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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꽃이 핀 지난날 무릉도원의 송한리 마을
 감자꽃이 핀 지난날 무릉도원의 송한리 마을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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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설날 이웃 횡성에 사는 농민회 회원들이 인사차 내 집에 왔다. 그들은 돌아가면서 나에게 3월 초 주말에 '봄맞이 나들이'를 가자고 제의하여 쾌히 승낙한 바 있었다.

지난 주말(9일) 마침 미세먼지도 다소 잠잠하다고 하여 그들 초청에 카메라를 메고 따라 나섰다. 사실 나는 그 전 주, 서울 가는 길에 원주 역 계단을 오르다가 넘어져 왼손을 다쳐 시큰하고 뻐근했다. 하지만 그 핑계로 불참하기에는 신뢰감을 저버리는 것 같아 변명치 않고 따라 나섰다.

농민회 회원들은 내 취향에 맞게 이미 여정을 잡아두고 있었다. 먼저 간 곳은 내가 서울에서 내려와 6년을 살았던 강원도 횡성군 안흥면 안흥 4리 속칭 '말무더미' 마을 나의 옛 집이었다. 그 마을에 이르러 옛 집을 보자 눈물이 나올 만큼 반가웠다. 집은 그대로인데 지붕만 도색했다. 아래채는 '박도글방'이라는 현판을 걸어둔 나의 서재로, 나는 그곳에서 밤낮 무수한 글을 썼다. 곧 내 작품의 산실이었다.
 
내가 살았던 매화산 기슭 횡성군 안흥면 말무더미 마을 옛집
 내가 살았던 매화산 기슭 횡성군 안흥면 말무더미 마을 옛집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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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서 일주일에 한 번꼴로 <오마이뉴스>에 '안흥 산골에서 띄우는 편지'를 써서 송고했다. <지울 수 없는 이미지>, <안흥 산골에서 띄우는 편지>, <길 위에서 길을 묻다>,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사>, <삼천리 금수강산>, <지울 수 없는 이미지 ‧ 2>,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 <그 마을에서 살고 싶다>, <항일유적답사기>, <로테르담에서 온 엽서>, <누가 이 나라를 지켰을까>, <제비꽃> 등의 저서는 내가 그곳에 살 때 펴내거나 탈고한 책들이다. 아마도 내 인생역정에서 가장 활발히 집필했던, 가장 행복했던 나날이었다.

그 집을 떠나온 지 그새 10년이 지났다. 거기서 러시안 블루 카사란 놈과 티격태격 때로는 오순도순 지냈다. 하지만 피차 인연이 다한 듯 원주아파트로 온 이후는 서로 떨어져 살고 있다. 그 집에 들어서자 그놈이 보고 싶어 왈칵 눈물이 솟아났다. 내가 글 쓰는 일에 골몰해 있으면, 그 놈은 내 서재 창틀을 올라와 자기랑 놀아달라고 무척이나 보챘다. 아마도 내 건강을 염려하여 쉬면서 일하라고 그랬던 모양이다.
 
장독대 옆에서 나를 기다렸던 카사
 장독대 옆에서 나를 기다렸던 카사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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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녀석 이야기를 쓴 산문집 <카사, 그리고 나>를 펴낸 바 있다. 앞으로 여건이 허락되면 사람과 동물이 공존하는, 그놈을 주인공으로 달콤새콤한 장편소설을 쓰고 싶다.

다음은 내 산문집 <그 마을에 살고 싶다>의 배경 마을이었던 '송한리'로 갔다. 그 마을에 이르자 옛 시인의 시구대로 '산천은 의구'했다. 하지만 감자꽃이 핀 그 마을 산등성이 일대는 그새 밭으로 개간되었고, 한우를 키우는 큰 축사로 변해 있었다. 청정마을이 사라진 것 같아 씁쓸했다.

온 나라가 '개발' '개발'로 산골 오지 청정 지역조차도 점차 남김없이 오염되고 있다. 사람은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의 무덤을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러면서도 우리의 숨통을 조이는 공해나 미세먼지를 남의 탓만 하고 있다.

우리 스스로가 공해요, 공해를 일으키는 주범이면서도 자기는 오염원이 아니라고 오만하게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닌지? 우리 모두가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의 전환 없이는 지구 환경 개선은 공염불일 것이다.

잠시 둘러본 송한리 마을이었지만 내 마음 속의 아련히 남아있는 무릉도원이 허물어지는 아픔을 안고 그 마을을 떠나왔다. 사실 나는 때때로 그 마을 한 오두막 집에서 카사란 놈과 오순도순 살면서 영원히 잠드는 꿈을 꾸곤 했다.

귀로에 옆자리 기사에게 강림면 월현리 의병대장 민긍호전적비로 가자고 말했다. 그러자 뒷자리 학생들은 일제히 환호했다. 가는 길에 주천강 옆 어탕칼국수 집에서 마음에 점을 찍은 뒤, 곧장 의병장 전적비로 갔다. 거기서 하차하여 일동 묵념 후 기념촬영을 했다. 

민긍호 의병장은 바람 앞에 등불처럼 꺼져가는 나라를 구하겠다고 일제에 항거하다가 순국하신 진정한 애국자였다. 그분의 후손은 여태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그분의 전적비를 바라보니까 착잡하다.

진짜 애국자들은 한일병탄 전, 일제강점기 때 거의 다 순국하시고, 외세에 빌붙어 진짜를 탄압하거나 구차하게 살아남은 민족반역자들이 진짜 애국자 노릇하는 오욕의 역사가 역겹기만 하다.

'민족반역이 죄가 되지 않는 나라'에서 독립운동사를 제대로 배우지 못한 짐승같은 무리들은 이즈음도 친일파 후손 석방을 외치면서 태극기에 성조기까지 들고 날뛰고 있다. 일장기와 성조기를 들고 외칠 것이지 왜 애꿎은 태극기까지 들고 설치는지? 전직 교육자로서 그런 무리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부끄러움이 크다.

전적비 앞 주천강 강가 버들강아지 곁으로 가서 자세히 바라보니 가지마다 물이 잔뜩 올라 곧 봄이 온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의병대장 민긍호 전적비 앞의 농민회 회원들(왼쪽부터 한영미, 최정희, 오숙민, 강명미, 김병선, 홍경자, 구현석, 박광호님)
 의병대장 민긍호 전적비 앞의 농민회 회원들(왼쪽부터 한영미, 최정희, 오숙민, 강명미, 김병선, 홍경자, 구현석, 박광호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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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천강변의 버들강아지가 봄소식을 전하고 있다.
 주천강변의 버들강아지가 봄소식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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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도로 표지판
 도깨비도로 표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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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들을 잡은 기사 구현석씨는 거기서 멀지 않는 곳에 '도깨비 도로'가 있다고 우리 일행을 그곳으로 안내했다. 기사가 시동을 끄고 브레이크를 풀자 분명히 오르막인데 차는 내려가고 있었다. 일종의 착시현상으로 우리는 사물도, 사람도 잘못 보는 경우가 많음을 체험으로 인식케 했다.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우리는 여태 자주(自主)의 나라가 아니란 걸. 그래서 서울 한복판 서울역, 광화문, 시청 앞에서 선글라스를 끼고 성조기를 들고 활보하는 무리들이 있다. 그들은 아직도 착시현상에 사로 잡혀 있다.

원주 내 집으로 돌아오면서 남북 삼천리 방방곡곡에 찬란한, 환희의, 평화의 봄이 오라고 소망했다. 또한 마음속으로 자주의 한반도에 화사한 봄날이 어서 오라고, 우매한 백성들이 착시현상에서 깨어나라고 하늘을 향해 빌었다. 그런대로 즐거운 봄맞이 나들이었다.

태그:#안흥마을, #주천강, #민긍호의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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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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