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치>.

<해치>. ⓒ SBS


영조 시대를 다루는 SBS 월화 드라마 <해치>에서는 보수세력인 노론당의 위세 등등한 모습이 연출된다. 조선 시대에 관심 있는 역사 독자의 상당수가 이 시대의 대표적 적폐세력으로 꼽는 노론당이 이 드라마에서는 다수세력을 이루고 있다.
 
드라마 속의 노론당은 국정을 좌지우지할 뿐 아니라 임금인 경종(한승현 분)도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다. 왕실과 경종을 압박해 이복동생인 연잉군(정일우 분)을 후계자로 옹립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그런 노론당의 선두에 이조판서 민진헌(이경영 분)이 있다.
 
이런 드라마 속 상황은 실제 역사를 그대로 반영한다. 이 시대를 다루는 여타 드라마들도 이 문제에 관한 한 거의 똑같다. 경종 시대(1720~1724년)의 정치적 주류세력이 노론당이고 이들이 임금을 압박할 정도의 위세를 부렸다는 점은 틀림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런데 한 가지, 간과되고 있는 사실이 있다. 노론당이 정치적으로 최대 세력이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지만, 경제적 영역에서까지 그들이 당대의 최고 부자들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들을 훨씬 능가하는 부유층이 따로 있었다.
 
바로 그 부유층이 정치에 영향을 미치고 노론당에 입김을 불어 넣는 부분은 <해치>를 비롯한 거의 모든 사극에서 제대로 다뤄지지 않고 있다. 오로지 노론당의 문제점만 집중 부각되고 있다. 다수당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자기들 이해관계에 부합하는 쪽으로 국가를 이끌어간 경제적 지배층의 실상이 충분히 묘사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경제력'으로 조선을 쥐락펴락한 집단, 따로 있어

어느 시대 어느 나라건 간에, 공직이나 정치권에 굳이 진출하지 않더라도 세상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계층이 있다. 지역 사회에도 군수나 구청장, 경찰서장, 학교장 등이 어쩌지 못하는 무관(無冠)의 지배층이 엄존한다.
 
실질적 권력을 가졌으면서도 공공 영역에 진출하지 않는 이런 계층으로 인해, 경제적 지배층과 정치적 지배층의 괴리가 항상 생기기 마련이다. 사림파(유림파)가 지배한 조선 후기에는 특히 더 그랬다.
 
선조가 즉위한 1567년부터 일본에 강점당한 1910년까지 조선을 지배한 집단은 사림파와 그 후예들이었다. 성리학적 수양을 업으로 하는 이들은 1567년 집권 당시, 중소 규모의 부동산을 평균적으로 보유했다. 이들 다수가 중소 지주층이었다.
 
그 후 3백 년간 녹봉도 받고 이권도 누리면서 대지주로 성장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평균적으로 볼 때 이들은 조선 후기에도 중소 지주 정도의 경제력을 보유했다. 공무원 봉급 받거나 뇌물 모아서 재벌이 되는 일은 지금이나 그때나 불가능에 가까우므로, 특별한 변수가 없는 한 이들이 대지주로 성장하기는 힘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림파는 조선 후기 3백 년을 지배하는 동안에도 대지주들을 의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림파를 대표해 영·정조 시대에 다수파를 구성한 노론당도 마찬가지였다. 드라마 속 민진헌 같은 정치인들은 노론당의 이해관계뿐 아니라 최고 부유층의 여론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이 관직이 없다거나 성리학적 소양이 부족하다 하여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노론당의 리더 민진헌(이경영 분).

노론당의 리더 민진헌(이경영 분). ⓒ SBS


군수급도 집주인 횡포 앞에서는 무기력했던 조선시대

사대부 관료들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부유층이 있었다는 점은 정조 임금 때의 무관인 노상추의 일기에서도 나타난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운영하는 한국사 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에서 노상추 일기를 검색하면 이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지금의 경북 구미시에 해당하는 선산군 출신인 노상추는 무과시험 급제 뒤 훈련원(서울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부근)에 근무하다가, 지금의 충무로역 인근에서 기와집 사랑채를 전세방으로 얻었다. 1796년 4월 6일의 일이다. 노상추 일기에서는 음력 2월 29일의 일로 나온다. 출퇴근이 용이한 거리의 기와집을 얻은 대가로 노상추는 전세 보증금 27냥을 내야 했다.
 
이 집에는 노상추 외에 적어도 1명 이상의 관료가 세 들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은 무관(無冠)으로 보이는 집주인의 횡포를 겪어야 했다. 집주인은 같은 방을 놓고 이중계약을 한 뒤 먼저 들어온 세입자에게 방 뺄 것을 요구하는가 하면, 쫓겨나는 세입자에게 전세보증금도 제대로 돌려주지 않았다. 일례로, 노상추한테 방을 내준 지 1개월여 만에 다른 사람한테 40냥을 받고 노상추를 내쫓으면서 보증금도 10냥밖에 돌려주지 않았다.
 
노상추의 지위는 군수급 이상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집주인의 횡포 앞에 무기력했다. 소송을 걸어봤자 시끄러워지기만 하고 승소할 가능성도 높지 않았다. 굳이 과거시험 공부를 해서 관직에 진출하지 않더라도 경제력만으로 위세를 부릴 수 있는 계층의 실상이 이 사례에서 드러난다.
 
공권력이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경제적 지배층의 존재는 중앙정부의 공명첩 발행에서도 드러난다. 조선왕조는 재정 곤란을 겪을 때마다 부유층에게 공명첩을 판매했다. 실질적 관직 없이 명예만을 주는 공명첩을 팔아 재정을 보충하곤 했다.
 
예컨대, 1814년과 1815년에 전라도 임실현에서는 진휼자금(복지자금)을 마련할 목적으로 중앙 정부의 공명첩을 22장 판매했다. 임실현의 진휼 정책을 기록한 <임실현 진휼 등록>에 따르면, 임실현 일도면 주민인 엄충민은 20냥을 내고 '종2품 하급(차관급)'인 가선대부를 받았다. 차관급 관직 없이 가선대부라는 작위만 받은 것이다. 나머지 사람들도 종2품이나 정3품의 작위를 받았다. 
 
조선 후기에 일반적인 노비의 몸값이 5~20냥이었으므로, 노비를 1명에서 4명까지 살 수 있는 돈을 내고 차관급 명예를 받았다. 그 돈을 내면 임실현 일반 백성이 임실현감(종6품)보다 높은 지위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도(道) 단위도 아니고 현(縣) 단위에서 종2품이나 정3품 작위를 살 수 있는 사람이 한 해 동안 그렇게 많았다는 것은, 실질적 관직이 없더라도 정치적 입김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정치적 지배층과 경제적 지배층의 괴리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관직 없이 조정 움직이는 '경제적 지배층' 존재

1791년, 중대한 상업적 개혁 조치가 단행됐다. 특권 상인인 시전 상인들이 노점상을 단속할 수 있는 금난전권을 폐지하는 신해통공이었다. 육의전 이외의 시전 상인들은 이 조치로 인해 금난전권을 잃게 됐다.
 
신해통공을 찬성하는 신하들은 물론이고 반대하는 신하들도 농업을 중시하고 상업을 천시하는 교육을 받은 선비 출신들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시전 상인들의 이익을 열렬히 옹호했다. 이는 금권을 배경으로 조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제적 지배층의 실태를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이처럼 지금뿐 아니라 조선 시대에도 관직 없이 조정을 움직일 수 있는 경제적 지배층이 존재했다. 대지주나 대(大)상인들로 구성된 이들은 관복을 입지 않더라도, 또 성리학을 전공하지 않더라도 세상을 움직이는 데 지장이 없었다. 이들은 조선 후기 권력 관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세력이었다.
 
따라서 조선 후기의 권력 관계를 다루는 사극에서 이들의 존재를 빼놓고 오로지 노론당 만으로 권력 관계를 묘사하는 것은 불충분한 접근법이다. 시청자들이 당시 사회의 전모를 이해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해치 노론당 경제적 지배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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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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