기생과 접대하는 호스티스가 그 자리를 대체한다. 1946년 12월 명월관 같은 일부 고급 요정이 퇴폐 도색 영화를 상영하다가 경찰로부터 무기한 영업정치 처분을 받았다. 해방 후 요정은 더욱 번창해서 1947년 서울에만 무려 3천여 개가 넘는 요정이 있었다. 1947년 한복남의 히트 가요 <빈대떡 신사>는 요정에 관한 세태를 풍자한 노래다.
 
"양복 입은 신사가 요릿집 문 앞에서 매를 맞는데 / 왜 맞을까 왜 맞을까 원인은 한 가지 돈이 없어 / 들어갈 땐 폼을 내어 들어가더니 나올 적엔 돈이 없어 쩔쩔매다가 / 뒷문으로 도망가다 붙잡히어서 매를 맞누나 매를 맞는구나 / 으하하하 우습다 이히히히 우습다 에헤헤헤 우습다 우화화화 우습다 / 돈 없으면 집에 가서 빈대떡이나 부쳐 먹지 / 한 푼 없는 건달이 요릿집이 무어냐 기생집이 무어냐"

<빈대떡 신사> 가사에 나오는 '요릿집', '기생집'이 바로 요정이다. 요정의 인기는 식을 줄 몰라, 한국전쟁 때 후방 군인의 요정 출입이 잦자 육군 참모총장이 '장병의 요정 출입을 엄금한다'는 명령을 내릴 정도였다.

군부 시절에도 이어진 요정의 인기
 
길상사 요사채 요정으로 쓰인 길상사는 수많은 ‘별채’가 있다. 지금은 기도처와 요사채로 쓰이지만 요정 시절 밀실 야합과 향응이 펼쳐지던 현장이다. ‘요정 공화국’ 대한민국의 과거를 증언하는 곳이기도 하다.
▲ 길상사 요사채 요정으로 쓰인 길상사는 수많은 ‘별채’가 있다. 지금은 기도처와 요사채로 쓰이지만 요정 시절 밀실 야합과 향응이 펼쳐지던 현장이다. ‘요정 공화국’ 대한민국의 과거를 증언하는 곳이기도 하다.
ⓒ 백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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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박정희가 주도한 5.16 쿠데타는 행동 개시 5시간 전 정보가 미리 새서, 요정 '은성'에서 회식 중이던 육군 참모총장 장도영에게 보고된다. 은성에 있던 장도영은 안이한 대처를 하는데, 그 때문인지 박정희는 쿠데타에 성공한다.

5.16 쿠데타 후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은 민정 이양에 대비해 비밀리에 민주공화당 창당을 준비한다. 김종필은 대학 교수와 강사를 창당 요원으로 선발, 1962년 4월부터 체계적인 교육을 실시했다. 중앙정보부가 창당 요원 교육을 실시한 곳은 종로구 낙원동의 요정 춘추장이다. 요정이 정당 탄생의 산실이기도 했던 것이다. 요정 춘추장이 있던 건물은 해방 직후 남조선로동당(남로당)이 본거지로 쓰던 곳이다. 길상사 전신인 대원각도 남로당을 이끈 박헌영과 관계 깊은 요정으로 알려져 있다. 박헌영의 아들 원경 스님은 대원각 실제 소유주가 박헌영 일가였음을 주장하기도 했다.

1970년 3월 17일 마포구 합정동 절두산 근처 승용차에서 숨진 정인숙은 고급 요정 선운각 출신 호스티스다. 그녀가 남긴 세 살 아들이 최고 권력자 자녀라는 소문 때문에 세인의 관심이 집중되기도 했다. 1970년대 삼청각은 한꺼번에 500-600명이 들어갈 수 있는 초대형 요정을 개업한다. 개업식에 이후락 부장을 포함, 중앙정보부 요원 50여 명이 참석했고 인기 연예인이 대거 출동했다. 중앙정보부는 요정에서 오가는 정보를 체계적으로 수집하는 '미림'이라는 팀을 따로 뒀다. 

산업화 시대 요정은 밀실 접대와 밀실 정치의 온상이었다. '요정 정치'라는 말도 이때 등장한 말. 기생관광이라는 '외화 벌이'를 위해 국가는 요정 산업을 적극 양성했다. 박정희 정권은 한국관광공사의 전신 국제관광협회에 '요정과'를 설치, 관광기생에게 접객원 증명서를 발급해서 통행금지 상관없이 호텔을 출입하며 일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

전두환 정권은 1986년 아시안 게임을 앞두고 11개 대형 요정 업체에 총 20억 원을 특별융자로 지원한다. 외국 관광객용 지도에 요정 위치를 다국어로 상세히 표시해 '기생관광'을 적극 장려하기도 했다. 누구 말처럼 '대한민국 정부가 포주'였다. 사창가라 불린 집창촌과 함께 요정은 한국 섹스 산업의 한 축이었다.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요정 수는 870여 개에 이르렀다. 이후 강남 룸살롱에 밀려 수가 줄기 시작해서 한정식집 등으로 변모했다. 대원각, 삼청각 같은 대표적인 요정도 1990년대 문을 닫았다.

모던보이 백석과 자야의 사랑 이야기
 
시인 백석 평안북도 정주 출신 백석은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조선일보 기자로 일하며 시인으로 데뷔한다. 조선일보 기자를 그만두고 함흥에서 교사 생활을 하던 그는 운영적인 사랑, 진향(자야 김영한)을 만난다.
▲ 시인 백석 평안북도 정주 출신 백석은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조선일보 기자로 일하며 시인으로 데뷔한다. 조선일보 기자를 그만두고 함흥에서 교사 생활을 하던 그는 운영적인 사랑, 진향(자야 김영한)을 만난다.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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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산 가치 1천 억대였던 요정 대원각이 사찰로 바뀌는 과정은 흔치 않은 이야기여서, 요정 대원각 주인에 대한 관심도 뜨거웠다. 요정 대원각 주인 김영한(金英韓)은 젊은 시절 '백석의 연인'으로 알려져 더욱 유명했다.

1912년 7월 1일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에서 태어난 백석(白石. 본명 백기행白夔行)은 정주의 명문 오산학교를 나왔다. 정주는 조선 시대 가장 많은 과거 급제자를 낳은 인재의 요람이다. 남강 이승훈이 1907년 12월 24일 세운 오산학교는 김소월의 스승 김억이 교편을 잡고, 고당 조만식과 벽초 홍명희가 교장을 지내고, 시인 김소월이 졸업한 명문이다.

화가 이중섭과 소설가 황순원, 사상가 함석헌도 오산 출신이다. 1929년 3월 5일 오산고보를 졸업한 백석은 정주 출신 사업가 방응모의 도움으로 1930년 4월 일본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영어사범과에 입학한다. 공교롭게 백석이 일본 유학 시절 머문 하숙집 주소가 도쿄 기치조지(吉祥寺) 1875번지다. 기치조지를 우리 발음으로 읽으면 '길상사'다. 

1934년 3월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백석은 1934년 4월부터 방응모가 인수한 <조선일보> 교정부에서 기자로 일한다. 기자 시절 시인으로 데뷔, 1936년 1월 20일 그의 유일한 시집 <사슴>을 출간한다. 백석의 시집 <사슴>은 출간되자마자 많은 시인을 매료시켰을 뿐 아니라 후대 시인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윤동주는 용정 광명학원 중학부 시절 <사슴>을 구하지 못해 애를 태우다가 1937년 8월 학교 도서관에서 <사슴>을 겨우 빌려 그 자리에서 필사했다. 이렇게 필사한 <사슴>을 윤동주는 끼고 살다시피 했다. 백석이 통영 출신 아가씨 박경련을 마음에 품은 시기도 이 때다.

1936년 4월 경성을 누비던 '모던보이' 백석은 <조선일보> 기자를 그만두고 함흥 영생고보에서 영어교사 생활을 시작한다. 함흥에서 백석은 권번 출신 기생 진향(眞香)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백석의 나이 스물여섯, 진향의 나이 스물둘이었다. 그는 진향을 자야(子夜)라고 부르며 아꼈다. 자야는 이태백이 당시(唐詩)로 남긴 동진(東晉) 여인 '자야 이야기'에서 따온 아호. 1937년 4월 백석은 마음에 둔 박경련과 절친 신현중의 결혼 소식을 듣고 깊이 상심하기도 했다.

*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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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해서 책사냥꾼으로 지내다가, 종이책 출판사부터 전자책 회사까지 책동네를 기웃거리며 살았습니다. 책방과 도서관 여행을 좋아합니다.

사람사이에 조용히 부는 따스한 봄바람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아이들, 동물, 책을 좋아하는 고양이 집사입니다. 도서관 사서로 일하다가 지금은 소박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