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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정부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상해 임시정부 설립에 연원을 두려 하려 하고, 같은 해 일어난 3.1운동의 정신에 사상적 계승을 하려 많은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그 중에 하나가 3.1운동의 단초가 되었던 고종의 국장(國葬)을 재현하려는 행사이다. 이 행사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지만 3.1운동의 정신에 대해 다시 한 번 환기하자는 뜻에 반대하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3.1운동은 1919년 민족대표 33인이 인사동에 있는 요릿집 태화관(泰和館)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촉발된다. 그런데 이런 중요한 행사를 고급 요릿집에서 하고 자발적으로 일본 경찰에 연락하여 잡혀간 일에 대하여 일부 비판적인 의견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태화관의 모습
 일제강점기 태화관의 모습
ⓒ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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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2년 전 유명 국사 강사 설민석씨가 당시 민족대표 33인이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을 한 것에 대해 '룸살롱 술판'으로 언급하고, 대표 손병희의 부인인 주옥경(朱鈺卿, 1894-1982)을 '술집 마담'이라고 칭해 많은 이들의 공분을 산 적이 있다. 그의 말은 이러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룸살롱이 있었습니다. 태화관이라고. 대낮에 그리로 간 거야. 그리고 거기서 낮술을 막 먹습니다. 마담 '주옥경'하고 '손병희'하고 사귀었어요. 나중에 결혼합니다. 그 마담이 DC(할인) 해준다고, 안주 하나 더 준다고 오라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그의 말은 많은 이들을 분노케 했다. 이 사건은 단지 독립운동을 했던 인물들에 대한 학문적 비판의 시각이라기보다는 극히 일면만을 본 매우 경박한 수준의 지식 전달이었다. 이 사건으로 비판을 받은 설민석씨는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건 민사소송에서 25~100만 원의 위자료를 배상하라는 판결을 받는다. 

그런데 이 사건으로 가장 많은 명예 훼손을 당한 인물은 바로 평양 기생 출신으로 태화관에서 근무했던 주옥경이었다. 그는 기생이었으나 손병희를 만나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는 개척적인 인물이었다. 이미 손병희와 결혼도 하여 다른 저명한 인물들에게도 대접을 받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국사 강사의 한 마디로 주옥경이란 인물은 술값이나 할인해주는 술집 마담이 되어 버렸다. 

그가 언급한 '주옥경'은 그리 단순한 인물이 아니다. 비록 불우한 가정 형편으로 기생이 되었지만 평생 삶을 개척하며 살아간 인물이었다. 그는 평양 출신으로 평양 권번의 다양한 교육을 받아 많은 재주를 보유한 특별한 예능인이었다. 그는 단정한 용모로 웃음을 파는 기생과는 다른 인물이었다. 당시 평양 기생 중에는 예기에 능한 인물이 많았는데, 이들은 당대 저명한 명사들과 어울리며 시와 그림을 논하고 춤과 노래를 보여주는 수준 있는 예능인이었다.
 
 일제강점기 기생들의 그림 그리는 모습
 일제강점기 기생들의 그림 그리는 모습
ⓒ 황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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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옥경의 기명은 '주산월(朱山月)'이었다. 주옥경은 1894년 평양에서 태어나 14세에 평양의 기생학교에 들어가 여러 기예를 배웠다. 19세가 된 1912년, 서울로 올라와 '명월관'에서 일하게 된다. 명월관은 1918년에 화재로 불 타 없어지고, 명월관 주인이었던 안순환은 순화궁 터를 매입해서 '태화관'이라 이름 짓고 새로 개업한다.

주옥경은 여러 종류의 소리를 잘 했으며, 또한 가야금·양금·남무(男舞)·입무(立舞)·수심가 등 못하는 것이 없을 정도로 다재다능하였다. 그림에도 능하여 특히 사군자를 잘했다. 그는 당대 저명인사들과 가까이 했는데, 단지 기생과 손님 이상의 예술가적 소통이 있는 특별한 인물이었다.

주옥경은 1915년 손병희와 결혼을 한 후에 본명의 한자를 새로이 바꿔 '주옥경(朱鈺卿)'이라는 이름으로 생활한다. 그러니 3.1운동 때에는 이미 기생의 신분에서 벗어나 손병희의 부인 역할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러니 설민석 강사의 의견은 '주산월'이 비록 기생 출신이었다 하더라도, 그녀의 입장에서 보면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설령 현직 기생이라 하더라도, 함부로 입에 담을 말은 아니다.

화가로서의 주옥경

주옥경은 특히 소리로 유명하였지만, 그림에서도 일가를 이루었다. 그의 그림은 매우 격조가 높았으며, 글씨 또한 일가를 이루었다. 평양 기생으로 그림으로 유명한 이 중에 강취운(康翠雲), 강윤화(康潤嬅) 등이 있지만, 그림의 격조로는 주옥경이 이들 못지 않았다. 그녀의 그림과 글씨가 일취월장한 데는 손병희와 가까워지며 주변의 명망 있는 인사들과 교류하며 그들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주옥경 <국화>
 주옥경 <국화>
ⓒ 황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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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작품으로 <국화> 한 점이 전한다. 이 작품은 오세장이 소장하던 것으로, 1913년 명월관에서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을 위하여 그린 것이다. 고급 옥판선지에 먹만으로 국화를 그렸다. 간결하게 쳐올린 품새가 여인 특유의 간결한 필치를 느끼게 한다. 먹의 농담을 잘 조절하여 자연스러운 솜씨를 보이는 실력이 예사 실력이 아님을 보여준다. 

글씨 또한 다른 기생들의 글씨와 달리 필치와 결구가 뛰어나다. 여기(餘技)로 그리는 규방 여인의 수준을 넘어서 전문 서화가의 솜씨가 보이는 매우 능란한 솜씨이다. 필시 오세창이나 손병희 등과 같은 서화에 능한 거물 인사들과의 교류하며 얻은 결과일 것이다. 그림에 쓰여 있는 화제 글씨를 보면 다음과 같다.
 
"1913년 명월관에서 위창(葦滄) 선생을 위하여 패상(浿上)여사 주취미(朱翠眉)가 그리다."

1913년에 그린 것이니 서울에 올라온 이듬해에 그린 것이다. 마침 오세창 등과 그림을 그리는 '석화(席畵)' 자리가 있었던 모양이다. 돌아가며 한 점씩 그렸을 것이다. '패상(浿上)'이라는 것은 평양을 이르는 말이다. '주취미(朱翠眉)가 그리다'라 하였는데, '취미(翠眉)'는 화가로서의 호이다. 사람들은 그녀를 대접하여 '취미여사'라 불렀다. 그러니 본명은 '주옥경(朱鈺卿)', 기명은 '주산월(朱山月)', 화가로서는 '주취미(朱翠眉)'이다. 

이 그림에서 보듯 주옥경의 빼어난 붓놀림과 예술적 감수성은 당대의 명사들과 만나 더 한층 높은 경지의 격조를 이루어내었다. 이러한 그녀의 매력이 당시의 쾌남아 손병희를 만나 사랑의 결실을 이루게 한 듯하다.

사회활동가로서 주옥경

주옥경은 다른 기생들과는 어려서부터 행동이 남달랐다. 그는 1912년 19세 때 상경한 이후 1913년 김명옥 등과 함께 '무부기조합(無夫妓組合)'을 설립한다. 이 조합은 나중에 서울 최고의 기생 조합인 '다동기생조합(茶洞妓生組合)'이 된다. 당시 서울의 기생들은 '기부(妓夫)'를 두고 있었다. 기부는 실제 혼인관계에 있는 남편이 아니라, 기생의 후원자를 자칭한 가상 남편과 같은 존재였다. 요즘 말로 하자면 '매니저'였고, 저급한 용어로 '기둥서방'이었다. 

기부는 서울 출신 기생들의 오랜 전통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서울 기생들은 주옥경의 행동을 매우 불편하게 생각하였다. 그럴수록 서도 출신 기생들은 기부가 없는 기생임을 자처하며 타 지역 출신 기생들의 서울 정착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당시 '무부기' 주장은 '기생계의 혁명'이라고까지 불렸다. 이러한 혁명적 사고를 주도한 이가 주옥경이었다.

이들 평양 출신의 무부기 기생들은 1914년 이후부터 전격적으로 공연활동을 펼치기 시작한다. 이들의 공연 레퍼토리는 서울 출신 기생들의 것과는 달랐다. 기존의 '궁중 가무'에서 벗어나 '민간 가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금녀의 영역이었던 연희 종목을 수용했고, 당시 새로운 공연물이었던 여성 창극에도 도전하였다. 창작 궁중무용 및 서양 춤에도 도전했다. 이들의 공연은 20세기 여성들의 다양한 공연 종목을 개척하고 창작함으로써 한국근대공연예술사에 크게 기여한 사건이었다.
 
 손병희와 주옥경
 손병희와 주옥경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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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후 손병희는 감옥생활을 하며 크게 건강을 해친다. 손병희는 만성위장병이 있었기 때문에 주옥경은 무너져가는 초가집 하나를 빌려 손병희의 옥바라지를 시작한다. 바로 이것이 서대문 형무소 옥바라지의 시초였다. 주옥경의 눈물겨운 옥바라지에도 불구하고 손병희는 1922년 11월 28일에 뇌일혈로 쓰러진다. 반신불수 상태에서도 수감 생활을 계속 하다가 병세가 극도로 악화된 다음해 10월 22일에야 병보석으로 출옥하게 된다. 이후 병석에 있다가 2년 후인 1922년 5월 19일에 별세한다. 

29세에 남편을 잃은 주옥경은 이후 여성의 권리 향상을 위해 노력하고, 한편으론 잡지를 발행하여 계몽운동을 펼치기도 한다. 1927년에는 일본으로 유학을 가 영어를 공부하기도 한다. 주옥경의 이런 여성운동에 대한 매진은 당시에 큰 화제였다. 이렇듯 주옥경은 당대에도 존경받는 여성 지도자였다. 해방 후에도 천도교를 이끌며 광복회 부회장, 천도교 종법사 등을 역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한다. 이런 활동으로 방정환의 부인 손용화를 비롯해 손병희의 딸들은 주옥경을 깍듯이 어머니로 모셨다고 한다.

민족대표 33인 유족회를 대표하여 회장을 맡기도 한 주옥경은 28세 때 홀로 되어 죽을 때까지 수절한 여성운동가였다. 그는 '수의당(守義堂)'이라는 도호(道號)를 썼는데 이는 바로 '의암을 지킨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었다. 아쉽게도 1982년 88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이상의 삶을 보면 주옥경은 단순히 '기생'이나 '술집 여인'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없는 주체적 의지가 강했던 신여성이었다. 그에 대한 평가를 달리 해야 할 이유이다. 손병희의 죽음 후 한 평생 수절하며 남편을 그리워하면서도, 사회적 활동도 게을리 하지 않은 주옥경의 삶의 모습은 그녀의 젊은 날의 삶과 대비되며 보는 이를 애잔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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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국문학과 석사 과정을 마치고, 고교 국어 교사를 11년간 하였다. 2001년 교사 퇴직 후 줄곧 미술사 연구에 몰두하였다. 저서에 《경매된 서화》 (김상엽 공저, 시공사, 2005)가 있고, 논문에 <소치 허련의 완당 초상에 관한 소견>(《소치연구》 창간호, 2003) 외 다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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