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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에게 고열증세가 있었다. A형 독감이었다.
 둘째에게 고열증세가 있었다. A형 독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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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 어느 수요일 새벽 5시쯤이었다. 옆에서 자고 있던 여섯 살 난 둘째 아이의 몸이 뜨거워 체온을 재보니 39℃가 넘어가고 있었다. 응급실에 가면 초등학교 2학년인 큰아이 등교 시간에 맞춰 돌아오기 어려울 것 같아 해열제를 먹이면서 열이 떨어지길 기다렸다. 그 사이 둘째는 한 모금 겨우 마신 물까지 토하면서 축 처진 몸으로 버티고 있었다.

큰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병원에 갔다. A형 독감이었고, 의사는 아이의 탈수 증세가 심하고 먹지 못하니 입원 치료를 받는 게 좋겠다고 했다. "큰아이를 돌볼 사람이 없어 입원을 못하겠다"라고 한 나를 의사는 황당해 했다. 수액이라도 맞히고 집에 가라는데 "큰아이가 돌아오는 낮 1시 20분 전까지 끝나느냐"고 묻는 날 한심한 듯 쳐다봤다.

주사액을 반쯤 맞았을까. 이미 오후 2시가 넘고 있었다. 간호사들이 말렸지만 서둘러 주삿바늘을 빼달라고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큰아이는 나를 보자마자 왜 이렇게 늦었느냐고, 혼자 있는 동안 무서웠다고 울상이었다.

여전히 힘들어 하는 둘째 아이를 눕히고, 속상했을 큰아이 마음을 달래줬다. 큰아이 간식을 챙기고, 둘째 아이 먹일 죽을 끓였다. 아이들을 챙겨 먹이고 나서야 자리에 앉았다. 그제야 나도 온종일 굶었다는 걸 알았다. 그날 남편은 오전 6시에 출근해 자정에 돌아왔다.

아픈 아이를 대신 돌봐줄 사람도, 안 아픈 아이를 맡길 곳도 없는 이런 날, 손 뻗으면 닿는 곳에 도움받을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직은 집에 혼자 있기 힘들어 하는 큰 아이를 혼자 있게 해 미안한 마음과 아픈 둘째를 잘 치료받지 못하게 했다는 죄책감으로 뒤범벅된 하루를 보내지 않아도 된다면, 엄마로 사는 내 삶은 얼마나 안심이 될까.

누군가에겐 가장 절실한 '돌봄'
 
서울 강서구 화곡본동 '공간 짬'의 모습.
 서울 강서구 화곡본동 "공간 짬"의 모습.
ⓒ 공간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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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서구 화곡본동 '공간 짬'의 모습.
 서울 강서구 화곡본동 "공간 짬"의 모습.
ⓒ 공간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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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고 있는 서울 강서구 화곡본동에는 2014년 9월부터 지역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공간 짬'이 있다. 아이를 기르는 엄마들이 서로의 아이들이 아플 때나 집안에 일이 생기는 등 사정이 있을 때마다 도왔다.

아이들은 성장 과정 중 다른 동네 아이들을 만나면서 '엄마는 아프고 아빠는 술만 마신다', '학교 끝나고 집에 가도 아무도 없다', '저녁때가 되도록 여기저기 학원을 다닌다'는 사정을 서로 이야기한다. 부모들은 '내 아이와 노는 동네 아이들도 함께 키워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자연스레 개인이 출자금을 내 공간을 마련하게 됐다.

평일 낮 1시부터 5시까지 열고, 낮 2시~4시 사이에는 무료로 간식을 챙겨준다. 드나듦에 비용, 나이, 자격 등의 제한이 없으니 '공간 짬'은 동네 아이들의 아지트 같은 곳이 됐다.

'공간 짬'은 예측하기 어려운 일상을 사는 엄마들에겐 가까이 사는 친정엄마와 같은 장소다. 9명의 운영진과 동네 엄마들이 매일 돌아가면서 아이들을 맞이하고, 간식을 만들어 주고, 공간을 지켜 운영한다. 다만 여러 사정으로 일주일에 하루 수요일엔 쉬는데, 그날 하필 우리집 둘째가 아팠고 큰아이를 그곳에 보낼 수 없었다.

'우리동네 키움센터' 정책의 사각지대
 
서울시의 '우리동네 키움센터' 홍보 이미지.
 서울시의 "우리동네 키움센터" 홍보 이미지.
ⓒ 서울시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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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는 중앙정부의 '다함께 돌봄 사업'을 확대 운영해 '우리동네 키움센터'를 2022년까지 400개 소로 확충, 돌봄의 사각지대였던 단기·일시·긴급 돌봄의 역할을 담당할 것이라고 밝혔다(온종일 돌봄을 위한 키움 센터 운영매뉴얼 개발연구, 2018). 만약 지역 주민들의 욕구가 만들어 낸 '공간 짬'이 정부의 정책과 만나게 되면 안정적인 운영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행정의 편의성 탓인지 키움센터의 초점이 '공적 유휴 공간'에 맞춰졌다.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2019 다함께 돌봄사업 안내'에 따르면, 종합사회복지관 등의 사회복지시설, 구립도서관 같은 공공시설, 아파트 커뮤니티 유휴 공간 등에 설치 가능하다.

약 300m 거리에 초등학교가 두 곳이나 있는 화곡본동에는 종합사회복지관도, 구립 도서관도, 아파트도 없다. 돌봄에 대한 지역주민들의 욕구만 있을 뿐이다. 공적 유휴 공간이 공적 운영까지 담보하는가. 우리들 개인에게 가장 절실한 돌봄 문제가 '당신의 사정'이 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마을에서 서로의 사정을 돌봐가며 아이를 키워 온 사람들이 국가의 '돌봄 정책'에 대해 전문적 지식을 갖긴 어렵다. 외국의 성공적 사례나 복잡한 이론 체계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몸으로 익힌 '돌봄의 행위'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할 수 없다.

아이의 성장 발달 이론에 대해 말하기는 어렵지만, 아이들이 왜 액체괴물을 좋아하는지 알고 있다. 상담학이나 심리학에 대한 전문적 지식은 없지만, 아이들 사이의 갈등이 생길 때 상황이나 관계의 맥락을 이해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아이들이 공간에 주로 오는 시간대와 날씨를 알고 있으며, 아이들이 특히 좋아하는 간식의 종류도 잘 알고 있다.

돌봄의 사각지대를 위한 국가 정책에 사소해 보이는 개개인의 사정과 경험적 지혜들을 얼마나 녹여낼 수 있을까. "문제는 결국 유연성"(<밤이 선생이다>, 황현산, 176쪽 표현 차용)이다.

덧붙이는 글 | 월간 소셜워커 3월호에 기고했습니다.


태그:#키움 센터, #초등 돌봄, #공동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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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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