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서울특별시 강남구 대치동에는 김은희(박지후 분)라는 이름을 가진 중학교 2학년 학생이 있었다. '사교육 1번지' 로 불리는 오늘날 대치동의 위세 정도는 아니었지만, 부유한 집안에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대거 몰려있는 대치동에서 공부를 썩 잘하지도 그렇다고 눈에 띄는 특기도 없었던 은희는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별 관심을 못 받는 평범한 소녀처럼 보인다. 

하지만 은희는 착하지만 마마보이에 바람둥이 기질이 다분한 남자친구 때문에 첫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으며, 은희의 매력에 반해 그녀를 따르는 귀여운 후배도 있다. 자신의 일상을 만화로 풀어내는 특별한 재주를 가지고 있으며, 인생의 가치관을 변화 시킨 멋진 스승 영지(김새벽 분) 선생님을 만났다. 
 
 성수대교가 무너진 1994년, 중학교 2학년 소녀의 성장담을 다룬 영화 <벌새>(2018)

성수대교가 무너진 1994년, 중학교 2학년 소녀의 성장담을 다룬 영화 <벌새>(2018) ⓒ (주)엣나인필름

 
1994년 대치동에 살면서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고 있는 여자 중학생의 잔잔한 일상을 담는 것처럼 보이는 <벌새>(2018)는 1994년 10월 21일 실제 일어난 성수대교 붕괴를 기점으로 소녀의 삶에 변화가 찾아온다. 그렇다고 사회적 재난을 다룬 여타 영화들처럼 주인공의 인생이 극적으로 달라진 것은 아니다. 성수대교가 무너진 뒤에도 소녀는 가족들과 함께 모여 밥을 먹고, 학교에 가는 일상을 이어나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수대교가 무너지기 전과 후의 소녀의 삶은 분명히 달라져 있었다. 

1994년은 당신에게 어떤 해입니까

1994년은 우리에게 어떤 해로 기억될 수 있을까. 유독 무더웠던 1994년. 멕시코에서는 전 세계 축구인들의 축제 월드컵이 열렸고, 영원히 죽지 않을 것 같던 김일성 북한 주석이 사망했다. 하지만 이보다 더 큰 충격적인 뉴스는 성수대교 붕괴였다. 성수대교가 무너진 이듬해에는 삼풍백화점이 붕괴 되었고, 성수대교 붕괴 사건 이후 정확히 10년 뒤에는 세월호 참사로 단원고 학생들 포함 3백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성수대교 붕괴 사건에는 <벌새>를 연출한 김보라 감독의 자전적 경험이 녹아 들어 있다. 성수대교가 무너질 당시 감독의 언니는 대치동에서 무학여고를 다니고 있었는데, 언니의 고등학교 졸업 앨범을 보면 유독 검은띠가 둘러진 사진들을 보면 묘한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영화에는 성수대교 붕괴사고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사회 전반적인 애도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수많은 학교 친구들이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사고를 당하지 않은 학생은 예전과 변함없이 학교를 가야 했으며. 어른들 또한 자기 자식과 같은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사고를 당한 것에 안타까워 하면서도 내 자식은 무사 하다는 사실에 가슴을 쓸어 내리며 평상시와 다를 바 없이 밥을 먹는다. 성수대교가 무너진 뒤에도 사고를 겪지 않거나 가족, 지인을 잃지 않는 사람들은 성수대교가 무너져서 많은 사람들이 죽은 것에 잠시 안타까워 할 뿐, 사고가 일어나기 전과 같은 일상을 영위하고자 한다. 
 
 성수대교가 무너진 1994년, 중학교 2학년 소녀의 성장담을 다룬 영화 <벌새>(2018)

성수대교가 무너진 1994년, 중학교 2학년 소녀의 성장담을 다룬 영화 <벌새>(2018) ⓒ (주)엣나인필름

 
하지만 <벌새>의 은희에게 성수대교 붕괴는 그녀의 인생에 있어 가장 큰 전환점으로 기억되는 거대한 사건이다. 2014년 발생한 세월호 침몰사고가 동시대를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적잖은 충격과 인식 변화를 안겨준 것처럼, 1994년을 살던 은희에게 성수대교 붕괴 또한 그런 의미로 다가온 듯 하다.

그런데 은희는 성수대교 붕괴로 누군가를 잃은 아픔을 드러내 보이기 보다 혼자 감내하는 쪽을 선택한 것 같다. 은희는 자신의 가족과 친구들에게 성수대교 사고로 자신이 사랑하는 누군가를 잃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대신, 빠른 성장과 효율만 강조했던 비정상적인 사회시스템으로 무너진 성수대교로 인해 누군가가 죽었다는 사실을 똑똑히 인정하며, 사고에 대한 망각과 끊임없이 맞서려고 하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공부 잘하는 오빠에게 더 많은 관심을 쏟는 부모의 무심함과 툭하면 동생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오빠 때문에 남몰래 끙끙 앓아야 했던 은희는 앞으로 부당한 일을 당하면 피하지 말고 맞서라고 알려주는 영지를 만나 그동안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다. 남성중심적 가부장적 문화가 만연한 가정과 사회에서 숨 죽이며 신음해야 했던 소녀가 그녀보다 일찍 세상을 깨치고 사회의 부조리함과 맞서 싸우고자 하는 여성 스승(선배)를 만나 그간 자신을 가두고 있던 알에서 스스로 깨어 나오는 성장 과정은 경이롭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성수대교가 무너진 1994년, 중학교 2학년 소녀의 성장담을 다룬 영화 <벌새>(2018)

성수대교가 무너진 1994년, 중학교 2학년 소녀의 성장담을 다룬 영화 <벌새>(2018) ⓒ (주)엣나인필름

 
올해 열린 제69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어린이, 청소년 성장 영화를 다룬 제너레이션 14plus(14세 이상 관람가) 부문에서 심사위원이 선정한 대상을 수상한 <벌새>는 상업 장편 데뷔작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의 작품적인 그리고 연출적인 성숙함을 보여주면서 주인공의 탁월한 심리묘사를 통해 관객 모두를 통하게 했다는 평과 함께, 페미니스트 성장 스토리라는 찬사를 한몸에 받기도 했다.

자기보다 앞서 알에서 깨어난 여성을 통해 이전과 다른 세상에 눈을 뜬 소녀는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고통을 피하거나 외면하지 않는다. 다만 바라볼 뿐. 그렇게 주변 사람들로부터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하며 여기저기 헤매고 다닌 소녀는 자신만의 중심을 잡고 세상을 바라보는 성숙한 존재가 되었다. 여성의 시선에서 여성의 삶을 바라보는 성숙한 시선과 태도가 빛나는 여성 영화의 정수로 평가될 만하다. 

지난해 열린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 뉴 커런츠 상영작으로 화제가 된 이후, 베를린국제영화제 제네레이션 14plus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다시 한번 영화 애호가들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벌새>는 올 상반기 개봉을 앞두고 있다. 
 
 성수대교가 무너진 1994년, 중학교 2학년 소녀의 성장담을 다룬 영화 <벌새>(2018)

성수대교가 무너진 1994년, 중학교 2학년 소녀의 성장담을 다룬 영화 <벌새>(2018) ⓒ (주)엣나인필름

벌새 김보라 감독 성수대교 대치동 베를린국제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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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지금 여기에서 여성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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