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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로 마감한 권진규의 예술인생
 
권진규
 권진규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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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진규(權鎭圭: 1922-1973)는 김복진에 이은 우리나라 2세대 조각가다. 함흥에서 태어나 춘천고보를 졸업하고 일본 무사시노(武藏野)미술대학에서 조소를 공부했다. 1959년 귀국해 작품활동을 시작했고, 1965년 첫 개인전을 열었다. 그러나 1973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곳 권진규미술관에는 그의 작품이 100여 점이나 소장 전시되고 있다. 그는 석조와 목조에서 시작해 테라코타와 건칠(乾漆)조각으로 넘어갔다. 이곳에는 테라코타 작품이 가장 많다.

권진규는 무사시노 미술대학에서 일본 근대조각의 선구자인 시미즈 다카시(淸水多嘉示: 1897-1981)에게 조소를 배웠다. 그 다카시는 프랑스에 유학해 부르델(Antoine Bourdelle: 1861-1929)에게 조각을 배웠고, 부르델은 로댕(Auguste Rodin: 1840-1917)의 제자다. 그러므로 권진규 조각의 맥은 로댕까지 연결된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서는 역동성이 느껴진다. 두 다리를 박차고 하늘로 뛰어오를 듯한 말이 인상적이다.  
   
말(馬)
 말(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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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세 번의 개인전을 열었다. 첫 번째가 1965년 신문회관에서 열린 <권진규 조각전 SCULPTURE terra cotta>이다. '마두(馬頭)', '우두(牛頭)', '손', '나부(裸婦)', '말' 등 45점의 작품이 출품되었다. 그러나 예술계의 평은 호의적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것은 당시 앵포르멜 등 추상적이고 실험적인 예술이 인기를 얻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는 로댕에서 부르델로 이어지는 근현대 조각의 흐름을 따르고 있었다.

권진규는 1966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에 강사로 나간다. 이곳에서 그는 조각과 조소를 가르친다. 그는 예술행위도 중요하지만 조형이념이 더 중요함을 강조한다. 우리의 전통과 사상에 바탕을 두고, 내적인 각성을 통해 예술혼을 예술행위로 변화시키려고 노력했다. 그 때문인지 그의 작품 속 인물과 동물은 우리가 늘 보던 그 모습이다. 서구적이 아니라 한국적이라는 얘기다.
 
첫 번째 권진규조각전 포스터
 첫 번째 권진규조각전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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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의 조각은 그들 집단의 골수에 뿌리박은 전반적인 사상, 생활감정, 전통의 집약이다. 그들의 새로운 조형이념은 그 거대한 전통을 바탕으로 나온 것이다. 우리들이 아무런 내면의 충격에 의하지 않고 안이하게 그들이 지향한 예술흐름 속에서 우리의 예술행위 초점을 맞춘다면, 우리는 영원히 그들의 뒤만 쫓는 자기상실자가 되고 말 것이다."
 
두 번째가 1968년 도쿄 니혼바시(日本橋) 화랑에서 열린 <권진규조각전>이다. 이때 30점의 테라코타가 출품된다. 이때는 여성흉상이 많았다. 그것은 미술대학 학생들을 모델로 했기 때문이다. 전시회에 대해서 일본 언론은 한국적인 리얼리즘을 구현했다고 표현했다. 그러면서도 아쉬움과 가능성을 동시에 가진 작가로 보고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Crucifixion)
 그리스도의 십자가(Crucifix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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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현대조각이라고 하면 추상조각에 한정하는 경향이 있다. 국제적인 동향에 민감히 반응하는 것이 일본인의 특징이다. 조각계도 전반적으로는 디자인에 근접하여 종래의 양감을 적용시킨 구상조각 등을 이미 구시대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상조각 중에 뛰어난 작품이 있어도 좋을 것이다. 표면적인 사실을 넘어 현대인의 마음을 사로잡는 작품이 존재하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다. 특히 실력 있는 구상조각를 기대하고 있는 작금에 있어서 그 기대에 부응하고 있는 것이 10일까지 니혼바시 화랑에서 열리는 권진규조각전이다."

1970년 권진규는 교회의 의뢰로 건칠 '그리스도의 십자가(Crucifixion)'를 제작한다. 그러나 작품이 그로테스크하다는 이유로 교회가 수령을 거부한다. 1971년에는 '불상'과 '불두'를 테라코타와 건칠로 제작한다. 이때 동생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나의 마음이 평온할 때는 불상이 미소 짓고 있지만, 나의 마음이 우울할 때는 불상도 울고 있다."
 
세 번째 <권진규 조각작품전>
 세 번째 <권진규 조각작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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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권진규 조각작품전>이 1971년 12월 명동화랑에 개최된다. 이때 테라코타 24점, 건칠 11점, 석조 3점이 출품된다. 그러나 화단의 평가는 냉담했다. 더욱이 권진규 자신이 작품에 만족하지 못했던 것 같다. 한국적 리얼리즘을 추구했지만 그것을 달성하지도 못했고, 예술적으로 완성에 이르려 했으나 그것도 달성하지 못해, 자신의 예술적인 능력에 대한 회의가 생겨난 것 같다.

1973년 권진규의 작품 3점이 고려대학교박물관에 들어간다. 5월 3일에는 고려대학교박물관 현대미술실 개막식에 참석한다. 5월 4일 오전에도 박물관을 방문해 자신의 작품을 살펴본다. 그리고는 오후 3시경 세 통의 유서를 남기고 자살한다. 한 통은 동생 경숙에게, 한 통은 자신의 예술을 알아준 박혜일 교수에게, 한 통은 제자 김정제에게 남긴다. 동생에게는 화장해달라는 부탁을, 박혜일 선생에게는 감사를, 김정제에게는 작별을 고하고 있다.
 
테라코타에 예술혼을 불사르다.
 
권진규 동상
 권진규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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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관으로 들어가면 먼저 권진규 사진을 만나게 된다. 커피와 담배를 좋아하고 음악을 즐겨 들었던 그의 얼굴에 우수가 서려 있다. 다음에는 조각가 권진규를 소개하는 패널이 걸려 있다. 이를 통해 권진규의 삶과 예술을 개략적으로 알 수 있다. 그 다음에는 의자에 앉아 있는 권진규 동상을 볼 수 있다. 관람객은 대부분 권진규 옆에 앉아 함께 사진을 찍는다. 그것이 권진규 예술과 친해지려는 첫 시도다.

그리고 나서 권진규의 테라코타와 만나게 된다. 인물과 동물이다. '영희'라는 제목의 여인 흉상이다. '소녀 흉상'도 있다. 여성을 이상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동물로는 고양이가 있다. 두상이 있고 전신상이 있는데, 표면이 거친 편이다. 두상은 얼굴 표정이 두드러지고, 전신상은 웅크리고 자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자소상
 자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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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에는 말을 그린 유화가 두 점 있다. 그리고 그 앞에 두 발을 든 말이 서 있다. 그림 속 말이 밖으로 튀어나온 것 같다. 그 옆에는 들어 올려진 팔이 있다. 힘줄까지 표현되어 사실적이고 강인한 느낌이다. 남자 누드도 하나 서 있는데, 고뇌에 찬 모습이다. 석조 두상도 있다. 이들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1969년에 만든 자소상이다. 머리를 빡빡 민 자소상의 눈빛이 아주 강렬하다.
 
또 다른 방에서 다양한 장르와 예술철학을 만나다
 
숫소(雄牛)
 숫소(雄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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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코타 중 가장 강렬한 작품은 '숫소(雄牛)'다. 1972년 3월 현대화랑에서 열린 <이중섭유작전>에서 '황소'를 보고 영감을 얻어 만든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자료에 따르면 이중섭의 황소를 모본으로 스케치를 한 다음 테라코타로 제작했다고 한다. 그래선지 이중섭의 황소와 유사성이 느껴진다. 이중섭이 황소의 역동성에 주안점을 두었다면, 권진규는 숫소의 순박한 표정에 주안점을 두었다.

권진규는 이중섭, 이쾌대 같은 개성적인 화가를 칭찬했으나, 서양미술을 흉내 낸 화가들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이들의 심사를 받는 것이 마땅치 않아 국전에 작품을 출품하지 않았다. 그 이유가 자신의 작품을 심사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인물 두상도 몇 점 있는데 완성도가 높아 보인다. 이 전시실에는 앞서 언급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다. 나는 이 작품에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데, 교회 사람들은 인간 예수를 본 모양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드로잉
 "그리스도의 십자가" 드로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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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시실에는 권진규의 부조가 몇 점 있다. '공포'와 '작품'이라는 제목이 붙었는데 1965/66년 작품이다. 상당히 관념적이어서 예술성을 말하기는 어렵다. 이곳에는 그의 스케치도 여러 점 있다. 자소상을 만들기 위한 드로잉이 있고, 얼굴을 만들기 위한 드로잉이 있다. 프랑스어로 'Le Mur des Lamentations'라 쓰고 '애도의 벽'이라번역한 스케치도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드로잉도 보인다.

마지막에 우리는 사진과 포스터를 만난다. 사진은 그의 예술인생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순간을 담고 있다. 젊어서 유복한 생활을 했으나, 예술을 하면서 니힐리즘에 빠져 자살한 것을 알 수 있다. 그 니힐리즘은 자신의 한계를 알게 됨으로써 생겨난 것이기도 하지만, 자신을 알아주지 못하는 사회에 대한 한탄도 상당 부분 들어 있다. 그의 말과 글에 나타나는 예술관, 정의감과 니힐리즘을 몇 가지 옮겨본다. 마지막 말은 백거이(白居易)의 시 '一折不重生 枯死猶抱節'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작업실에서의 권진규
 작업실에서의 권진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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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기법이나 손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정신으로부터 실현되는 것이다."
"강한 표현, 자유로운 표현, 동양적인 표현"
"작가는 작품을 팔아서 생활하면 안 되는데... 작품이 없어질 때마다 슬프다."
"아이들을 잘 키우는 것은 뛰어난 작품을 만드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인간의 아이는 언젠가 죽지만, 내가 만든 아이(작품)들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
"부모가 아이를 위해서 죽을 수 있듯이 나는 나의 작품을 위해서 죽겠다."
"한 번 꺾일지언정 다시 살고 싶지 않고, 절개를 지키며 오히려 말라 죽으리라."

 
포스터는 5종이 있다. 이들은 생전의 전시회와 사후 전시회 포스터들이다. 그의 삶과 예술을 살펴보고 나서 포스터를 보았기 때문인지, 모든 포스터가 슬프고 우울하다. 말에서는 역동성보다는 절규가 느껴지고, 권진규의 얼굴에는 고뇌가 가득하다. 그의 작품 속 인물들 표정은 왜 또 이렇게 무심할까? 작품 속 인물과 작가 권진규를 병치해 놓은 포스터에서는 작가와 작품의 합일을 본다. 그의 말처럼 그의 작품이 죽지 않고 영원할 거라 믿는다.

태그:#권진규미술관, #테라코타, #한국적 리얼리즘, #인물, #동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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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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