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의 왕> 영화 포스터

▲ <국경의 왕> 영화 포스터 ⓒ 무브먼트,인디스페이스



임정환 감독의 장편 데뷔작 <라오스>(2014)는 이상한 영화다. 내용은 간단하다. 졸업영화를 찍던 영화학도 원식(정혁기 분)과 현철(조현철 분)이 연출 방향을 놓고 의견 대립을 하다가 작업이 중단되고 함께 공부했던 정환(임정환 분)이 머무는 태국으로 돈을 벌기 위해 갔다가 벌어지는 갖가지 사건을 담았다.

영화는 '1. 현철과 원식', '2. 태국', '3. 라오스', '4. 정환과 상범', '5. 새로운 아침', '6. 남과 북', '7. 모든 길은 한곳으로 통한다' 7개 챕터로 짜여졌다. 영화는 얼핏 기승전결인 듯하나 딱히 그런 구조로 보기 힘들다. 우연은 계속되고 모호함은 쌓여간다. 이상한 전개는 계속된다. 사라진 인물이 유령처럼 출몰하기도 한다.

<라오스>의 기이한 영화적 체험은 "처음부터 끝까지 말도 안 되는 스토리(네이버 hang****)"와 "영화의 공기를 잡아내려고 애썼던 영화(이용철 영화평론가)"란 극과 극의 반응을 받았다. 이상한 영화다운 평가였다.

<라오스>는 즉흥성과 우연성이 빚은 흥미로운 결과물이다. 임정환 감독은 '인디포럼 데일리'와 인터뷰에서 "촬영 당시엔 <라오스>가 아니라 단지 어떤 한 편의 영화를 완성해야겠다고만 생각했기 때문에 정해 놓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면서 "친구들과 함께 계획 없이 영화를 만들기 위한 여정을 떠나서 과연 어디까지 밀어붙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가졌던 것 같다"고 제작 배경을 설명한다. 그는 고유한 영화 문법을 찾고자 했다.
 
<국경의 왕> 영화의 한 장면

▲ <국경의 왕> 영화의 한 장면 ⓒ 무브먼트,인디스페이스


<국경의 왕>은 임정환 감독의 두 번째 장편 연출작이다. 그는 2015년 당시 차기작으로 구상하던 <국경의 왕>을 "영화계를 은퇴한 현철과 원식이 태국에서 만나서 국경의 '왕'이라는 남자를 찾아 국경을 넘나들며 액션을 펼치는 위험천만한 범죄물! 장르는 가서 되는 대로!"라고 소개한 바 있다. 하지만, 완성된 영화는 처음 공언과 완전히 딴 판이다.

<국경의 왕>에서도 임정환 감독의 자유로운 영화 만들기는 변함이 없다. 이번에는 시나리오를 1/4 정도만 쓰고 그 뒤부턴 가서 벌어지는 대로 만들었다고 한다. 처음 밝힌 영화와 완성된 영화 사이에서 공통점은 제목 <국경의 왕> 정도다.

<국경의 왕>은 '국경의 왕'과 '국경의 왕을 찾아서' 두 부분으로 나뉜다. 두 챕터는 내용에서 논리적으로 맞질 않는다. '국경의 왕'에서 인물 A를 연기한 배우가 '국경의 왕을 찾아서'에선 다른 상황의 인물 B를 연기하는 식이니까 말이다. 어디가 실재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가?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국경의 왕'은 동철(조현철 분)과 유진(김새벽 분)이 쓴 두 개의 시나리오를 합한 (극 중) 허구에 해당한다. 먼저 보여주는 건 동철이 쓴 각본으로 "여자 친구가 잠시 없는 사이에 동철과 유진이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는 내용을 다룬다. 다음엔 "동철이를 제외한 나머지 등장인물들이 전부 다 죽는다"는 유진의 시나리오가 이어진다. 하나의 배우는 두 시나리오에서 다른 인물을 연기한다.

'국경의 왕을 찾아서'는 폴란드를 여행한 유진이 우크라이나에서 동철을 만나는 (극 중) 현실에 속한다. 영화의 실재와 허구의 경계선은 두 사람이 요즘 쓰고 있는 시나리오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면서 비교적 명확히 그어진다.
 
<국경의 왕> 영화의 한 장면

▲ <국경의 왕> 영화의 한 장면 ⓒ 무브먼트,인디스페이스


'국경의 왕을 찾아서'는 공간, 상황, 대화 등 유진과 동철이 일상에서 접한 경험과 그 속의 감정이 시나리오에 어떤 형태로 투영되는지를 보여준다. 유진은 동철에게 "그런 내용으로 영화 만들 수 있어요?"라고 묻는다. 앞선 '국경의 왕'은 그것이 가능함을 증명하는 결과물이다. 이 속엔 로드 무비, 버디 무비, 미스터리, 범죄물, 코미디 등 다양한 장르적 감각이 숨 쉬고 있다. 장르의 기묘한 결합은 임정환 감독과 홍상수 감독을 구분 짓는 지점이다.

제목 <국경의 왕>은 무슨 뜻일까? 임정환 감독은 '독립영화 매거진 나우'와 인터뷰에서 "원래 (의도했던) <국경의 왕>을 찍으려고 했다"고 운을 뗀 후 "절반쯤 하다 보니까 영화상의 거대한 전환이 일어나는 부분들 이후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어떻게 보면 제가 고민하는 모습을 영화 만드는 동철과 유진이 느끼는 것에 투영시켜서 표현했다"고 밝혔다.

'국경의 왕'은 처음 목표한 영화의 소재다. 영화는 그것을 이야기하는 데 실패한다. 하지만, 계속 찾고자 하는 '무엇'이 되어 영화를 이끈다. 그런 여정 속에서 임정환 감독은 실재와 허구, 영화의 안과 바깥을 오가며 영화 만들기에 관한 자기고백을 들려준다.
 
<국경의 왕> 영화의 한 장면

▲ <국경의 왕> 영화의 한 장면 ⓒ 무브먼트,인디스페이스


'국경의 왕'은 임정환 감독의 영화 세계를 표현하는 기호이기도 하다. <라오스>는 태국과 라오스, <국경의 왕>은 폴란드와 우크라이나란 익숙하지 않은 낯선 공간에서 벌어진 우연의 서사였다. '국경'은 익숙함과 낯섦 사이에 위치한 '경계'다.

감독은, 영화는 경계를 넘길 시도한다. 경계를 넘겠다는 선언은 형식과 화법에도 유효하다. '왕'은 경계에서 나만의 영화적 '영역'을 찾겠다는 의지의 다른 표현이다.

<라오스>와 <국경의 왕>은 갑자기 나타난 이상한 영화다. 또한, 한국 영화계에 반드시 필요한 이상한 영화다. 꼭 기억해야할 이상한 영화다. 제43회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회 특별상 수상작.
국경의 왕 임정환 조현철 김새벽 정혁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초당 24프레임의 마음으로 영화를 사랑하는 남자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