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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밀화 사업 25년, 장장 9,125일, 219,000시간, 13,140,000분
함께한 화가, 작가, 감수자, 편집자 200여명
수록 동식물 1,700여종, 세밀화 3천여 점
권당 평균 작업 시간 5~7년
▲ 세밀화로 그린 보리 큰도감 세밀화 사업 25년, 장장 9,125일, 219,000시간, 13,140,000분 함께한 화가, 작가, 감수자, 편집자 200여명 수록 동식물 1,700여종, 세밀화 3천여 점 권당 평균 작업 시간 5~7년
ⓒ 보리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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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한 그루 베어내도 아깝지 않은 책을 만들겠다"는 뜻을 30년이 넘도록 이어온 보리출판사가 스물다섯 해나 걸려 세밀화로 그린 보리 큰 도감 묶음을 다 펴냈습니다. 우리나라에 사는 물고기와 곤충, 동물과 식물을 두루 아울러 품은 커다란 물줄기입니다. 도감을 가까이 둬야 하는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요? 나무와 우리가 숨을 주고받아야 살 수 있듯이 사람끼리만 어울려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더불어 살아야 하는 이웃을 알아야 하는 까닭이지요.

강아지풀 세밀화 한 점이 태어나는 데 기획하고 자료 모으기는 접어두고라도, 하루 여덟 시간을 꼬박 매달려도 스무하루가 넘도록 그려야만 한답니다. 여기에 글을 써서 다듬고 그림과 글을 전문 학자에게 보여 지도를 받아 고치고 편집하다보면 도감 한 권을 펴내는 데 적어도 5년 길게는 7년이나 걸린다고 합니다. 사진을 찍어서 만들면 시간과 품을 훨씬 줄일 수 있을 텐데 어째서 미련스럽다싶으리 만큼 많은 품과 정성을 들여서 세밀화 도감을 빚었을까요?

그건 아무리 정밀한 사진기라고 해도 섬세한 사람 눈을 따라올 수 없기 때문이랍니다. 기계 눈은 초점을 맞춘 데만 또렷하고 초점에서 멀어지면 흐릿합니다. 그러나 사람 눈은 짧은 순간이라도 자세히 두루 볼 수 있기 때문에 터럭 하나 실뿌리 하나도 놓치지 않고 낱낱이 담아낼 수 있기 때문이랍니다. 사람 눈으로 오래도록 살피고 정성껏 자세히 그리기 때문에 목숨붙이에 담긴 생기를 고스란히 드러내면서 따뜻한 감성까지 담아낼 수 있는 세밀화를 고집한다고 보리출판사 사람들이 털어놓습니다.

요즘 우리는 사물이 지닌 특징을 잘 살려 사실에 가깝게 그린 그림을 예술작품으로 꼽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군자를 즐겨 치던 선비들이 무나 배추 따위를 그렸으리라고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조선 선비들은 우리네 살림살이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채소나 열매 그림을 적지 아니 그렸습니다. 붉은 무를 갉아먹는 쥐와 더불어 푸른 잎을 넓게 펼쳐든 배추에게로 날벌레가 날아드는 그림을 실감나게 그린 심사정(1707~1769) 또한 채소를 즐겨 그린 선비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옛 어른들은 배추를 겨울에도 푸른 소나무와 같은 지조를 갖춘 채소라 떠받들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우리를 살리는 식물이기 때문입니다.

중국사람 서치는 어리석은 동한 황제 환제와 영제가 다스리던 시기에 가난을 기꺼워하면서 살던 사람입니다. 겸손하고 검소하며 의리와 염치를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이름만 대면 알만한 이들이 서치를 우러르며 여러 차례 벼슬에 추천했으나 서치는 한 번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비록 벼슬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저를 알아준 사람들에게 고마워하는 마음은 놓지 않고 그 사람이 세상을 떠날 때 작지만 마음을 담은 선물을 영전에 바치곤 했습니다.

벼슬자리에 추천하지 않았지만 서치됨됨이를 알아준 곽림종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서치는 영전에 싱싱한 풀을 한 묶음 바치고 사라졌습니다. 이를 두고 곽림종은 "역시 서치답구나! 우리 어머니 아름다움을 이토록 기리다니 얼마나 깊고 두터운 마음인가!"하고 고마워했습니다. 여기서 나온 사자성어가 '생추일속(生芻一束)'으로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정성이 한없이 깊고 두텁다는 뜻을 담은 말씀입니다.

또 정조는 이와 같은 말씀을 남겼습니다.

"옛 사람이 채소그림에 시를 부쳐 이르기를 '백성들로 하여금 이 빛깔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했느니라. 백성 낯빛이 이와 같으면 군주에게는 더없는 부끄러움이다."

백성 얼굴이 배추처럼 희거나 창백하게 푸른빛을 띤다면 정치를 잘못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옛 사람은 송나라 시인 황정견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윤구병 선생님은 '다스림'은 '다살림'에서 나온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백성을 다스리려면, 백성이 먹을 수 있는 풀과 약으로 쓸 수 있는 풀을 가리는 것이 한 몫을 단단히 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이 눈길에서 보면 사물이 지닌 특징을 하나하나를 꼼꼼히 드러낸 그림보다 더 뛰어난 예술작품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말씀을 꺼내든 건 큰 도감 열 권 안에 '약초 도감'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저 풀이 아니라 '약이 되는 풀', 목숨을 살리는 풀과 나무만 모아 엮었다는 말씀입니다. '약초 도감'을 펼치면서 보리출판사가 지니고 있는 살림살이, '너를 살리려고 들 때 비로소 내가 살 수 있다'는 얼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농사를 짓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그해 농사가 풍년이 들지 아니면 흉년으로 고생을 할지를 봄에 산에 올라가 보고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산에 올라가 참나무 꽃이 우거지면 '올해는 흉년이 들겠구나' 하고 알아차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해 가을 추수를 앞둔 농부 한 사람이 누런 벌판을 바라보면서 '올해는 참나무 할아버지께서 틀리셨습니다'하고 빙긋 웃었습니다. 그런데 웬걸 며칠 지나지 않아서 뜻하지 않은 태풍이 몰아쳐 수많은 벼가 쓰러지고 말았답니다. 참나무 할아버지는 봄부터 이럴 줄 아셨을까요?

우리가 알든 모르든 자연은 모두 이어져 있습니다. 유영모 선생께서는 '모름지기'란 '모름을 지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부지런한 농부라 해도 밤잠도 자지 않고 농사에 매달릴 수는 없습니다만 자연은 스물네 시간 어우러져 돌봅니다. 또 농부 손길이 아무리 깊어도 해와 달, 물과 바람 그리고 흙과 벌레들이 농사에 이바지하는 바에 따를 수 없습니다. 모름을 지켜야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모름을 제대로 지키려면 우리는 우리 둘레에 사는 이웃이 어떤 이들이 있는지를 살피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아는 구석이 조금도 없이 캄캄하면 모름을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름을 참답게 지키다보면 '살아가면서 내 스스로 맡아할 수 있는 일이 손톱만큼도 되지 않는구나.' 하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저절로 고개가 수그러듭니다. 보리출판사가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큰 도감 열 권을 빚어낸 까닭이 모름지기, 모름을 지키려는데 있지 않을까 하고 어림해봅니다.

'바닷물고기 도감'에는 우리나라에 사는 바닷물고기 158종이 고스란하고, '식물 도감'에는 우리나라에 사는 식물 366종이, '동물 도감'에는 우리나라에 사는 동물 223종이, '약초 도감'에는 약이 되는 풀과 나무 151종이, '민물고기 도감'에는 우리나라에 사는 민물고기 130종이, '나비 도감'에는 우리나라에 사는 나비 219종이, [새 도감]에는 우리나라에 사는 새 122종이, '나무 도감'에는 우리나라에 사는 나무 137종이, '버섯 도감'에는 우리나라에 사는 버섯 125종이, '곤충 도감'에는 우리나라에 사는 곤충 144종이 고스란합니다.

이 큰 도감들은 온 나라 산과 들, 내와 강, 바다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빚어낸 정성입니다. 그래서 세밀화 아래에는 '2003년 8월 전라남도 무안(가시연꽃)'처럼 언제 어디서 채집했다고 적바림되어있습니다. 펴내는 데 함께한 이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몇몇 세밀화가는 세밀화 도감을 빚는데 평생을 바쳤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정성을 새기며 도감을 펼쳐들면 내가 이 분들 어깨에 올라앉아 '이토록 이웃을 살필 수 있구나' 하는 마음이 절로 들어 뭉클합니다. 이 정성에 힘입어 우리나라 사람이 모두 우리 이웃에 어떤 이들이 사는지 우리가 어떤 이들과 어깨동무하며 목숨을 나누고 있는지 살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다보면 저도 모르게 사람을 비롯한 모든 목숨붙이는 모두 한 가지에서 나온 잎이라는 것을 깨달아 이 땅을 함께 쓰며 어울려 사는 이웃과 어깨동무하며 오롯이 평화를 피어 올릴 수 있지 않을까요?

태그:##세밀화, ##도감, ##평화, ##살림살이, ##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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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평화도서관사람들 바라지이 “2030년 우리 아이 어떤 세상에서 살게 하고 싶은가”를 물으며 나라곳곳에 책이 서른 권 남짓 들어가는 꼬마평화도서관을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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