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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포스터 갈무리.
 영화 포스터 갈무리.
ⓒ 제이리미디어, 단유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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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삶을 소재로 한 영화·출판물·전시 등의 문화 콘텐츠가 최근 늘고 있다. 이는 노인복지 및 여성 인권·권익 증진 차원에서 눈에 띄는 변화로 풀이된다. 전문가들은 과거 유럽이나 미국·일본의 고령화 과정에서 노인층의 문화·예술 활동이 크게 활성화됐는데, 한국에도 동일한 현상이 최근 나타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지난 5일 개봉한 다큐멘터리 <시인 할매>와 오는 27일 개봉하는 <칠곡 가시나들>, 그림일기 형식을 택한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남해의 봄날·190쪽) 등은 모두 팔십줄에 한글을 배워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먹고살기 바빠서, 남자 형제들에 밀려서, 남편·자식 돌보느라 등의 이유로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하고 평생을 까막눈으로 살아야 했던 할머니들이 마을 도서관에 모여 한글을 배웠다. 할머니들은 서툴고 비뚤비뚤한 글씨로 아름다운 시를 쓰고, 그림을 그렸다. 이러한 결과물이 영화로, 책으로, 전시로 나와 잔잔한 공감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할머니들은 1930년대생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일제강점기와 전쟁을 겪고 보릿고개로 대표되는 극심한 빈곤과 산업화를 모두 겪은 세대다. 일찍 결혼해 가부장제의 굴레 안에서 남편과 자녀들을 돌보며 정작 자신은 뒷전이 된 삶을 평생 살아온 분들이다. 그러다 팔십이 넘어 뒤늦게 자신의 언어를 갖게 됐고, 이것을 도구 삼아 스스로를 표현하고, 폭넓은 공감을 얻게 됐다.
 
<칠곡 가시나들> 스틸컷.
 <칠곡 가시나들> 스틸컷.
ⓒ 단유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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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말 출간된 <고향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소동·126쪽)는 한국의 '모지스 할머니'를 꿈꾸는 이재연(71) 할머니가 그린 60여 편의 그림과 글을 묶었다. 어린 시절 고향에서 겪은 다양한 추억이 한 폭의 '풍속화'처럼 펼쳐진다. 노인 세대에겐 공감과 그리움을, 젊은층에겐 교육과 세대 이음의 역할을 할 만하다. 

2016년부터 동네 도서관에서 그림을 배운 할머니는 뒤늦게 그림의 매력에 푹 빠졌다. 전시회를 제안받은 뒤 백내장 수술에도 불구하고 끼니를 잊고 그리기에 몰두했다. 76세에 그림을 배워 101세까지 활동했던 미국의 국민 화가 모지스 할머니처럼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림을 그리는 것이 작가의 바람이다. 

노인세대의 이러한 변화를 촉발한 것은 노인복지관이나 도서관·구청 등 공공기관이 제공한 각종 프로그램의 역할이 적지 않다. 이들 기관이 전문 강사와 작가들을 초빙해 노인 대상 강좌를 열면 이에 참여한 노년층이 자서전·시집을 집필·출판하거나 전시회를 여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특히 할머니들이 영화 시사회나 북콘서트, 전시회 자리에 서고 언론 인터뷰에 응하면서 자존감을 회복하고 기쁨을 느끼는 모습이 눈에 띈다. 

지난달 29일 SBS <주영진의 뉴스브리핑>에 출연한 이재연 작가는 "지금처럼 앞으로도 그림을 그리는 게 제겐 제2의 전성기"라며 "행복하고 즐겁다 보니 하루가 너무 짧다. 이렇게 행복을 유지하면서 모든 분들이 공감할 수 있는 그림을 그려서 사람들과 공감하며 저의 개인적 행복도 누리고 싶다"고 밝혔다. 
 
<고향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속 그림.
 <고향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속 그림.
ⓒ 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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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한국은 65세 이상 인구가 14.02%로 집계되면서 '고령사회'에 진입한 것으로 나타났다. 유엔(UN) 등 국제기구는 노인 비중이 7% 이상일 경우 '고령화사회', 14% 이상이면 '고령사회', 20% 이상이면 '초고령사회'로 구분한다. 한국은 2000년 노인 비중이 7.3%에 이르며 고령화사회에 진입한 뒤 17년 만에 14%를 돌파, 고령사회로 들어섰다. 전문가들은 이것이 타 국가에 비해 유례없이 빠른 속도라고 진단한다. 

정무성 숭실사이버대 총장은 22일 "어르신들이 (과거 노인세대와 견줘) 건강해진 것이고, 경제적 여유가 생긴 것"이라며 "과거에 단순히 자선을 받던 노인 세대에서 벗어나 노년에 자신을 회고하면서 자기정체성을 확인하고 자아실현을 하고 싶은 노인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정무성 총장에 따르면, 현 사회는 인구 고령화에 따른 세대 갈등이 매우 심각한 수준으로, 이러한 노인 서사 콘텐츠는 젊은 세대가 노인의 학습욕구 등 (배우지 못한) 노년세대의 한을 풀어주는 한편 현 사회가 옛 시대를 돌아보는 기회를 제공한다. 앞으로 노인이 주체가 되는 자원봉사 활동 및 활발한 문화예술 지원정책을 통해 노인층에 대한 의존적, 수동적, 사회와 가족의 짐이라는 기존 이미지에서 탈피할 필요가 있다.  

정 총장은 "이것은 젊은 세대가 함께할 때 가능하고 그런 문화가 선도적으로 나타나서 베이비 부머 세대(전후 세대·특히 1955~1963년생)에게 앞으로의 노년문화를 '액티브 에이징'(active aging)으로 바꿔나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주는 것 같다"며 "노인복지 정책이 물질적 지원만으론 한계가 있다. 문화예술 지원을 통해 삶의 질이 달라지는 방식으로 복지정책이 펼쳐져야 된다"고 제안했다.

태그:#그림일기, #노인서사, #여성서사, #액티브에이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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