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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어느 날 불타버린 조선 유일의 대학도서관"에서 이어집니다.

성균관의 도서관, 존경각에는 어떤 책이 있었을까? 초기에는 경(經), 사(史), 제자백가, 잡서 등 수만 권이 있었다고 한다. 성균관 자체가 과거 시험을 준비하는 교육기관이었던 만큼 사서, 오경 같은 유가 도서 위주였을 것으로 보인다. 책 수집은 자체적으로 발간해서 비치하거나 임금에게 하사 받거나 교서관(校書館) 같은 중앙 및 지방관청 발간물과 소장도서를 기증받는 방식이었다. <경국대전> '장문서조'(藏文書條)에는 지금의 납본제도처럼 나라에서 발간하는 모든 책을 1부씩 성균관에 보내도록 하는 규정이 있었다.

존경각 장서에 변화가 생긴 것은 1895년 고종이 성균관에 경학과(經學科)를 설치하면서부터다. 근대화를 위한 교육 기관으로 경학과를 설치하면서 사서오경 외에 역사, 지리, 수학 과목을 가르치게 되었고 존경각 장서에도 해당 분야 책이 추가되었다.

존경각의 장서와 구조, 운영은 어땠을까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인 존경각은 한때 수만 권의 책을 소장했다. 폐가제로 운영했고 책 대출과 반납을 담당하는 관원, 책색관을 두었다.
▲ 성균관 존경각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인 존경각은 한때 수만 권의 책을 소장했다. 폐가제로 운영했고 책 대출과 반납을 담당하는 관원, 책색관을 두었다.
ⓒ 백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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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각은 책을 어떻게 소장하고 관리했을까? 정면 3칸, 측면 2칸 크기인 존경각은 건물 벽면에 서가를 둘러 책을 보관했다. 책은 요즘처럼 세워서 보관하는 게 아니라 눕혀서 보관했다. 존경각이 어떤 방식으로 책을 분류했는지 알려지진 않지만, 동양에서 전통적으로 사용한 경(經), 사(史), 자(子), 집(集) 네 가지 분류를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존경각 내부는 마루방 구조로 책을 읽을 수 있는 열람석은 따로 없었다. 읽고 싶은 책을 대출받아 이용하는 방식, 즉 '폐가제'로 운영했다. 이용자는 주로 성균관 유생이었고 관원이나 다른 관청에서 빌려가기도 했으나 일반 백성은 이용할 수 없었다. 대학도서관이었으되 공공도서관은 아니었던 셈이다. 

존경각 책의 관리, 대출과 반납을 담당하는 관원이 따로 있는데, 책색관(冊色官)이라고 불렀다. 지금의 사서다. 설립 초기에는 성균관 관원 중 정4품 사예(司藝)와 정8품 학정(學正)이 책의 대출 반납을 담당하다가 선조 때를 전후로 정4품 사예와 정6품 전적(典籍)으로 바뀐다. 

화재와 전쟁뿐 아니라 책이 귀한 시절이라 분실되는 경우도 꽤 많았다. 정조 시대 학자 윤기(尹愭)는 성균관에서 지낸 20년 생활을 <반중잡영>(泮中雜詠)이라는 시로 썼는데, '만 권의 책이 있었는데 층층의 서가가 거의 비었다'는 기록을 남겼다. 정조는 존경각에 책을 새로 비치하면서 정5품 직강(直講)과 정6품 전적으로 하여금 책의 출납을 담당토록 했다. 책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할 경우 나라의 재산을 지키지 못한 죄를 법으로 다스리겠다고 하교했다. 왕실 도서관 규장각을 세워 통치에 적극 활용한 정조답다. 

존경각은 관원이 근무하는 낮에만 이용할 수 있어서 관원이 퇴근한 후부터 다시 출근할 때까지 책을 이용하지 못하는 불편이 있었다. 고종 때에 이르러 유생의 편의를 위해 학생 대표 장의가 책 대출을 담당토록 했다. 일 년에 한 번은 책의 습기를 햇볕에 말리는 포쇄(曝曬)를 시행했다. 존경각은 도서관의 3요소인 책, 사람, 시설을 두루 갖춘 곳이었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 존경각의 운명
 
비천당은 과거 시험 때 제2 과거 장소로 쓰였다. 해방 후에는 도서관 공간으로 쓰이다가 한국전쟁 때 불탔다. 1988년 중건되었다.
▲ 비천당 비천당은 과거 시험 때 제2 과거 장소로 쓰였다. 해방 후에는 도서관 공간으로 쓰이다가 한국전쟁 때 불탔다. 1988년 중건되었다.
ⓒ 백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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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까지 최고 교육기관으로 명맥을 이어오던 성균관은 갑오개혁으로 과거 제도가 폐지되고, 1910년 일제가 대한제국 국권을 강탈하면서 대학 교육기관 기능을 잃는다. 일제 강압에 의해 성균관이 문묘 제사만 담당하는 경학원(經學院)으로 바뀌자, 존경각 또한 '대학도서관'이 아닌 '책 보관소'로 전락한다. 존경각이 소장했던 5만여 권 중 3만여 권은 경성제국대학 설립 후 그 도서관으로 옮겨졌다.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으로 옮겨진 존경각 장서는 다시 존경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경학원으로 바뀐 성균관도 '친일파의 소굴'로 변질된다.  

일제가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전환하자 경학원은 1930년 명륜학원을 설립해 교육 활동을 이어간다. 명륜학원은 1939년 명륜전문학원, 1942년 명륜전문학교로 승격했다. 태평양 전쟁이 한창인 1943년 경학원이 갑자기 폐교되면서 존경각도 문을 닫았다.

일제에 의해 폐교된 성균관의 명맥은 해방 후 다시 이어질 수 있었으나 1946년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안(국대안) 파동 때 국립대학으로서 성균관의 부활은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1946년 9월 25일 심산 김창숙 선생 주도로 성균관대학이 출범했으나 고려부터 조선까지 국가 최고 교육기관의 위상은 아니었다. 성균관은 최고 인재를 양성하는 국립대학이 아닌 여느 대학 중 하나가 되었다. 

대학 교육기관 기능을 되찾으면서 존경각도 대학 부속 도서관으로 부활해, 1950년에는 7만 권에 달하는 장서를 갖췄다. 장서량이 늘면서 한때 근처에 있는 비천당을 서고와 열람실로 쓰기도 했다. 한국전쟁 때 북한 수송부대는 성균관대학에 주둔, 건물 곳곳에 군수물자를 보관했다. 유엔군이 서울을 탈환하자 북한군은 퇴각하면서 불을 질렀는데, 존경각 장서 역시 이 과정에서 불타고 만다. 

한국전쟁 후 서울로 복귀한 성균관대학은 명륜당을 수리해서 임시로 도서관으로 쓰기도 했다. 1953년 종합대학으로 승격한 성균관대학은 1956년부터 도서관 공사를 시작했다. 1959년 4월 10일 성균관대학교 중앙도서관이 문을 열면서 존경각은 새 도서관에 장서와 기능을 내주고 건물만 남게 되었다.

2000년 3월 성균관대학교는 중앙도서관 고서실과 대동문화연구원 자료실을 존경각이라는 이름으로 통합하여 동아시아학술원 산하 국학 및 동양학 전문 도서관으로 새롭게 출범시켰다. 건물만 남았던 존경각이 40년 만에 다시 부활한 것이다.

역사와 전통이 빛나는 대학도서관을 갖지 못한 이유
 
성균관대학교는 1953년 종합대학으로 승격, 1959년 4월 10일 중앙도서관을 개관했다. Y자 모양의 철근콘크리트 건물로 지은 구 중앙도서관은 신종식이 설계했다. 중앙도서관 신축과 함께 존경각은 장서와 기능을 넘기고 건물만 남았다.
▲ 1958년 성균관대학교 구 중앙도서관 신축 모습 성균관대학교는 1953년 종합대학으로 승격, 1959년 4월 10일 중앙도서관을 개관했다. Y자 모양의 철근콘크리트 건물로 지은 구 중앙도서관은 신종식이 설계했다. 중앙도서관 신축과 함께 존경각은 장서와 기능을 넘기고 건물만 남았다.
ⓒ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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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도서관의 흔적은 집현전, 홍문관, 규장각 같은 궁궐 안 국가 도서관을 제외하면 찾기 어렵다. 궁궐 밖에서는 성균관과 서원, 향교의 책을 모아둔 공간에서 도서관의 명맥을 찾을 수 있다. 성균관 존경각은 최고 교육기관에 존재했던 유일한 도서관이라는 점에서 의미 있는 공간이다. 

성균관은 이탈리아 볼로냐대(1088년), 영국 옥스퍼드대(1096년), 프랑스 소르본대(1150년), 영국 케임브리지대(1209년), 독일 하이델베르크대(1386년), 독일 쾰른대(1388년)에 이어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오랜 역사를 갖는 대학으로 꼽히기도 한다. 하지만 국권을 잃고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조선 최고 교육기관과 도서관의 전통은 이어지지 않고 끊긴다. 

해방 후 미군정은 일제 통치기구를 그대로 존속시킨 것처럼 교육 분야도 '현상 유지' 정책을 취했다. 국립대학 역시 성균관의 부활이 아닌 일제가 만든 경성제국대학의 유지와 개조를 택했다. 미군정의 대학 정책도 영향을 미쳤지만, 시간을 거슬러 우리가 자력으로 근대화에 성공하고 그 중심에 성균관 인재가 있었다면, 또는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 과정에서 유림과 성균관 인재가 전면에 나섰다면 성균관과 존경각의 위상은 달라졌을 것이다. 

3.1 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에 유림이 단 한 명도 없음을 알고 심산 김창숙은 통곡했다고 했던가. 심산은 망국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유림이 독립운동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아 '더럽고 썩은 유림'이라는 비판을 피할 길이 없음을 통탄했다. 한일 강제 병합 후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은 상당수 또한 유림이자 양반이었다. 

유교 지배이념 유지와 양반계급 인재 재생산 기관인 성균관에게 그 질서를 부수고 변화를 선도하라는 건 애초부터 무리한 기대였을까. 옥스퍼드 보들리언(Bodleian) 도서관, 케임브리지 렌(Wren) 도서관, 하버드 와이드너(Widener) 도서관 같이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대학도서관을 우리가 가질 수 없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존경각 책이 흩어져 사라진 것처럼, 조선 왕조를 지탱하던 제도와 기반도 붕괴했다. 그리고 고려 국자감 때부터 이어온 성균관의 빛나는 역사와 전통도 여기서 그쳤다. 성균관과 존경각, 그 이름은 이어졌지만 위상은 크게 달라졌다. 한때 조선을 지탱하는 인재의 산실 성균관과 인재 양성을 뒷받침한 존경각은 그래서 더 쓸쓸해 보인다. 

[성균관 존경각]

- 서울 종로구 성균관로 31
- 주소 : 서울시 종로구 성균관로 31
- 이용시간 : 하절기 09:00 - 17:30 동절기 09:00 - 16:30 
- 휴관일 : 연중 무휴. 
- 이용자격 : 자격 제한 없음. 무료 
- 홈페이지 :
http://www.skk.or.kr
- 전화 : 02-760-1472
- 운영기관 : 성균관

태그:#존경각, #성균관, #도서관, #대학도서관, #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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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해서 책사냥꾼으로 지내다가, 종이책 출판사부터 전자책 회사까지 책동네를 기웃거리며 살았습니다. 책방과 도서관 여행을 좋아합니다. <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에 이어 <세상과 도서관이 잊은 사람들>을 쓰고 있습니다. bookhunter7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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