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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조기.
 성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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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하노이 합의에 실패하면서, 아무래도 미국보다는 북한이 좀더 아쉬운 입장에 놓이게 됐다. 관계단절 상태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북한은 경제적 곤란을 겪는 시간이 그만큼 길어질 수밖에 없다.

북한과 동병상련을 겪은 나라들이 있다. 이 나라들도 미국 때문에 애를 많이 태웠다. 이들의 공통점은 미국의 세계 패권을 손상시키고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의 평화체제)'를 흠집냈다는 점이다. 수많은 나라들이 어떤 형태로든 성조기의 위신을 손상시켰지만, 이 3개국은 북한과 더불어 가장 두드러지게 미국의 위신을 떨어트린 바 있다.

팍스 아메리카나 흔든 3개국과 미국의 보복

중국은 한국전쟁에서 북한과 연합해 미국과 싸운 결과, 무승부를 기록했다. 북베트남(지금의 베트남)은 베트남전쟁(1960~1975년) 중인 1964년부터 미국과 격돌한 끝에 1973년 파리평화협정을 통해 미국에 대한 승리를 확정지었다. 북베트남은 미군을 철수시킨 뒤인 1975년 남베트남을 멸망시켰다.

한편, 전쟁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팍스 아메리카나를 손상시킨 나라가 있다. 미국 남부 플로리다주 맞은편의 쿠바가 바로 그 나라다.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의 쿠바혁명(1959년) 이래, 이 나라는 미국 바로 코앞에서 공산주의를 유지하며 반미노선을 견지했다.

그런데 세 나라는 총체적 국력 면에서는 미국을 능가하지 못했다. 베트남이 미국을 꺾었다고는 하지만, 베트남 지형을 벗어난 데서 싸웠다면 승리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홈팀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한 결과였다고 볼 수 있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중국군(중공군)이 바로 옆 한반도가 아니라 미국까지 원정을 갔다면, 무승부도 내기 힘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3개국은 분명히 전체 국력에서는 미국을 따라잡지 못했다.

현존 세계 최강을 무너트리지 못하고 상처를 내는 데 그쳤으므로 3개국은 보복을 피하기 힘들었다. 특히 중국은 핵개발 과정에서 케네디 행정부(1960~1963년)의 침공 위협까지 느껴야 했다.

2011년에 <미국사 연구> 제33권에 실린 김정배 신라대 연구교수의 논문 '케네디 행정부의 중국정책 그리고 냉전체제'는 "(미국이) 중국의 핵무기 보유를 막기 위해 고려한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하나는 핵실험 금지조약 체결이고 다른 하나는 핵시설에 대한 예방적 혹은 선제 타격이었다"고 설명한다.

한편, 세 나라가 받은 공통적인 보복은 경제 제제다. 이들은 한결같이 무역제재를 받았다. 이런 속에서 이 나라들은 미국과의 관계정상화 필요성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자국에 치욕을 준 이 나라들에 대해 미국은 쉽게 문호를 열지 않았다. 중국의 경제력이 커지기 전만 해도, 미국 입장에서 볼 때 중국을 포함한 3개국은 경제적 가치가 그리 높지 않았다. 자국을 망신시킨 데다가 경제적 가치마저 높지 않았으니, 미국 입장에서는 관계정상화 필요성을 덜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세 나라는 결국 미국과의 수교에 성공했다. 미국이 태도를 바꾼 결과였다. 미국이 입장을 바꾼 데는, 어느 정도는 절박함이라고 표현할 만한 사정이 결정적 원인으로 작용했다.

미국이 태도를 바꾼 이유  
 
중국 국기인 오성홍기.
 중국 국기인 오성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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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경우에는 베트남전쟁이 전환점이 됐다. 1968년 연초부터 미군이 밀리고 이로 인해 아시아·태평양에서 미국의 위상이 흔들리자, 미국은 중국과의 관계정상화를 선택했다. 얼마 전까지 중국을 압박했던 미국은 필요성을 느끼자마자 태도를 확 바꾸었다. 중국과의 적대적 공존관계를 발판으로 아시아·태평양에 대한 패권을 유지하는 한편 소련의 영향력 팽창을 견제할 목적으로 중국의 핵 보유를 합법화하고 경제제재를 완화한 것이다.  

베트남은 대미관계에서 꽤 적극적이었다. 1975년 전쟁이 끝난 직후부터 대미수교를 추진했을 뿐 아니라 1984년에는 미국의 요구를 전폭 수용하겠다는 입장까지 천명했다. 1984년 12월 중앙위원회에서 베트남 공산당은 '미국의 관심사에 적극 협력함으로써 관계를 정상화한다'는 방침까지 마련했다. 미국의 요구조건을 뭐든 다 들어주겠다는 식으로 '러브콜'을 보낸 것이다.

하지만 미국은 냉랭했다. 제3자가 볼 때 민망할 정도였다. 베트남의 뜨거움과 미국의 차가움이 너무도 명확히 대비됐다. 그랬던 미국이 1990년대 들어 갑자기 태도를 바꾸면서 상황이 급진전되더니 1995년 7월 11일 국교 체결이 성사되기에 이르렀다.
 
베트남 국기인 금성홍기.
 베트남 국기인 금성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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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태도를 바꾼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우선, 1991년 소련 해체로 미·소 냉전구도가 와해되면서 중국의 영향력이 팽창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베트남과 손잡고 중국을 견제할 필요성이 대두됐던 것이다.

<국제정치논총> 제36권 제1호에 실린 권경희의 논문 '베트남-미국 관계정상화에 관한 연구(1975~1995)'는 "1993년 로드(Winston Lord)와 라슨(Charles Larson) 같은 고위 장성들의 베트남 방문은 (미국이) 베트남을 중국에 대한 견제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미국 기업들의 이해관계도 크게 작용했다. 1991년부터 미국 기업인들이 국교 수립을 촉구한 게 관계 진전을 이끄는 힘이 됐다. 이 당시 미국인들이 동남아와의 경제교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는 점에 관해 백창재 서울대 교수의 논문 '오바마 행정부의 동남아 정책'은 이렇게 말한다.
 
"무엇보다도 부시와 클린턴 행정부는 동아시아와 동남아의 경제적 가치를 중시했다. 탈냉전 이후 별다른 안보적 위협이 없는 상황에서 동아시아는 경제성장이 가장 빠른 지역이었고, 미국은 이 시장에 대한 접근을 공고히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동아시아의 경제성장을 지속시켜줄 수 있는 안보 상황의 조성, 동아시아 경제의 에너지 수송로로서 동남아 해역의 접근성, 미국의 시장 접근 확대, 그리고 클린턴 시기에는 '관여와 확장'의 일환으로서 인권과 민주주의가 추구되었다."
-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가 2011년 발행한 <동북아 연구> 제16권.
 
이처럼 대(對)중국 견제의 필요성과 더불어 미국 기업의 경제적 이해관계가 베트남·미국 수교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익이 발견되자 미국의 태도가 바뀌었던 것이다.

동맹의 필요성, 경제적 가능성 보이자...
 
쿠바 국기.
 쿠바 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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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는 1961년 국교 단절 후로 미국의 경제제재를 받았다. 이 나라는 1990년대 초반부터 미국에 구애했다. 쿠바는 소련 및 동유럽 공산권과의 동맹을 발판으로 이 지역에 대한 설탕 수출로 먹고 사는 나라였다.

그런데 1990년을 전후해 소련 및 동유럽 공산권이 붕괴되고 설탕 수출이 어려워지자 쿠바는 미국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쿠바는 미국을 유인할 목적으로 1993년에는 외국인이 자국 내에서 달러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또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쿠바 방문을 추진해 2002년에 성사시키기도 했다.

카스트로와 이냐시오 라모네(프랑스인 교수)의 대담집인 <피델 카스트로: 마이 라이프>에 따르면, 카스트로는 조지 부시 대통령를 초청해 수도 아바나에서 대규모 군중 연설회까지 열어주려 했었다.

하지만 미국의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피델 카스트로와 그 후계자인 라울 카스트로(2008년 집권)도 김정은처럼 속을 끓여야 했다. 반(反)카스트로파인 쿠바계 미국인들의 입김이 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쿠바와의 관계정상화가 이익이 될지 여부를 미국 정부가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랬던 미국의 태도를 바꾼 계기는 2008년 금융위기다. 이때부터는 미국이 적극성을 보이기 시작했다. 금융위기에 직면한 미국 기업들이 쿠바 시장을 탈출구로 생각하게 된 점과 더불어, 2001년 9·11 테러 이후 미국의 관심이 중동에 집중된 틈을 타서 베네수엘라·브라질·볼리비아·아르헨티나 등에서 좌파가 강해지고 남미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이 강해져 있는 점이 원인으로 작용했다.

쿠바와 제휴해 남미와 중국을 견제할 필요성이 있다는 판단이 들자, 미국이 적극적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 변화가 2014년 12월 17일 국교정상화 선언으로 이어지게 됐다.

그런데 쿠바와 미국의 수교에서는 국제정세나 경제문제에 더해 교황의 중재도 큰 역할을 했다. 조한승 단국대 교수의 논문 '건설적 관여의 역동적 시스템 모델을 통한 미국-쿠바 관계 개선 분석: 교황의 중개외교를 중심으로'는 "오바마 대통령이 2014년 3월 24일 교황청을 공식 방문하여 프란치스코 교황과 면담하였고, 교황은 교황청 국무원장 피에트로 파롤린 추기경에게 양국간 협상에서의 교황청의 중개 역할을 지시하였다"고 말한다. 이후 교황청은 협상이 깨지지 않도록 하는 안전판 역할을 해주었다.

세계 최강 미국의 체면을 손상시킨 적이 있는 중국·베트남·쿠바는 미국이 절박해진 상황에서 관계 개선에 극적으로 성공했다. 이 나라들로 인해 위신이 깎였던 미국은 관계개선 요청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미국은 새로운 동맹이 절실히 필요하거나 경제적 가능성이 확인된 뒤에야 적극성을 발휘했다. 미국이 그런 상황에 처하기 전까지, 세 나라 지도자들은 김정은 위원장처럼 어느 정도는 속을 태우지 않을 수 없었다.

태그:#북미정상회담, #김정은, #트럼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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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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