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경부고속도로 톨게이트 입구 만남의 광장에는 높이 4.8m의 대형 동상 하나가 세워져 있다. 군복을 갖춰 입고 총을 든 채 사뭇 비장한 표정을 지으면서 전투에 참여하기 위해 어디론가 나서는 듯한 형상이다. 여성 독립운동가 동상 가운데 군복을 입고 총을 든 대한민국 유일의 동상이라고 한다. 바로 약산 김원봉 선생의 부인 박차정 의사의 동상이다.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 어느 누구보다 치열한 삶을 살았지만 박차정 의사는 지금까지 거의 잊히다시피 한 인물 가운데 하나다. 우리 사회가 그동안 여성 독립운동가들에 대해 상대적으로 관심을 덜 기울여온 탓이다. 2일 방송된 SBS <뉴스토리> '숨은 여성 독립투사 박차정' 편에서는 박차정 의사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그리고 그동안 왜 잊혀왔는가를 그녀의 파란만장했던 삶의 궤적을 통해 짚어봤다.
 
 SBS <뉴스토리>‘숨은 여성 독립투사 박차정’ 편의 한 장면

SBS <뉴스토리>‘숨은 여성 독립투사 박차정’ 편의 한 장면 ⓒ SBS

 
불꽃 같았던 항일독립투사 박차정 의사의 삶

부산 동래구에 위치한 박차정 의사의 생가는 지난 2005년에 복원됐다.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으로 국권을 상실한 1910년, 박차정은 이곳에서 3남 2녀 가운데 넷째로 탄생했다. 부친은 당시 탁지부(국가 전반의 재정을 맡아 보던 중앙관청)에서 측량기사로 일했는데, 의도치 않게 일본 제국주의의 수탈에 일조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고 만다. 박차정 의사가 9살 때, 그러니까 1918년의 일이다. 박차정의 어머니는 남편의 자결 후 삯바느질을 하며 다섯 남매를 어렵사리 키워왔다. 

방송에 따르면 어머니의 친척 중에는 항일활동을 하던 이들이 유독 많았는데, 사촌 김두봉은 주시경 선생의 제자인 한글 학자였으며, 육촌 김두전은 약산 김원봉 선생과 의형제를 맺고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인물이라고 한다. 박차정은 물론 박문희와 문호 등 두 오빠까지 항일 무장투쟁에 나서게 된 데에는 이러한 집안 배경이 작지 않게 작용하고 있었던 셈이다. 

1919년, 박차정의 집에서 700m가량 떨어진 부산 동래시장에서는 큰 사건 하나가 발생한다. 당시 장터에 있던 사람들이 모여들어 너나 할 것 없이 태극기를 흔들면서 독립만세를 외치기 시작한 것이다. 이른바 부산 3.13만세운동이다. 일본 경찰의 예리한 총칼도 들불 같이 번져나가던 이들의 기세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당시 소녀였던 박차정이 이 운동에 참여했는지는 알려진 바 없으나 어쨌든 그녀가 항일의식을 갖추고 이를 키워온 데엔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짐작되는 대목이다. 
 
 SBS <뉴스토리>‘숨은 여성 독립투사 박차정’ 편의 한 장면

SBS <뉴스토리>‘숨은 여성 독립투사 박차정’ 편의 한 장면 ⓒ SBS

 
부산 동래구에 위치한 동래여고는 일제 강점기 시절 동래 일신여학교로, 당시 부산 지역의 항일운동을 주도했던 곳이다. 방송에 따르면 부산 3.13만세운동이 일어나기 이틀 전 이미 이곳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만세운동이 벌어졌다고 한다. 그로부터 6년 뒤 박차정은 이 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여고생이 된 박차정은 재학시절 일제에 항거하는 동맹휴교를 주도했으며, 졸업 후에는 항일 여성운동단체인 근우회의 핵심간부로도 활동했다. 

이송희 신라대 명예교수는 "근우회라고 하는 조직은 사회주의 계열과 민족주의 계열이 같이하며 여성운동을 이끌어가던 전국적인 규모의 조직으로 만들어진다. 박차정 의사가 맡은 업무는 출판과 선전이었다"고 말한다. 박차정 의사는 1930년 1월 서울 11개 학교와 연합 시위를 벌인 이른바 근우회사건 배후 세력으로 지목돼 두 차례나 투옥당해 모진 고초를 겪어야 했다. 

고교시절과 졸업 후 펼친 항일운동은 박차정 의사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꾼 계기가 되었다. 일제의 감시가 심해져 더 이상 국내에서 활동할 수 없었던 박차정은 당시 의열단으로 활동하던 두 오빠의 도움을 통해 중국으로 망명, 그곳에서 의열단장이던 김원봉을 만나게 된다. 당시 22세였던 그녀는 그렇게 하여 그와 부부의 연을 맺게 된다. 

여성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 기울여야

중국으로의 망명 직후 박차정은 의열단 핵심 단원으로 활동하면서 조선혁명간부학교의 여자 교관이 된다. 아울러 항일단체 5곳이 연합하여 만들어진 민족혁명당의 산하 기관인 남경조선부인회도 결성하게 된다.

이송희 교수는 "남경부인회가 의미가 있는 건 여성들에게 '민족해방운동의 주체적인 역할을 하자', '전투에 나가자' 이런 얘기들이 나오기 시작한 데다, 여성이라고 하여 보조 역할만이 아니라 '전사가 되어 직접 나가자', '여성해방과 민족해방을 위해 같이 나가자'와 같은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한 점"이라고 주장했다. 
 
 SBS <뉴스토리>‘숨은 여성 독립투사 박차정’ 편의 한 장면

SBS <뉴스토리>‘숨은 여성 독립투사 박차정’ 편의 한 장면 ⓒ SBS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김원봉은 중국정부와 협의하여 이듬해 항일무장부대인 조선의용대를 창립하게 된다. 방송에 따르면 당시 의용대원들은 대일본군 선전전과 포로 신문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중국 부대와 함께 항일전투에도 참여했다고 한다. 박차정은 조선의용대에서 부녀복무단장으로 활동하며 일본군과의 무장투쟁에도 뛰어들었다.

그러나 1939년 2월 중국 장시성에서 벌어진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총상을 입게 되고 그 후유증에 시달리다가 결국 눈을 감게 된다. 1944년 5월27일 박차정은 조국이 해방되는 것을 미처 보지 못한 채 그렇게 34세의 나이로 짧은 인생을 마감하고 만다. 

해방 후 김원봉은 부인 박차정을 곁에 두고 싶어 자신의 고향 땅에 그녀를 묻는다. 하지만 그 후 김원봉은 북으로 건너갔고 박차정의 유골은 경남 밀양의 야산에 홀로 남겨졌다.

이후 박차정은 우리에게 잊힌 존재가 됐다. 박차정 의사는 항일독립투쟁 공적에도 불구하고 광복 이후 오랫동안 사회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아야 했다. 항일운동에 앞장섰던 큰오빠 박문희, 작은오빠 박문호는 사회주의운동가로 낙인찍혔다. 이로 인해 그들의 가족도 수십 년간 감시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SBS <뉴스토리>‘숨은 여성 독립투사 박차정’ 편의 한 장면

SBS <뉴스토리>‘숨은 여성 독립투사 박차정’ 편의 한 장면 ⓒ SBS

 
박차정 의사의 후손 박의영씨는 이에 대해 "아버지나 고모님이 살아서 내 앞에 계시다면 왜 독립운동을 했느냐며 원망하고 싶다. 다른 사람들처럼 행복한 가정생활을 못 누리고 오히려 빨갱이 집안이라는 누명을 뒤집어쓴 채 살아왔다"며 그간의 고초를 털어놓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동안 유족들의 노력으로 이들에 대한 연구 작업이 활발히 진행돼왔고, 박차정 의사는 1995년 유관순 열사가 받았던 건국훈장독립장을 뒤늦게 받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우리나라 독립유공자는 모두 1만5180명이다. 이 가운데 여성은 357명에 그친다. 박차정 의사가 살아온 삶의 궤적을 돌아보면서 그동안 상대적으로 소홀히 했다고 볼 수밖에 없는 여성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기울이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박차정 의사뿐 아니라 많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연구가 거의 안 되어 있다. 3.1절 100주년을 계기로 여성독립운동가도 경중을 따지지 말고 다시 발굴하고 재조명하여 그분들이 주는 의미가 무언지를 찾아내는 그런 일을 좀 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SBS <뉴스토리>‘숨은 여성 독립투사 박차정’ 편의 한 장면

SBS <뉴스토리>‘숨은 여성 독립투사 박차정’ 편의 한 장면 ⓒ SBS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새날이 올거야(https://newday21.tistory.com)'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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