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레토>의 공식 포스터

영화 <레토>의 공식 포스터 ⓒ 엣나인필름

  
일본 TV도쿄 애니메이션 <달빛천사>를 최근 다시 보면서 영화 <레토>가 겹쳐 보였다. 솔직히, 두 작품 간의 연관성은 찾기 어렵다. 단지 내가 최근에 두 작품을 모두 봤고 주관적으로 비슷한 인상을 받았다는 점이 전부다. 그러나 여기엔 그것 나름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공통점에 대해 논증해보려고 한다.

음악의 종말: 노래를 통해 무엇을 전하고 싶은가

만화 <달빛천사>는 죽음을 앞둔 소녀에게 저승사자(의 탈을 쓴 천사)가 다가와 소원을 이루어 준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물론 긴 만화의 내용을 간단히 축약한 것이다. 만화가 말하고 싶은 것은 한 마디다. "노래를 통해 무엇을 전하고 싶은가?"

누군가 "왜 노래를 하고 싶냐"고 루나(이용신 성우)에게 물었을 때 나는 그 점을 떠올렸다. 영상에서 음악이 갖는 힘(의미)은 무엇인가. 잘 생각해보면, 그 물음에 대한 답은 만화를 더빙하는 성우들의 모습에 단서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영상에 목소리를 입히는 성우는, 세상을 노래하는 가수와도 비슷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가수라는 직업은 자신이 보는 세상을 목소리를 통해 보여준다. 나는 음악의 리듬은 영화의 리듬, 편집의 리듬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영화에서 음악이 흘러나오는 순간의 리듬 역시 비슷하지 않을까.

<레토>가 전하는 것은 붕괴를 앞둔 구소련의 어느 공간이다. 현재 러시아의 관객들에겐 이 영화가 남다르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그런데 단지 러시아 관객뿐만은 아닐 테다. 왜냐하면 소련의 붕괴는 냉전의 붕괴였고, 그 거대한 벽이 무너지는 순간의 체험은 세계 어느 곳에서나 유효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관객들이 <레토> 터널의 마지막에서 뛰노는 빅토르 최(유태오)의 모습에서 목격하는 것은, 그동안 추억 속에서만 존재하던 어떤 이를 떠올리는 방식과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보통 희망을 말할 때 터널에 자주 비유한다. 길고 긴 어둠(터널)을 견뎌내면 그 끝에 하얀 구멍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희망에 빗댄 것이다. 물론 그 터널에는 끝이 없을 수도 있다. 저 멀리 북에 가족을 두고 온 실향민이나 어린 시절에 아이를 잃어버린 부모이거나, 첫사랑을 아쉽게 떠나보낸 사람들. 이 기억에 끝이 있다고 우리가 함부로 말할 수 있을까?
 
 <달빛천사> 한국어 번역판

<달빛천사> 한국어 번역판 ⓒ 학산문화사

 
<달빛천사>에서도 비슷한 은유가 등장한다. 그러나 우리가 잃어버린 실종자라는 이름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서 구천을 헤매는 '달빛천사'들일 테다. (사실 이건 중요한 스포일러다.)

<달빛천사>에서 저승사자는 한 명의 망자를 저승에 성공적으로 인도해야만 견습 딱지를 뗄 수 있다. 그리고 루나의 동행 저승사자 중 한 명인 타토(엄상현 성우)는 식물인간 상태에서 저승사자가 되었다. 이 점은 작품 초반에 불완전한 날개라는 것으로 복선이 깔리며, 불완전한 죽음은 다른 이를 죽음으로 인도할 수 없다고 말한다. 여기서 루나는 '죽음이 확정되었지만 그래도 노래하고 싶은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면, 우리는 영화가 나아가는 시간의 원리를 그곳에서 확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 말해야 하는가? 즉, 왜 노래해야 하는가? 루나의 대답은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다. 그런데 그 사랑하는 사람은 기억 속에서만 존재한다. 잊을 수 없는 터널 끝의 실종자, 나는 여기서 <이터널 선샤인>을 불러온다. 그 영화에서, 사라지는 기억 속에서 생존을 위해 저항하는 꿈의 방랑자 조엘 바리쉬(짐 캐리)는 '그럼에도' 같은 사랑을 반복하게 된다. 말하자면 조엘은 반복되는 죽음 속에서도 사랑을 추구하는 인물, 이것을 죽음이 반복되는 영화(결말이 다가오는 영화)에서 같은 사랑을 추구하게 되는 영화 담론의 모습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영화의 음악이라는 게 영화 리듬의 작은 축소판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자체가 반복되는 것과 영화의 음악이 반복되는 것은 그 담론의 리듬을 공유하면서도, 영화보다는 비교적 손쉽게 재생되고 반복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요컨대 그 음악의 반복이 영화의 죽음에 저항하는 행위라면, 그러니까 조엘처럼 기억의 죽음에 저항하는 행위라면, 음악을 노래하는 것은 죽음을 기억하겠다는 선명한 의지의 표명이 아닐까. 음악이 시작되면, 자연스럽게 그 끝을 가늠하게 되는데, 이 가늠은 영화보다는 짧은 러닝타임을 지닌 리듬이기에 더 손쉽게 이루어진다.

결국 리듬이 말하는 것은 죽음이라는 게 일상 속을 자연스럽게 부유한다는 점이다. 온 세상 어디에나 죽음이 만개해있다는 것이고, 그래도 다시 만날 수 있으므로 슬퍼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며, 이것을 회피라던가 추억이라던가 하는 말(눈을 감으면 벌어지는 일들, 그 어둠)로 표현할 수도 있지만 그 대신에 나는 이렇게 표현해보고 싶다.

어쩌면 음악은 그것이 작동하는 영화의 원리를 축소해서 보여주는 게 아닐까? 그러니까 <레토>가 노래하는 것은 매 순간의 1980년대 소련이며, <보헤미안 랩소디>의 마지막 공연은 프레디 머큐리의 죽음을 추모하는 시간이고, <달빛천사>에서 벌어지는 52번의 시작과 끝 그리고 1화와 52화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단 하나의 노래 'New Future'는 영화의 이야기가 아닌, 죽음의 측면에서 작동하고 있다. 고 나는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음악(을 담은 영상)은 작품성이 아닌 음악성의 측면에서 작동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레토>와 <달빛천사>라는 상이한 작품에서 내가 보았던 것은 그런 점이었다. 그해 여름, 우리가 말해야 할 것은 지금 이곳에서 재현되고 있다. <레토(여름)>는 반복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존 카니의 <싱스트리트>도 아니요, 데미안 샤젤의 <라라랜드>도 아니다. 노래의 끝에서 시작으로 이동하는 리듬의 물결, 순환하는 계절과 교차하는 영화의 쇼트에서 우리가 찾아낸 소중한 한때이다.
영화 만화 달빛천사 레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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