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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에는 사진과 글 등이 있습니다. 이것들에 더해 사람의 기억을 탁본으로 남기고자 합니다. 간첩조작 사건에 연루돼 고문 등의 국가폭력을 경험한 분들의 기억 말입니다. 평범하기 이를 데 없었던 사람들의 고통과 삶을 질감으로 기록해 더 많은 사람들이 이를 기억할 수 있길 기대합니다. 국가폭력 피해자들이 자신의 손으로 기록하는 탁본 모임에 많은 지지와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 시민단체 '지금 여기에'

평생 '간첩의 딸'로 살아온 사람
 
 남영동 대공분실 정문에는 사람 키보다 높고 넓은 철문이 있다.
 남영동 대공분실 정문에는 사람 키보다 높고 넓은 철문이 있다.
ⓒ 지금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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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숙항은 철문을 탁본하는 순간 문을 여닫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고 했다.
 정숙항은 철문을 탁본하는 순간 문을 여닫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고 했다.
ⓒ 지금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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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9일 남영역의 작은 카페에 어색한 표정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나이 70대의 어르신부터 20대의 젊은이들, 일본 국적의 참가자... 뭔가 공통점이 없을 것 같은 이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 모임 가운데에 그렇게 젊지도 그렇게 나이가 많지도 않은 중년 여성 한 명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이미 고인이 되신 아버지(정종희)를 대신해 그 자리에 참석한 정숙항이다. 활발하고 씩씩한 그녀의 목소리는 늘 모임에서 활력이 되었다.

"늘 혼자 있으면 기가 죽어요. '간첩'이란 말만 들으면 기가 팍 죽어버리는 거죠. 고개도 못 들겠고... 근데 희한하죠. 오늘처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뭉치면 편해져요. 하나도 두렵지 않아요. 무서운 것도 없고. 이렇게 선생님들 손 잡고 남영동 들어가는데 뭐가 무섭겠어요."

'간첩' 꼬리표는 그렇게 물리치기 어려운 것이 되었다. 난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간첩'의 문제는 곧 나의 문제가 되었다. 내가 잊으려 하면 더 선명하게 떠오르는 간첩가족의 기억, 그때의 기억으로부터 멀어지려 하면 점점 더 다가오는 그 기억. 그러나 아버지와 같은 처지의 피해자 어르신들 손을 잡고 남영동 대공분실을 들어가니 두려움이 없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5년을 받고 옥살이를 한 '간첩'이다. 그와 함께 연행되어 재판 받았던 친척들 중 한 명은 사형을 선고 받고 실제 사형이 집행되었다. 한국전쟁 때 월북했던 그의 조카 한 명이 남파되어 내려온 적이 있는데 그때 신고를 하지 못한 것이 화근이 된 것이다.

"조카가 보성에 내려왔다가 북한으로 돌아갔는데 그 후로 아버지가 라디오를 통해 북한과 연락을 주고받고 그때마다 암호를 풀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무전간첩이 된 것이죠. 그게 말이 돼요?"

토벌대 총탄에 두 눈 잃은 아버지
 
 살아있고 살아남은 사람들의 기억은 이렇게 남겨지고 있다.
 살아있고 살아남은 사람들의 기억은 이렇게 남겨지고 있다.
ⓒ 지금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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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아버지가 암호를 풀던 무전간첩이라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아버지가 무전간첩을 하기에 치명적인 약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녀의 아버지가 바로 시각장애인이라는 점이다. 

"앞도 못 보는 사람이 어떻게 암호를 푼단 말이에요. 말도 안 되는 소리죠. 아버지가 나중에 감옥 나와서 그래요.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는데 보이지도 않는데 여기저기서 주먹, 발길질, 몽둥이가 날아와서 맞았대요. 보이기라도 하면 손으로 막아보려고 시도라도 할 텐데 보이지 않으니 얼굴로 날아오는 주먹, 배를 걷어차는 발길질, 어깨, 등 가리지 않고 쏟아지는 몽둥이를 그대로 맞아야 하니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모르셨대요."

그녀는 조사실의 문고리를 잡아도 보고, 도어뷰를 통해 조사실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남영동 대공분실의 5층에서 그녀는 열려있는 조사실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그곳에서 벌어졌을 야만의 장면을 떠올렸다.

10대 시절 분단을 막아보고자 건국동맹에서 일을 하던 그의 아버지는 결국 산으로 올라갔다가 토벌대의 총탄에 두 눈을 잃고서야 하산할 수 있었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속의 인생, 그러나 정숙항이 기억하는 아버지는 그리 불행하지 않았다. 앞도 안 보이는 아버지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아이들을 마중하기 위해 늘 집 마당 앞에 나와 있었고, 땔감이라도 구하겠다며 뒷산을 오르던 그런 사람이었다. 늘 따뜻한 말을 건네고, 힘들 때 위로가 되었던 아버지다.

"아이가 약한 것도 내 탓인 듯"
 
 기억하는 것의 중요함을 이야기했던 정숙항
 기억하는 것의 중요함을 이야기했던 정숙항
ⓒ 지금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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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그녀는 늘 간첩의 딸로 살아왔다. 그래서 결혼을 앞두고도 무척이나 많은 고민을 해야 했다. 시댁에서 아버지의 일을 알게 되면 그 마음고생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두려움 때문에 결혼을 선뜻 결정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도 사랑하는 마음에 서로 의지가 될 것이라는 생각해 어렵게 결혼을 결정했다. 그러나 결혼 생활 내내 늘 '간첩의 딸'은 그녀 뒤에 따라붙는 '꼬리표'였다.

험난한 결혼생활에 고난 하나가 더 얹혔다. 큰 아이의 심장기능이 약해 여러 번 수술을 해야 했다. 학교를 다니는 것은 물론 사회생활이 힘들어져 남들처럼 평범한 회사생활이 불가능했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의 탓인 것만 같았다. 아버지 일로 늘 불안했던 마음, 결혼 초기 시댁과 남편의 눈치를 보며 생활했고 임신 후에도 늘 불안한 마음이 뱃속의 아이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어 아이의 정상적인 발육이 어려워졌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이들 아픈 것도 모두 내 탓인 것만 같은 거예요. 내가 마음 편히 태교를 하고 아이를 잘 돌봤으면 아이가 그렇게 아픈 몸으로 태어났겠어요. 큰 아이가 수술할 때마다 늘 나 때문에 저 고통을 당하게 하는구나 생각하면 피눈물이 났죠. 그건 엄마들이라면 모두 알 수 있는 고통이에요."

'분단 탓이구나'
 
 남영동 대공분실의 철계단
 남영동 대공분실의 철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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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계단의 양쪽 손잡이에서 느껴지는 한기를 담으려 한 탁본
 철계단의 양쪽 손잡이에서 느껴지는 한기를 담으려 한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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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고통의 이유를 알고 싶어 했다. 왜 내가 이렇게 고통스런 일을 당해야 하는가. 무엇이 문제일까. 원인을 알면 마음이 좀 편해지지 않을까? 그녀는 여기저기 뛰어다녔다. 역사 강의, 인문학 강의가 열리는 곳이라면 남편과 가족 모르게 조용히 다녀왔다. 한 두 번 다니면서 가족과 내가 겪는 고통이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사회구조 문제에서 기인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몽양 여운형 선생님 역사를 듣는데 아, 모든 것이 분단에서 시작되었구나. 친일청산을 제대로 하고 분단을 막았다면 우리 아버님 같은 피해자가 없었겠구나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몽양 여운형 선생님 기념사업을 아버지 기념사업처럼 받들기 시작했어요."

그녀는 (사)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의 총무를 맡고 있다. 최근 '몽양 여운형 선생 선양기금 마련'을 위한 응향 박춘숙 회갑전 '태양을 품은 도자' 전을 2018년 12월 26일부터 31일까지 경인미술관에서 열었다. 도자전 내내 그녀는 경인미술관을 지키며 오고 가는 사람들을 맞이했다. 최문순 도지사, 유은혜 교육부장관 등이 다녀갔다. 그러나 그녀가 가장 반가웠던 사람은 따로 있었다. 바로 아버지와 같은 조작간첩 피해자들이었다.

100만원 든 봉투
 
 뛰어내릴 수 없게 만들어진 창문 사이로 보이는 세계는 너무나 멀어 보였다.
 뛰어내릴 수 없게 만들어진 창문 사이로 보이는 세계는 너무나 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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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영동 대공분실의 상징인 검은 벽돌은 탁본에서도 그 차가움을 뿜어낸다
 남영동 대공분실의 상징인 검은 벽돌은 탁본에서도 그 차가움을 뿜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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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전을 시작할 때 판소리 한다고 어르신들이 오셨는데 여기 최양준 선생님과 구명우 선생님이 떡 하니 들어오시더라고요. 아버지와 같은 조작 간첩 피해자 분들이 오시니까 얼마나 든든하고 기쁘던지. 내가 아는 분들이 우리 전시회를 축하하고 기념해 주신다고 무대 위로 오르시는데 우리를 지켜주는 호랑이가 올라오는 것 같더라고요.

또 한 번은 도자전을 지키고 있을 때 일본에서 이철 선생님이 오셨어요. 선생님이 먼저 다가와서 아버지와 감옥에서 긴 시간을 보냈다며 환하게 웃어주시는데 생전에 아버지가 웃는 모습과 얼마나 똑같던지 정말 아버지가 돌아오신 줄 알았다니까요. 두 손을 꼭 잡고 안아주시더니 저에게 흰 봉투 하나를 건네시는 거예요. 전 받을 수가 없어서 몽양기념사업회에 내주고 가시라고 했어요. 나중에 기념사업회에서 전시회 기부금 정산을 하는데 글쎄 이철 선생님께서 그 봉투에 백만 원이나 넣고 가셨더라니까요. 얼마나 힘이 되고 든든하던지."


아버지는 돌아가시는 순간까지도 집에 계시지 않았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거리에 계셨어요. 눈도 안 보이는 분이 광우병 수입소 반대를 위한 촛불집회에 참석한다고 보성에서부터 서울까지 올라오시는 거예요.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늘 정의롭게 살아오신 아버지예요. 그런데 아버지가 남산 정보부에서 그 고통을 당하실 때 우리는 아무런 힘이 되지 못했어요. 그게 제일 미안하죠. 아직 한 번도 남산 정보부 건물에 가보지 못했어요. 기회가 된다면 꼭 그곳에 들러보고 싶어요."

정숙항은 남산 국가안전기획부 터를 둘러보며 아버지를 기억하고 싶어 했다. 그곳에 가면 왜 그녀의 아버지가, 또 그녀가 그렇게 힘든 시간을 보냈는지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탁본은 그녀가 아버지를 기억하는 또 다른 방법인 것이다.

정종희씨 약력
1933년 8월 전남 보성 출생
1946년 보성 회천소학교 졸
1947년 광주서중학교 중퇴
1950년 9월 일림산 입산
1951년 9월 총기부상으로 양쪽 눈 실명
1980년 11월 국가보안법위반으로 구속
1988년 12월 형집행정지로 출감
2008년 9월 뇌종양 투병 중 소천


* 후원문의
국가폭력의 기억을 질감으로 남기는 사람들

[탁본에 남긴 잔혹한 기억]
그녀는 왜 남영동 대공분실 머릿돌을 탁본했나 http://omn.kr/1hjit
고문실의 문구멍은 거꾸로 뚫려 있구나 http://omn.kr/1hm1v
그가 고문 받던 자리에는 아파트가 들어섰지만 http://omn.kr/1hm1x
"앞 못보는 아버지가 북한 암호 해독?" 참혹한 고문 흔적 http://omn.kr/1hsk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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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폭력피해자를 지원하는 "지금여기에"라는 단체에서 일합니다. 내가 살아가는 세상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변화시켜 나가기 위해서 활동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