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한직업> 포스터

<극한직업> 포스터 ⓒ CJ 엔터테인먼트

 
<극한직업>은 등장인물, 스토리, 감독 등에 대한 정보 전혀 없이 동네 친구들과 운 좋게 우연히 보게 된 심야영화였다. 정말 많이 웃었고 즐거웠다. 명절 내내 많이들 보겠구나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극장가는 상영관 두 세 개 이상씩을 할애하면서까지 촘촘히 시간표를 짜 '이 영화는 봐야만 해'라고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하는 듯했다.

천만 영화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잘 쓰여진 대사들과 캐릭터들간의 합에 감탄했다. 그렇지만 그 웃음들 이후 불편하게 머릿속을 헤매는 잔여들에 대해 얘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역시나 벗어나지 않는, 고쳐지지 않는 고질적인 여성 캐릭터에 대한 편견 말이다. 이 영화에서 대사를 가진 여성은 4명이다(연출자의 지난 작품에 비해 주연급 5명 중 무려 1명을 여성으로 넣었으니 이를 발전이라 해야 할 지 모르겠으나...).

‪잠복 수사 중에 중년의 여성이 마약반 형사 한 명에게 "왜 나를 스토킹하냐"며 따진다. 여기서는 스토킹 대상을 사회적인 '여성성'(성적 대상)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중년'으로 설정했다는 이유로 엄연한 '범죄'임을 교묘하게 비켜나가며 이를 유희로 승화시키고자 하지만, 어느 누구에게건 '스토킹'은 농담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몇 년 전 업무적으로 알게 된 하나 사람이 자전거를 타다 넘어져 멍이 든 내 다리를 본 뒤 주변에 10여명의 사람이 있음에도 "어? 데이트폭력?"이라며 깔깔 웃었다. 만일 그것이 정말 데이트 폭력으로 인해 얻어진 상처였다면? '일방적인 폭력'은 유머의 소재가 아니어야 한다.

공동 주연급인 마약반 5명에 그나마 여성 캐릭터 이하늬 한 명을 끼워준 것만으로 감사해야할까. 어떤 이들은 외모에 치중해 주어졌던 역할에서 벗어나 '동료' 중 한 명으로 그려지는 모습은 기존 한국 영화와 비교해봤을 때 괄목한 만한 성과라고도 한다. 그러나 그녀의 로맨스 라인은 흡사 미녀와 야수 급. 외모로 비하 받기 일쑤인 상대 동료와 서로 마음을 확인하고 키스를 나누는 순간 동료들은 대번에 그들을 두고 농담으로 (총을) 쏘라고 한다. 상대가 평소 '외모 비하'로 놀림 받아오던 대상이 아니었어도 그런 농담이 유머로 기능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사실상 여기서도 이하늬 배우는 '미녀'의 이미지에서 비껴나가지 못했다.

‪마약반 반장의 부인은 철야로 잠복 수사를 하고 들어오는 신랑의 빨랫거리를 항상 명품 종이백에 담겨진 채로 받기 일쑤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잠복수사로 인해 우연히 큰 돈을 벌게 되자 그 명품 종이백에 진짜 실물 명품백과 현금다발이 담겨온다. 부인은 이에 기뻐하며 "나 씻을까?"라며 화답한다.

연출자는 집안일(무료 가사 노동)을 하는 여성에게 '명품백'이 과연 그 노동들에 응답하는 선물이라 순수하게 생각하고 쓴 것인지 궁금하다. 명품 좋아하는 여자는 곧 사치스러운, 일명 된장녀라는 익숙한 혐오의 서사가 떠오르지 않는가? 이에 성관계를 암시하는 것으로 응답하는 아내(안 사람-을 뜻하는 말이어서 쓰기를 지양한다). 여기서 그녀의 역할은 '안사람'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그게 전부다.‬

‪마약왕을 보필하는 보디가드 여성은 우리가 <킹스맨>에서 열광했던, 매력적인 살인무기를 연기한다. 그녀는 무자비하게 마약왕의 오더에 따라 사람들을 처치할 뿐 어떤 감정도 표현하지 않는다. 마지막 그에게 버림 받았을 때 내뱉는 한 마디가 이 캐릭터가 가진 대사의 전부다. 살인무기, 그 뿐이다. 게임 광고들에서만 보아도 남성들은 '무장된 여성'으로부터 압도 되는 이상한 판타지가 있는 듯하다(그 예로 투 톱의 주연 여성을 내놓았지만 단순히 예정된 서사를 위해 인물(peronality)이 아닌 '기능적인' 대상(subject)로서 쾌감의 미학만을 선보이고자 했던 <마녀>를 예로 들 수 있을 거 같다).

한국 영화에서 제대로 된 여성 캐릭터를 보고 싶었던 마음은 역시 웃음만으로는 채워지지 않았다. 게다가 여성이면서 7년가량 페스코 채식을 하는 나에게 있어 애초 닭이 곧 '서민'이라고 명명하는 영화의 전반적인 정서 아니 치맥으로 단결된, 대한민국 사회의 지나친 소비를 당연한 전제로 깔고 들어가는 것은 매우 폭력적으로 다가왔다.

생닭을 토막내고 조리하는 장면들은 보기 매우 불편하고 고통스러워 그런 장면들이 꼭 필요했는가에 대한 의문이 있다. 영화 포스터의 카피는 '닭'과 '범인' 중에 무엇, 누구를 먼저 잡을 것인지를 당차게 묻는다. 치킨 공화국인 것은 알겠으나 '공장식 축산'의 문제점을 아는 사람이었다면 저런 포스터 속 카피는 감히 올리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들의 역할만에 충실할 수밖에 없었던 여성 캐릭터들의 한계와 '치킨'을 소비하지 않는 나로서는 영화를 보면서 감칠맛 나는 대사와 리듬들에 웃음을 터뜨리다가도 종종 침묵으로 빠져야만 했다.
극한직업 여성 영화 치킨 이하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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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여름 한국을 떠나 런던을 거쳐 현재 베를린에 거주 중이다. 비건(비거니즘), 젠더 평등, 기후 위기 이 모든 것은 ‘불균형’에서 온다고 믿기에 그것에 조금씩 균열을 내 기울어진 운동장을 일으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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