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국제영화제가 벌써 69회를 맞았다. 사람이라면 '칠순'이 다 된 나이다. 이번 영화제 프로그램을 살피던 중에 '단호하고 확고한 자아, 여성감독의 관점'이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1968년에서 1999년까지 동독과 서독에서 활동했던 독일 여성감독들의 회고전 타이틀이었다.

순간 '훅' 하고 관심이 쏠렸다. 사실 400편이 넘는 영화를 상영하는 세계적 규모의 베를린영화제에서 주목 받는 작품들은 주로 새롭게 선보이는 경쟁 부문의 신작들이다. 하지만 독일 고전영화, 특히 여성 감독들의 작품에 대해 아는 바가 전무했던 나는 이 회고전에 큰 호기심이 발동했다. 

최근 전 세계적인 규모로 진행되는 '미투 운동'과 아울러, 여성 인권 향상의 목소리가 독일 영화계에도 현존하는지, 독일 사회의 성 평등 지수에 대해 여성 영화인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어졌다. 이 회고전에서 봤던 많은 고전영화는 '독일영화는 따분하고 재미없을 것'이라는 내 편견을 산산이 부쉈다. 지난 세기 여성감독들이 가정과 직장에서, 사회에서 직간접적으로 겪고 느꼈던 삶의 모순은 너무 공감이 되었고 흥미로웠다. 영화에서 보여준 영상미와 음악 등 그 예술적 미학도 놀라운 수준이었다. 

50편의 장/단편, 극영화/다큐멘터리를 소개한 이 회고전에서는 독일의 영화사에서 주요한 입지를 다져 온 마가레테 폰 트로타(Margarethe von Trotta), 울리케 오팅거(Ulrike Ottinger), 엘피 미케시(Elfi Mikesh), 헬케 미셀비츠(Helke Misselwitz), 헬마 잔더스 브람스(Helma Sanders-Brahms)를 비롯해, 작년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회고전으로 방한했던 모니카 트루트(Monika Treut) 등 거장 감독들의 주옥같은 작품들이 상영됐다. 이번 회고전에는 180편이 출품됐지만, 26편만 엄선됐다. 매 상영 때마다 매진 사례가 이어졌고 아침 8시 프레스센터가 문을 열자마자 영화표를 신청하기 위한 줄이 길게 늘어섰다.

"올해, 독일 여성이 선거권 얻은 지 100년 되는 해"
 
 베를린영화제에 참석한 <올바르게 살고 누구도 두려워하지 마라>의 유타 브루크너 감독

베를린영화제에 참석한 <올바르게 살고 누구도 두려워하지 마라>의 유타 브루크너 감독 ⓒ 클레어 함

 
상영관 옆자리에서 같이 영화를 봤던 이탈리아 영화평론가 실비아 누가라는 이 회고전에 대해 "그간 대부분의 작품들을 쉽게 접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 회고전은 외국인인 나에게도 아주 흥미롭다"며 "특히 독일에서 시네마와 역사, 가정과 사회의 권력구조가 서로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 잘 보여주고 있어서 이 프로그램의 중요성을 높이 평가한다. 전 세계로 널리 알려지길 희망한다"라고 높은 만족감을 피력했다. 
 
올해 이 회고전을 기획한 독일시네마테크의 코니 베츠 프로그래머는 "올해가 독일에서 여성이 선거권을 얻은 지 100년이 되는 해"라며 "잘 알려지지 않은 독일 여성감독의 작품들을 소개하고 싶었다"고 기획 배경을 설명했다. 이번 기획엔 독일의 분단과 통일을 거친 1968년부터 1999년 사이의 격동기를 소재로 한 사회 비판뿐만 아니라, 여성의 시각으로 바라본 자녀 양육이나 가족관계 같은 개인적이고 일상적인 고민을 주제로 한 다양한 작품들이 포함돼 있다. 그는 "사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Das Private ist politisch)라고 이번 프로그램의 성격을 정의했다.
 
20세기 질곡 많은 역사를 살아냈던 모친의 60년 삶을 섬세히 담은 <올바르게 살고 누구도 두려워하지 마라(Do Right and Fear No One)>(1975)의 유타 브루크너 감독도 베를린영화제를 찾아 관객들을 만났다. 유타 감독은 1915년에서 1975년까지 60년에 걸친 어머니의 삶을 다수의 흑백사진으로 독특하고 아름답게 재구성했다. 이 사진들의 일부만 감독 가족 소유의 것을 활용하고, 나머지 다수는 몇 십 년간 독일인과 문화를 사진으로 기록해온 저명한 사진작가 아우구스트 잔더의 이미지를 차용해 마치 한 편의 역사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영화 <올바르게 살고 누구도 두려워하지 마라>에서 유타 감독의 모친, 게르다씨는 전형적인 부르조아 가정의 장녀로 출생했으나 부친이 갑자기 사고로 사망하면서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동생은 취업의 유혹으로 잠시 나치당에 가입하기도 했으나 곧 속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탈퇴한다. 그녀는 사회주의에 관심이 많은 안정적인 직업을 가진 남편을 만나지만 그는 부인이 독립적인 직업 여성보다는 가정주부로 남길 원한다. 게르다씨는 인생 말년, 공공도서관에서 한 직책을 맡기로 결정하고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으면서 비로소 자아를 반추하는 계기를 맞이한다. 

독학으로 영화를 배운 유타 감독은 1975년 이 첫 흑백 장편 영화를 선보인 후, <배고픈 나날(Years of Hunger)>(1980)을 포함해 현재까지 총 9편의 장편을 연출한 베테랑 감독이다. 베를린예술대학에서 극 영화를 가르쳤던 유타 감독은 2006년 교수직을 은퇴한 이후로도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자신의 평생 소원이었다는 장편 소설 집필을 최근 완성했고, 현재는 차기작을 준비하고 있다. 

"성차별, 은연중에 현존하며 사라지지 않고 있다"
 
 유타 브루크너 감독

유타 브루크너 감독 ⓒ 유타 브루크너

 
신작의 펀딩을 위해 정신없이 바쁜 영화제 일정을 보내고 있던 그는 고맙게도 내 인터뷰 요청을 흔쾌히 수락했다. 유타 감독에게 그의 영화세계뿐만 아니라, 독일 영화계 내에서의 여성의 지위, 지나온 여성운동의 발자취와 현재 상황 등을 물었다. 다음은 유타 감독과의 일문일답을 정리한 내용이다.

- 베를린영화제 기간 많이 바쁘신 것 같은데 차기작 준비는 잘 진행되고 있는지. 
"힘들다. 새로운 작품을 기획한 지 꽤 많은 시간이 지났다. 안타깝게도, 일주일 전에 정부 펀딩지원작에서 배제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실망했다. 모녀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영화로 제작하기에 적당하지 않다는 것이 공식 이유였는데 누가 그런 멍청한 결정을 하는지 모르겠다. 여성들이 표현하고 싶은 이야기는 비즈니스맨의 틀에 박힌 기계적 사고방식으론 이해하기 힘든 것 같다."

- 화려한 경력을 가진 베테랑 감독인데도 펀딩이 어려운가.
"독일 영화계에서 여성으로 활동하는 것은 아직도 힘들다. 젊은 세대들에겐 더 기회가 주어진다고 하지만 영화 쪽이 아니라, 텔레비전 부문만 해당된다. 과거처럼 대놓고 성 차별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전 세계적 추세로 보면, 열악한 상황이 차츰 개선되고 있지만, 성차별은 은연중에도 현존하며 사라지지 않고 있다."

- 이번 여성감독 회고전에 대한 관객의 반응이 뜨거웠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다시 첫 작품을 관객들과 나누는 소감이 궁금하다. 
"나뿐만이 아니고, 모든 여성 감독들이 무척 기뻐했다. 우리는 여성운동과 학생운동이 한창이던 1968년쯤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때는 '뉴저먼시네마'(Neuer Deutscher Film)라고 불리는 좀 더 자유분방하고 실험적인 영화의 흐름이 한창인 때라, 우리도 여성 고유의 관점과 감정을 전달하고 여성운동에 초점을 맞춘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겼다. 실제로 일정기간 이것이 가능했다.

당시 '괴테 인스티튜트'의 공헌도 크다. 그들은 여성 감독들의 영화만을 패키지로 만들어 전 세계에 적극적으로 홍보활동을 했다. 덕분에 나는 한국에는 못 갔지만, 호주, 인도 등 수많은 나라들을 방문할 수 있었다. 당시 반응이 너무 좋아서 우리는 이 기회가 우리의 경력 연장으로 자연스레 이어질 것으로 낙관했다. 하지만, 1980년대초 신자유주의가 등장하고 새로운 정치 경제 환경으로 변화하면서 영화계와 엔터테인먼트계 역시 큰 변화를 겪었다. '뉴저먼시네마'는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남성 감독들이 여성 감독들보다 더 큰 예산과 크레디트를 지닌 영화를 제작하게 된 반면, 여성 감독들은 주로 저예산의 영화를 만들었고 두세 편 이상 만드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괴테 인스티튜트의 성공적인 해외 홍보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속적인 영화 제작을 하기 힘들었다. 당시에는 코미디 영화를 만들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정치적인 소재의 영화나 작가주의 성향의 작품을 만드는 세대다. 아무도 코미디를 만들고 싶어하지 않았다. 이런 복합적인 이유로 여성감독들은 영화사에서 사라져 갔다. 누구는 미국으로 이민 가고, 결혼도 하고.

그 중 일부는 살아 남았다. 나는 다행히 학위가 있었기 때문에 대학에서 교수직을 맡을 수 있었다. 다른 이들도 비슷한 경로로 경력을 유지한 것 같다. 나는 텔레비젼 방송국의 재정 지원으로 교직을 하면서 틈틈히 두 세편의 저예산 영화를 만들었다. 개인적으로는 아주 맘에 들지만, 일반 대중에겐 전혀 소개되지 않았다.  

최근 3~4년 전에야 젊은 세대의 여성들이 다시 고개를 들고 업계 내 성평등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독일처럼 민주주의가 정착된 나라에서 영상을 공부하는 학생의 절반이 여성이다. 그러나 오직 11%만이 전공 분야에서 취업을 한다는 사실에 분노하며 50% 쿼터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물론 우리가 젊었을 때도 똑같은 요구를 했는데 당시엔 모두 우리를 조롱했다. 지금도 조롱을 하고 싶은 이들이 있겠지만, 더 이상 감히 공개적으로 그런 비웃는 발언을 하지 못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상황은 조금 나아졌다.

요즘은 다수의 여성이 대학에서 훌륭한 영상교육을 받고 있고, 더 이상 유리천장 아래 머무르길 거부한다. 이런 운동을 배경으로, 이들은 과거의 여성운동이 기여한 바를 인정하는 목소리를 냈다. 이런 목소리들이 모여서 독일시네마테크에서 이번 회고전을 기획한 것이다. 180편 중에서 엄선된 작품만 이번 영화제에 선보였다고 하는데 대부분 저예산 영화라 상업적 배급경로로는 유통되지 못했다."

"전후 서독사회에서 여성의 섹슈얼리티 문제는 가혹"
 
 영화 <올바르게 살고 누구도 두려워하지 마라> 스틸컷

영화 <올바르게 살고 누구도 두려워하지 마라> 스틸컷 ⓒ 유타 브루크너

 
- 이번 회고전의 좋은 작품들 덕분에 '독일영화는 따분하다'는 내 편견이 사라졌다. 독일 관객들이 이렇게 즐겁게 영화를 관람하는 것은 처음 본다. 공정한 배급시장의 필요성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최근 영화제나 마켓을 가면 많은 여성 영화인들이 눈에 띄어 업계 내 성차별 문제가 많이 완화되었다고 느꼈는데 11%라는 통계가 무척 놀랍다. 그래도 감독님이 영화계 데뷔를 할 당시보다는 상황이 많이 나아졌을 것 같다.
"물론 전반적인 상황은 나아졌다. 내가 '우리의 딸들'이라고 부르는 젊은 세대는 법의 잣대로만 판단했기 때문에 페미니스트들의 요구가 다 충족되었다고 착각했다. 그러나 평등은 법이라는 추상적 개념에서만 존재한다. 

이 세대는 미국의 인기 TV 시리즈 <섹스 앤 더 시티> 세대라고 볼 수 있다. 교육도 잘 받았고, 매력도 넘치는 이들은 사랑, 경력, 모성, 경제력 등 모든 것을 동시에 소유할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외부적인 요인이라기보다는 내부적인 요인에 문제가 있다고 인식한 이들은 여성의 커리어에 대해 논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절실하게 엔터터인먼트 업계에 종사하고 싶다기보다는, 과거의 우리들처럼 다시금 무엇이 진실인가를 찾아 나섰다. 아울러, 작금의 불안정한 정치환경으로 젊은 세대들은 다시 정치적인 세대로 변모하고 있다. 이런 배경으로 젊은 세대들이 아주 정치적이었던 우리 영화들에 다시금 공감하고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 같다."
 
- 영화 감독이라는 직업을 왜 선택하셨는지 궁금하다. 내가 전쟁 후의 우울하고 열악한 현실에서 성장했다면, 예술보다도 당장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는 현실적인 직업을 택했을 것 같다.
"아주 좋은 질문이다. 물론 특별한 이유가 있다. 나는 평생토록 진실과 지식을 갈망해 왔다. 그래서 정치학을 전공하기도 했으나 졸업 후 대학에 머물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나는 여성의 육체가 주는 불편함이 내 존재의 큰 장애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성의 육체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대상화되고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기를 강요 받는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전후 서독사회에서 여성의 섹슈얼리티 문제는 아주 가혹했다. 그때 나는 과학의 세계와 나 자신에 대한 지식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나는 딱히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는 글을 쓰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많은 이유로) 글을 쓸 수 없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영화인들을 개인적으로 알게 되었고, 영화작업이 내가 해야 할 천직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나는 잃어버린 내 육체를 영화 속에서 재생시켜야 했다. 내 영화 <배고픈 나날(Years of Hunger)>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나는 심각한 신경과민 상태였다. 언어도 상실했고 더 이상 살고 싶지도 않았다. 어머니를 대적해야만 하는 힘든 상황에 직면했다. 어머니와 나의 관계는 이중 구속과 모순덩어리였다. 그녀는 자신이 그랬듯이, 내가 항상 어머니의 곁을 지키는 착한 딸이 되길 바랐다. 하지만 동시에 세상을 발 아래 호령하는 커리어우먼이 되길 바랐다. 이 상황에서 탈출하기 위해 나는 나의 이미지를 다시 재생할 필요를 느꼈다.

내 전작 <배고픈 나날>의 마지막 대사는 위대한 극작가 하이너 뮐러를 인용한 것이다. '무엇인가를 성취하고 싶다면, 당신은 자신을 제거해야 한다.' 나도 그랬다. 나는 나를 제거했다. 정확히 말하면 나 자신의 이미지, 잘못된 이미지를 제거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영화라는 매체가 나에게 아주 적합하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여전히 글을 쓰고픈 욕망이 언제나 내면에서 꿈틀거렸다. 그래서, 대학 은퇴 후 지난 세월 동안 소설 작업을 해 왔고, 베를린영화제 시작 일주일 전에 500페이지에 달하는 소설을 완성했다."
 
 영화 <배고픈 나날> DVD 포스터.

영화 <배고픈 나날> DVD 포스터. ⓒ Jutta Bruckner Filmproduk

 

- 축하한다. 드디어 소망했던 두 가지를 모두 이루셨다. 책 제목은 무엇인가.  
"'Mother. The sickness of Happiness.' '어머니. 행복의 고통'이다. 가을에는 출간되기를 희망한다."

- 어머니는 자신이 이 영화의 소재가 되는 것에 대해 쉽게 동의를 하지 않으셨을 것 같은데 그 과정을 알려 달라.   
"어머니와 관련된 것은 항상 이중적인 요소를 지닌다. 처음엔 물론 영화에 참여하길 원하지 않으셨다. 수줍음이 많기도 하시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의 삶이 영화화될만한 가치가 있을까 하는 회의감이 많으셨다. 그러나, 나는 '이 영화는 어머니만의 이야기가 아니에요. 어머니는 과거 질곡의 역사를 거쳐온 특정계층 여성의 전형이고, 저는 이분들의 삶에 대해 말하고 싶어요'라고 취지를 설명하고 나서야 수긍하셨다.   

흥미로운 사실은, 영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어머니는 점차 주도권을 가지기 시작하셨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이전에 살고 일하던 곳에서 영화 촬영을 할 때, 한 사진작가가 '빛이 좋으니 그 문 앞에 서보세요'라고 요청하자 그녀는 '이 문은 내가 사용했던 문이 아니에요. 정확한 문을 찍으세요'라고 강하게 주장하셨다. 사실 두 문은 우리가 보기엔 똑같았다. 그래도 어머니의 강한 요구로 인해, 우리는 빛이 그 문에 비칠 때까지 그림자에서 기다려야 했다. 영화의 주인공인 어머니는 점차 소극적인 존재에서 능동적인 여성으로 변신해 갔다.  

영화가 완성되었을 때 어머니는 내 영화를 온전히 받아들이셨다. 편집실에서 어머니께 처음 영화를 보여 드렸을 때 나는 그녀의 반응이 무척 두려웠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래. 이게 내 삶이었다고 인정한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이 영화가 텔레비전에 방영될 당시 병환으로 침대에 누워 생활하셨던 아버지에게 보여 드리기 위해, 여러 개의 베개를 아버지 등 뒤로 밀어 넣으셨다. 그러면서 '당신 말야, 내 인생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지. 이제 당신은 내 삶을 바라봐야 해'라고 단호히 말하셨다. 부인의 삶에 대해 알기 위해 남편이 텔레비전을 봐야 하는 상황이란. (웃음)"

- 이 영화가 어머니의 자아발견에 도움이 된 것 같다. 관객에게 영화 소개할 때 하셨던 말이 인상깊었다. 어머니는 이 영화 이전에는 '우리'라는 단어로 일관하셨지만, 이제는 '나'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신다. 그것이 많은 것을 시사한다고 생각한다. 아마 한국의 전후세대에게도 해당되는 것 같다.
"물론 맞다. 하지만 어머니는 당시 58세였으니 거의 60대였다. 삶의 어떤 변화를 추구하기엔 너무 늦었다. 영화는 그녀에게 많은 것을 선사하기도 했으나 은퇴하신 후에 그녀는 평범한 가정주부의 일상으로 돌아가셨다. 60대로 접어든 이후엔 큰 삶의 변화를 꿈꾸기 어렵다고 본다."

"여성, 태어나면서부터 사회의 욕망-의무와 역할에 종속돼"
 
 영화 <올바르게 살고 누구도 두려워하지 마라> 스틸컷

영화 <올바르게 살고 누구도 두려워하지 마라> 스틸컷 ⓒ 유타 브루크너

 
- 자서전 격인 영화를 이미 몇 편 만드셨다. 이번 회고전의 타이틀이 '사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인 것처럼, 한 개인의 이야기가 궁극적으로는 한 세대와 계층의 집단적인 욕망과 사고를 표현할 수 있다고 보는지.
"그렇다. 아울러, 집단무의식도 표현할 수 있다고 본다. 집단무의식이라는 것은 분명히 존재하며 나는 이 점도 동시에 말하고 싶었다. 여성들의 삶과 특정 계층의 이야기, 아울러 집단잠재의식을 표현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 어느 특정 계층의 이야기를 주로 하고 싶었나. 
"소시민 계층의 삶에 관심이 많다."

- 당시 상류사회의 여성들도 성차별에서 자유롭진 않았을 것 같다. 
"맞다. 당시 상류사회 여성들의 자살률이 꽤 높았다. 아무도 그 이유를 몰랐다. 모든 것을 다 소유한 듯한데 말이다. 나는 당시 여성들이 자신이 원하는 삶의 방식을 선택할 수 없었던 현실에 좌절한 것 같다. 여성은 태어나면서부터 사회가 여성으로부터 기대하는 욕망, 의무와 역할에 종속되어 있다. 사실 지금도 대부분의 여성들은 이런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 인권의 관점에서 보면, 성차별은 계급을 초월해 만연했던 것 같다.
"우리는 다른 문화를 가진 나라에서는 계급의 의미와 문화적 배경이 제각기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내가 과거에 인도의 한 영화제에 갔을 때, 어느 남성 관객이 한 말이 기억난다. '물론 이 영화는 여성의 인생에 관한 영화입니다. 하지만 우리도 비슷한 류의 사회적 제약과 자유의 부족으로 힘든 삶을 살고 있어요.' 고정적인 성 역할 내지 사회적 제약은 젠더에 무관하게 우리에게 짐이 된다."

-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영화제작 강좌나 예술교육을 전혀 받은 적이 없다고 들었다. 아름다운 영상과 음악이 잘 조화된 훌륭한 데뷔작이 무척 인상적이다. 
"고맙다. 나는 영화작업을 추상적으로만 이해했을 뿐 정식교육을 받은 적은 없다. 최소한 내가 보고 싶은 것은 알았지만, 어떻게 그것을 성취해내는지 잘 알지 못했다. 나는 정치학을 전공했고, 내 논문의 주제도 '18세기 독일 정치학'이었다. 영화 쪽에 인연이 닿게 된 계기는 졸업하는 날, 바바리아주 방송국 방문을 하면서다. 같은 날, 교육프로그램의 일환으로 기획된 세 편의 영화의 (연출이 아닌) 작가로 의뢰를 받았다. 당시에 독일 내 영상산업은 베를린과 뮌헨, 두 도시가 제일 활발했었는데 나는 뮌헨에 거주했고 아는 영화인들이 몇몇 있었다."

- 최근 들어 극영화와 다큐멘터리 형식을 혼합한 실험적인 형태가 인기다. 감독님의 영화는 오래 전에 이미 이런 시도를 하고 있었다. 다수의 흑백사진을 사용함으로서, 극영화지만 다큐멘터리 느낌이 물씬 난다.    
"물론 맞는 지적이지만, 내가 처음 시도한 것은 아니다. 이런 실험적인 형식은 '뉴저먼시네마'의 성과라고 할 수 있겠고, 특히 이를 이끌었던 알렉산더 클루게 감독의 특징이다. 당시 '뉴저먼시네마'는 역사에 관한 영화를 만드는 경향이 강해서 1968년경부터는 다큐멘터리에 관심을 많이 보였다."
 
 영화 <올바르게 살고 누구도 두려워하지 마라> 스틸컷

영화 <올바르게 살고 누구도 두려워하지 마라> 스틸컷 ⓒ 유타 브루크너

 
- 1960년대와 70년대 여성운동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는지 궁금하다.  
"당시엔 정치적인 운동이 아주 활발했고, 나도 여성운동에 관여했다. 하지만 전적으로 참여했다기보다는 부분적으로 참여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 당시 예술을 창조하는 여성으로서 제일 우선적으로 할 일은 어머니라는 존재와 정면으로 대응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겐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 흥미로운 관점이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남성과의 관계에 더 방점을 찍는 것 같다.
"넓은 관점에서 보면, 남자들이 세상을 지배한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머니들이 딸 양육 문제에 규칙을 만드는 경우가 많다. 아들은 때가 되면 가족을 떠나 자신만의 삶을 추구하는 것이 허용된다. 하지만 딸들은 자신만의 삶을 사는 것이 허용되지 않고 어머니의 삶을 계속해서 반복해야 한다. 상황이 변화하고 있으나, 그 속도는 아주 느리다. 이런 이야기를 내 소설에서도 담았다.

아버지도 변해야 하지만 어머니도 변해야 한다. 이런 사실을 인지한 우리는 1960년대부터 이런 점을 지적해 왔다. 어느 저명한 미국작가의 책에 이런 구절이 있다. '거울 속의 나를 들여다보면, 내 어머니의 모습이 보인다.' 당시 어머니와 대응하는 것은 우리에겐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우리는 정신분석학의 모든 개념을 통해 '자신의 자아를 어머니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은 소년보다는 소녀에게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부장제 사회는 전 세계적으로 아직도 건재하지만 점차 약해지고 있고, 총 맞은 사자와 같은 상태다. 사자는 자신의 생명을 방어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총을 맞으면 더 위험해진다. 이것이 가부장제의 현 상태다. 점차 가부장제가 몰락한다고 가정하면, 우리는 가모장제에 직면하게 된다."

- 결론적으로, 어머니 세대의 오류를 반복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지.
"물론이다.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 감독님에겐 영화작업이 일종의 '액티비즘'(사회 정치적 변화를 위해 행동하는 주의)인가.
"
물론, 내겐 영화작업은 정치적이다. 여성권 문제는 다분히 정치적 이슈이기 때문이다. 또한, 영화라는 매체는 개인의 자아회복과 아울러, 엄청난 힘을 부여한다고 믿는다."

- 이 회고전에 포함된 한 영화에서, 6천 명의 여성들이 '강간'에 항의하는 거대 시위장면을 봤다. 실제로 1960년대에 이런 집회가 있었던 건지, 영화의 허구적인 요소인건지 궁금하다.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다. 강간에 항의하고, 임신 중단권을 요구하는 집회였는데 특히 후자는 독일 사회에서 아주 중요하다. 1960년대만 해도 임신 중단은 형사 처벌을 받는 불법이었다. 독일 사회는 임신 중단을 원하는 여성과 실제로 수술을 받은 여성들을 법으로 처벌했다.

독일 여성들은 유고슬라비아나 네덜란드로 가야 했다. 이후로 수많은 토론 끝에 우리는 좀 더 유연한 버전의 법을 만들었다. 여성은 임신을 중단할 권리는 있지만, 전문가와의 상담을 전제 조건으로 한다. 즉, 육체적/정신적인 면에서 개별 여성의 삶이 위험하다고 우려되면 전문가와 상담 후 도장을 받고 수술을 할 수 있다. 이 문제에 대한 논의가 6개월 전에 다시 수면으로 떠올랐다. 독일사회는 참 놀랍다. 아직도 이런 기본권을 위해 싸우고 있다."

- 독일도 여성참정권이 보장된 지 올해로 100년밖에 되지 않았다고 알고 있다. 
"
맞다. 1918년이었으니까 올해로 100주년이다. 여성인권에서만 판단한다면 독일은 아주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사회다. 법 체계는 임신 중단법을 제외하고는 대체적으로 괜찮은 편이긴 하지만 여전히, 여성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는 사회다."

- 독일도 한반도처럼 분단의 아픔이 있는 나라다. 과거에 동독과 서독의 영화인들 사이에 교류가 많았는지 궁금하다. 
"교류가 있긴 했으나 많지는 않았다. 주로 동독의 정치상황에 많이 좌우되었던 경향이 있다. 분단 초반에는 서독의 정치 상황에도 영향을 받기도 했다. 예를 들어 1950년대~1960년대초, 위대한 독일의 극작가 및 연출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서독에서 금지되었다. 일부 동독의 감독들(주로 남성)은 서독 내 영화제에 참가하도록 허용되기도 했다. 특히 오버하우젠 단편 영화제가 동독의 영화를 많이 초청했고, 베를린영화제도 1968년부터 포럼 섹션에서 상영했으나 항상 상황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가능했다.

한국도 독일처럼 같은 분단의 아픔을 겪고 있어 안타깝다. 그래도 지난 세월, 한국영화의 훌륭한 족적이 인상적이다."
베를린국제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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