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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승 전주신흥고등학교 교장
 조재승 전주신흥고등학교 교장
ⓒ 이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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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3.1운동 하면 가장 먼저 서울에 있는 탑골공원이나 천안의 아우내 장터가 떠오른다. 그러나 3.1운동은 서울과 천안뿐만 아니라 전국 곳곳과 만주, 연해주 등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이다.

전라북도 전주도 예외는 아니었다. 3월 13일 열린 전주의 만세운동은 당시 선교사가 세운 신흥학교와 기전 학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전주의 만세운동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자 지난 25일 역사교사 출신인 조재승 전주신흥고등학교 교장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다음은 조 교장과 나눈 일문일답을 정리했다.

- 4일 후면 3.1운동 100주년 삼일절입니다. 교장 선생님은 역사교사여서 100주년을 맞이하는 감회가 남다를 것 같은데.
"우리가 일제 식민지가 됐다는 것은 부끄럽지만,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3.1운동은 일제 무단통치의 총칼의 탄압 속에서도 신분, 성별, 빈부, 종교의 차별과 차이를 넘어 독립의 한 목소리로 우리 자주독립의 뜻을 전 세계에 알리고 일제 식민지배로부터 벗어나고자 한 사실은 전 세계에 내놓을 만한 우리 민족사의 자랑입니다.

또 우리가 오랫동안 왕정국가로 어느 한 사람의 지배하 신민이었는데 3.1운동을 계기로 해서 오늘의 대한민국,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자유와 평등과 자주를 지향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공화주의 국가가 만들어졌다는 것이에요. 역사를 전공한 사람으로서 3.1운동 100주년의 의미를 이런 데서 찾고 싶어요."

- 1910년 일제 강점기 시작 후 1911년 105인 사건이 일어났잖아요. 그러나 이후 움직임이 없었어요. 8년 후 3.1운동이 일어나죠. 좀 기간이 있었던 것 같은데?
"3.1운동 같은 큰 민족운동을 일으키기에는 계기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러나 1917년 러시아 혁명, 1918년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 윌슨 대통령이 민족 자결주의 원칙을 내세우는 것들이 우리같이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 상태인 나라들에 독립의 희망을 줬어요.

이런 국제정세의 변화가 3.1운동의 배경이 됐을 거로 생각해요. 그러나 이 기간에도 독립을 위한 국내외의 우리 민족의 부단한 노력이 있었어요. 만주, 연해주, 중국, 미주 등 국내외에서의 무장독립투쟁과 독립운동단체 결성, 독립운동기지 건설, 외교활동 등이 있었지요."

- 그 당시 조선인에게 조선이란 나라는 어떤 의미이었을까요?
"제가 볼 때 봉건국가인 조선에 대한 매력을 느낀 건 아닌 것 같아요. 그래서 그들은 왕정으로 복귀하자는 복벽주의가 아니라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 되는 민주 공화정으로 공감했지 않았느냐 하는 생각이 듭니다."

- 전주 3.1운동의 주역은 신흥학교로 알아요. 신흥학교는 한강 이남 지역 최초 학교로 들었는데 신흥학교에 대해 소개 좀 부탁드려요.
"신흥학교는 미국 선교사들이 선교를 위해 1900년 세워 119년의 역사를 가진 학교예요. 우리나라가 일제 강점기에 들어가기 전 신흥학교는 기독교 교육과 민족교육을 동시에 한 것으로 보여요. 한국인 교사들이 중심이 되어 학교 이름을 '신흥'이라 하고 학교 문양도 민족의 꽃인 무궁화로 했죠. 교훈은 옳고 그름을 분별할 지(智), 위험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즉각 구하는 인(仁), 지와 인을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에 옮기라는 용(勇)인 지(智)·인(仁)·용(勇)입니다.

학교 이름 '신흥(新興)'은 영어로 dawn입니다. dawn(黎明)은 하루가 시작하는 첫 시간의 의미가 있어요. 이런 의미의 '신흥'을 학교 이름으로 삼은 것이지요. 학생들에게 자유, 평등, 자주, 주권재민의 근대의식을 교육하여 새로운 세상(근대의 세상)을 열어가는 주역으로 길러보고자 하는 것이 '신흥'이라는 이름 속에 담겨진 뜻이에요. 단순히 망해가는 나라를 구하자는 수준 정도가 아니라 근대라고 하는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 보자는 것이 당시 선생님들의 민족 비전이 담긴 신흥학교의 교육이었지요."

- 신흥학교 교사들은 민족의식이 투철한 개화 지식인들이었다던데.
"학교에 을사늑약 후 일제의 내정 간섭하의 당시 신흥학교 교육을 볼 수 있는 사진이 하나 있는데, 사진을 보면 운동장에 정렬한 학생들이 태극기를 들고 있어요. 이런 모습은 당시 신흥학교의 민족교육 모습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돼요. 이런 교육을 하는 신흥학교였기 때문에 신흥학교는 다른 어떤 학교보다도 민족의식이 강한 학교였어요.

또한 미국인 선교사들은 정교분리의 원칙으로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과 같은 정치적 활동에 대해서는 소극적이었지만 예배와 성경 공부를 통한 기독교 교육은 신흥학교 학생들의 민족의식을 강화하는 데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보입니다.

신흥학교는 3.1운동,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주역으로서 지역 내 항일민족 운동 뿐 아니라 일제의 강요된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학교의 문을 무려 10년 동안 닫았다 해방 후 역사를 다시 이어온 학교이기도 합니다. 또한 1980년 5.18민주화운동에 전국에서 유일하게 전교생이 참여하였습니다. 당시 학생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두환 물러나라', '비상계엄철폐 하라'를 외쳤습니다. 신흥학교의 역사는 애국 계몽운동, 항일민족 운동, 민주화 운동 등 우리 근현대사의 축약입니다."

"독립운동 대우받아야 애국자들 많아지고 민족정기 바로 세울 수 있어"

- 신흥학교 교가 멜로디가 독립군가인 '용진가'와 같다는 것이 알려져 화제가 된 적 있잖아요. 교가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세요.
"2000년 6월 13일 김대중 대통령과 북쪽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분단 후 처음으로 남북 정상들 간의 만남을 가졌는데 우리 대통령을 환영하는 순안공항 행사에서 북한 군악대가 우리 학교 교가를 연주했어요. 이때가 우리 학교 개교 100주년이 되는 해인데 이 일은 신흥학교를 전국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신흥 재학생과 졸업생들에게는 큰 자랑거리가 되었지요.

나중에 찾아보니 연주된 이 곡은 북한에서는 유격대 행진곡으로 알려져 있고 만주에서는 신흥무관학교와 같은 독립군들이 부른 군가인 용진가이었습니다. 곡은 프러시아 행진곡으로 알려져 있어요. 흥미로운 사실은 우리 학교 교가의 가사와 독립군가인 용진가의 가사의 후렴 부분이 상당히 일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학교 교가의 후렴은 '학도들아 용감력을 분발하여서 한목소리 한 발자국 나아갑시다'인데 용진가는 '독립군아 용감력을 분발하여서 삼천만 번 죽더라고 나아갑시다'입니다. 이런 정도의 가사 일치는 어느 한 쪽의 표절이지요. 우리 학교 교가는 한일병합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졸업생의 증언도 있고 가사를 분석해 보면 실력을 기르자는 애국 계몽운동 시기의 민족운동의 사회적 분위기가 반영되고 있습니다.

용진가는 나라가 망한 후 독립군들이 불렀던 독립군가입니다. 시기적으로 우리가 먼저라는 추론이 가능합니다. 뿐만 아니라 1908년부터 학교가 '신흥'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하는데 1909년 대한제국 정부는 '사립 신흥학교'라는 이름으로 우리 학교를 인가했어요. 용진가를 군가로 사용했다고 하는 신흥무관학교는 그 전신인 신흥강습소가 대한제국 패망 후인 1911년에 항일독립활동을 위해 서간도에 설립되지요.

학교 교훈도 두 학교 모두 지(智)·인(仁)·용(勇)입니다. 교가, 학교 이름, 교훈 등을 보면 두 학교는 어떤 식으로든 연관이 있어 보입니다. 이런 추론이 가능할까요? 신흥학교 한국인 교사나 학생들이 나라가 패망하자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에 참여하였죠."

- 전주의 3.13 독립 만세운동은 어떻게 진행되었나요?
"전주지역 독립 만세운동은 천도교 측과 기독교계 측 두 개의 루트가 있었습니다. 기독교 쪽은 서울 남대문 교회 함태영(후일 대한민국 부통령)이 독립선언서를 기전 학교를 졸업하고 천안에서 교사 생활을 하고 있었던 임영신(후일 상공부 장관)에게 전달해 주었어요. 그녀는 이를 전주 서문교회 김인전 목사(후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원장)에게 전달하였습니다. 김인전 목사는 신흥학교 출신 교인 최종삼 등과 만세운동을 상의하고 최종삼은 신흥학교 학생들과 학교 지하실에서 은밀히 태극기를 만들었습니다.

3월 13일 전주 장날 학생들은 미리 준비된 태극기 등을 채소 수레로 위장하여 시장에 나가 시민들에게 배포하고 만세 시위를 선도하였다고 합니다. 정오경 시작된 만세 시위는 밤늦은 11경까지 시내 곳곳에서 있었고 다음 날에도 계속되었습니다. 전주지역의 3.13 독립 만세 시위는 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에 학생들이 주도한 전주 소요 사태라고 소개되고 있어요."

- 서울에서 3월 1일 열렸고 전주에서는 13일 만세 시위가 있었잖아요. 서울과 2주의 시차가 있는데 빠른 건가요? 아님 늦은 건가요?
"13일은 전주 장날이에요. 장날은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날이라서 이날을 택한 것 같아요. 고종 황제의 인산일로 사람들이 많이 몰려온 걸 기회 삼아서 서울의 만세운동이 일어난 것처럼 전주 같은 지방 도시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날을 기회로 이용한 것이지요. 독립 만세운동은 1919년 내내 국내외 각지에서 일어났는데 집중적으로 일어난 시기는 3월 초부터 4월 초까지예요. 전주는 3월 13일이니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적 좀 빠르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

- 학교에 피해도 있었을 것 같은데.
"맞아요. 시위 장소가 장터와 시내였기 때문에 학교 건물의 피해는 없었어요. 그러나 이 만세 시위의 영향으로 신흥학교는 1919년과 1920년 2년 동안 고등과 졸업생을 한 명도 내지 못했어요."

- 잡혀가기도 했었을 텐데요.
"선생님과 학생들 가운데 잡혀간 사람이 여럿인데 6개월 또는 1년의 실형을 받아요. 이 가운데 어떤 분은 복역하다 옥에서 돌아가신 분도 계시고 실형을 다 살고 나와 고문 후유증으로 돌아가신 분도 계시지요.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이분들 가운데 여러 분이 아직 독립 유공자로 대우를 못 받고 계신다는 거예요.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후손들이 나서서 자료를 갖추어야 했어요. 이렇게 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지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어떤 사업보다 독립운동을 하다 희생된 분들을 국가가 적극적으로  찾아서 대우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가 아니라 대우를 받아야 돼요. 그래야 애국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울 수 있어요."

"기어이 독립과 민주국가 만들었다는 민족사 긍정의 역사 교육해야"

- 3.1운동에서 교회와 기독교 학교의 역할이 컸어요.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 고작 30여 년밖에 안 되었을 때인데 민족운동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을까요?
"3.1운동 당시 기독교인은 전체 인구의 2%도 채 되지 않는 많지 않은 수였지만 기독교인들은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어요. 민족의 앞날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기독교에서 그 희망을 발견했어요. 또한 오늘날 SNS와 같은 사회관계망이 없던 시절에 교회와 학교는 많은 사람이 모이고 조직적으로 뭔가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조직이기도 하였지요.

우리나라에 와서 활동했던 대부분의 기독교 선교사들은 정교분리 원칙에 때라 우리 민족의 독립과 같은 정치적 문제는 관심을 두지 않았고 둘 수도 없었어요. 그러나 기독교 학교 학생들은 예배와 성경공부 등을 통해 신앙과 민족을 하나로 같이 보았어요. 공립학교 교육은 일제 당국의 직접적인 통제 하에 있어 민족교육이 어려웠지만, 사립인 기독교 학교는 일본의 제약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와 민족의식을 갖는 교육이 가능했지요."

- 3.1운동을 3.1혁명으로 바꾸자는 주장도 있는데.
"3.1운동은 독립운동일 뿐 아니라 3.1운동을 계기로 왕정국가로부터 주권재민의 민주 공화정의 국가인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만들어지고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기 때문에 3.1운동이야말로 우리 민족사 내부의 질적 변화와 역사의 진보를 이끈 사건으로 그런 면에서 혁명으로 볼 수 있다는 거죠. 왕과 몇몇 사람이 중심인 나라로부터 모든 국민이 주인이 된 나라로의 변화 뿐만 아니라 차별로부터 평등한 나라도 엄청난 변화잖아요. 결과적으로 그런 변화를 이끌어 낸 사건이 3.1운동이었던 것이기 때문에 혁명이라는 것이지요."

- 1945년 8월 15일 해방은 일본의 패망으로 인한 거지 우리 투쟁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어요. 물론 그 말이 전혀 틀렸다고 볼 순 없지만, 우리가 독립운동하지 않았으면 해방을 맞이했을지 의문인데.
"저도 의견에 동의해요. 2차 세계대전이 일본의 패배로 끝났기 때문에 일제 식민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맞아요. 그러나 우리 민족이 독립을 위한 주체적 활동을 해오지 않았더라면 일제 패망과 연합국의 승리라는 것이 우리 독립으로 이어졌겠느냐는 거예요.

우리 민족이 온갖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국내에서뿐만 아니라 만주나 상하이, 연해주, 미주에서까지 우리 민족이 단합되고 일치된 힘으로 우리 민족 독립을 위해 노력해 오지 않았더라면 누가 우리 독립을 인정해 주었겠냐는 것이지요. 우리 민족이 끈질기고 주체적인 항일독립활동을 해온 과정 속에서 일본의 패망은 우리에게 광복의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해요."

- 100년이 지난 2019년 3.1운동의 의미는 무엇이라고 보세요?
"강대국이고 약소국이고 모두가 다 자주독립 국가여야 한다는 것이고 자주독립 국가는 모두 평등해야 하고 국가 간의 관계가 평화로워야 한다는 것이에요. 기미 독립 선언서를 보면 평화의 정신이 담겨 있어요. 동양평화를 내세우고 있거든요. 일본도 식민지배를 단념하고 동양의 모든 국가와 함께 평등하게 평화의 길에 함께 서자는 것이지요. 모든 세계가 평화롭게 살자는 거예요.

저는 이 평화의 정신이 우리가 3.1운동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정신적 유산이라고 생각을 해요. 평화는 영원한 인류 보편의 가치죠. 100여 년 전 우리 선조들이 평화의 사상을 통해 독립운동을 했다는 것이 놀라워요."

- 마지막으로 한 말씀 부탁드려요.
"같은 이야기의 반복이 되겠지만 3.1운동을 통해 표출되었던 세계 평화의 정신은 모든 인류가 함께 존경하며 보존해야 할 인류의 위대한 정신적 유산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나라의 역사를 보면 폭력과 같은 피 흘림을 통해 역사를 진전시켜왔는데 우리 민족은 3.1운동을 통해서 표출되었듯이 평화적 방법으로 인류의 역사를 진보시키고자 하였어요. 근래의 촛불혁명과 같은 것은 좋은 사례이기도 합니다. 젊은 학생들에게 우리 민족의 평화를 사랑하는 이런 역사를 가리켜 우리 역사에 대해서 높은 자긍심을 갖게 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우리 역사에 대해 너무 부정적으로 대해 왔어요. 식민지배를 당했다고 하는 것이 부끄럽다고 하는 역사 교육이 아니라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우리 민족은 불굴의 항쟁으로, 평화라고 하는 위대한 정신으로 일제의 식민지배에 맞서 당당히 싸웠고 기어이 독립과 민주국가를 만들었다고 하는 민족사 긍정의 역사 교육을 하여야 합니다."

태그:#조재승, #전주신흥고, #신흥 무관학교, #3.13만세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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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들의 궁금증을 속시원하게 풀어주는 이영광의 거침없이 묻는 인터뷰와 이영광의 '온에어'를 연재히고 있는 이영광 시민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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