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일본으로, 그리고 다시 한국. 두 나라를 오가는 동안 축구 선수 조소현은 거침이 없었다. 한국에서 다섯 차례, 일본에서 한 차례 우승컵을 들어올렸고 국가대표팀에서는 든든한 캡틴으로 후배들을 이끌었다. 2017년에는 한국 여자축구 사상 세 번째로 센추리 클럽에 가입했다.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었던 그는 한국에서의 다섯 번째 우승 이후 모든 것을 내려놓고 '도전'을 선택했다. 한국 나이 서른하나. 베테랑이라는 소리가 전혀 어색하지 않은 그가 날아간 곳은 유럽에서도 우리에게 알려진 것이 거의 없는 노르웨이였다.

국내 팬들에게 소식조차 전하기 힘들 정도로 외롭고 머나먼 곳이었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잉글랜드 무대에 입성하는 데 성공했다. 지난달 잉글랜드 여자축구 1부리그 위민스 슈퍼 리그(WSL)의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WFC에 입단한 조소현의 이야기다.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미드필더 조소현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미드필더 조소현 ⓒ 하위나이트 스포츠 제공

 
2009년 WK리그에 데뷔한 이후 어느덧 열한 번째 시즌을 맞이한 조소현은 돌고 돌아 지구 반대편에 둥지를 틀었다. 한국과 일본, 노르웨이와 잉글랜드까지 네 곳의 리그와 다섯 개의 팀을 거친 조소현은 한국 여자축구의 산 증인이다. 산전수전 다 겪은 그가 바라본 유럽과 한국의 여자축구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지난 18일(한국 시간) 이메일을 통해 조소현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인상 깊었던 상대팀은 역시 올림피크 리옹, 러브콜 받은 팀이기도

- 늦었지만 FA컵 8강 진출을 축하한다. 웨스트햄 입단이 확정된 뒤로 매우 바쁜 스케줄을 보내는 것으로 알고 있다.
"영국에 도착해서 하루 정도 쉬고, 촬영도 하고, 훈련에도 가볍게 참가했는데 솔직히 바로 데뷔전을 치르게 될 줄은 몰랐다(조소현은 입단을 공식 발표한 뒤 불과 5시간 만에 맨체스터 시티전에서 교체 출전하며 데뷔전을 치렀다-기자 주). 아무래도 부상 선수들도 많고 해서 감독님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신 것 같다. 경기가 끝나고 감독님이 좋은 플레이를 했다고 격려해주셔서 다음 경기를 준비할 때 자신감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데뷔전을 치른 날 곧장 대표팀에 합류해서 참가한 중국 4개국 친선대회 때는 솔직히 몸이 많이 무거웠다. 스스로도 내가 대표팀에 있으면서 몸이 이렇게 안 좋은 적이 있었나? 라고 생각했던 대회였다. 피로가 많이 쌓인 상태였고 아무래도 영국과 중국을 오가며 시차가 많이 바뀐 탓에 몸에 무리가 간 것 같다.

1월 28일(현지 시간) 리버풀을 상대로 선발 데뷔전을 가졌는데, 솔직히 아직 동료들과 손발을 많이 맞춰보질 못해서 그냥 되는대로 뛰었다. 후반전에 들어가서야 조금 감이 잡히더라. 팀에 녹아들기 위해서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조소현의 선발 데뷔전을 알리는 웨스트햄

조소현의 선발 데뷔전을 알리는 웨스트햄 ⓒ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WFC 공식 인스타그램

  
- 첫 추춘제 리그 경험이다. 평소 같았으면 비시즌이었을 시기에 시즌을 치르고 있다. 힘들지는 않나?
"솔직히 조금 힘들긴 하다. 다른 선수들은 이미 시즌에 맞춰 몸이 만들어져 있는 상황이었고, 나는 이제 컨디션을 끌어올려야 하는 상황이다. 코칭스태프들이 옆에서 많이 도와주고 있다. 감독님도 내 컨디션이나 경기 감각이 빨리 올라오기를 기다리시는 것 같다. 다행히 점점 좋아지고 있어서 감독님이 많이 좋아하신다.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더 노력할 것이다."

- 위민스 슈퍼 리그의 첫인상은 어땠나.
"확실히 아시아 팀들처럼 패스로 만들어가는 스타일은 아니다. 하지만 공수 전환 속도가 상당히 빠르고 압박의 강도나 선수들의 파워, 스피드, 그리고 역습할 때 밀고 올라오는 속도가 정말 빠르다. 때문에 퍼스트 터치의 중요성을 온몸으로 실감하고 있다."

- 아시아 무대에서는 클럽대항전을 경험하지 못했는데 노르웨이로 진출하면서 챔피언스리그를 경험했다. 소감과 인상 깊었던 상대를 말해달라. 그리고 아발스네스 시절 챔피언스리그에서 잉글랜드 클럽을 만난 적이 있었나?
"안타깝게도 잉글랜드 팀과는 만나지 못했다. 32강에서 프랑스의 올림피크 리옹을 만났기 때문이다. 기왕 올라가다가 떨어질 거면 차라리 강팀을 만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리옹을 만나서 좋았다. 리옹과의 두 경기로 인해 자신감도 많이 갖게 됐고, 월드컵을 앞두고 미리 프랑스 선수들과 붙어 볼 수 있었다.

인상 깊었던 팀은 역시 올림피크 리옹이다. 챔피언스리그 최다 우승팀이고 좋은 선수들이 많이 포진해 있다. 그래서인지 속도, 기술, 전술, 정확성 등 모든 면에서 우리보다 한 수 위였다. 과거에 인천현대제철에서 뛰던 시절 리옹에서 러브콜이 왔었는데 이래저래 시기가 안 맞아 실제로 성사되지는 못했다. 리옹이 2015-16시즌부터 세 시즌 연속으로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내가 잘하든 못하든 거기서 지금까지 버티고 있었다면 우승 타이틀도 타이틀이지만 후배들에게 좋은 귀감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한다."

- 웨스트햄에 오기 전 노르웨이에서 한 시즌을 뛰었다. 국내에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는 곳인데.
"아발스네스 팀만 해도 산하 남녀 유스팀을 모두 보유하고 있다. 여자팀만 얘기하자면 일단 B팀 선수들은 B팀대로 리그 경기를 치른다. A, B팀 양쪽에 다 포함된 선수들은 A팀 스케줄을 따라가는데, A팀에서 경기에 출전하지 않거나 짧은 시간만 소화할 경우에는 B팀에 합류해 경기를 뛴다. 간혹 B팀에 좋은 선수가 있거나 선수가 부족하면 A팀에 불러 같이 훈련을 하는데, B팀 선수들에게는 좋은 경험과 동기부여가 된다.

시즌 중반쯤에 행사가 있다. 그때는 모든 팀이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에 모여서 리그를 치르고 각종 이벤트도 열린다. 사람들이 축구와 관련된 놀이에 참여하기도 하고, 경기들도 다 중계된다. 선수들 사이에서도 이 날은 리그에서 제일 큰 행사라고 알려져 있다."

여자축구 국가대표팀 캡틴, 당당히 유럽 누비다
 
 아발스네스 시절 챔피언스리그에서 올림피크 리옹을 상대하는 조소현

아발스네스 시절 챔피언스리그에서 올림피크 리옹을 상대하는 조소현 ⓒ 조소현 공식 인스타그램

  
이제는 당당히 유럽 무대를 누비고 있지만, 조소현은 WK리그에서도 눈부신 업적을 쌓은 선수다. 리그 원년이던 2009년 단 한 명에게만 허락되는 드래프트 전체 1순위의 영광을 차지했고, 수원시시설관리공단에서 한 차례(2010년), 그리고 인천현대제철에서 네 차례(2013, 2014, 2015, 2017년)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맛봤다.

이제서야 열한 번째 시즌에 들어선 어린 리그지만 WK리그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나름대로 치열하게 발전을 거듭해왔다. 초라한 관중 수와 이천대교의 해체 등 모진 풍파를 겪기도 했다. 그럼에도 홈 & 어웨이 제도 정착과 구단 산하 유스팀 보유 권고 등을 통해 빠르게 구색을 갖춰나가고 있다. '개국공신' 조소현에게 WK리그 질문을 빼놓을 수가 없었다.

- WK리그 출범 이후 처음 시행된 2009 드래프트 전체 1순위의 주인공이다. 본인에게는 굉장히 의미 있는 타이틀일 것 같다.
"드래프트 당시에는 미국에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소식을 들었다. 전부터 1라운드 1순위를 내심 욕심내고 있었다. 제발 1순위로 뽑히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정말 그렇게 돼서 너무 기분 좋았고, 의미 있는 타이틀의 주인공이 되어서 영광스럽게 생각한다."

- 2016년 고베 아이낙 임대 시절을 제외하고는 리그 출범부터 꼬박 8시즌을 WK리그에서 뛰었다. 그 사이 WK리그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본인이 생각했을 때 가장 긍정적인 변화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상무 선수선발 제도 변경이라고 생각한다. 이전까지는 입대를 원치 않았지만 지명을 받아서 어쩔 수 없이 입단하는 선수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제도 변경 이후로는 자신이 원해서 상무를 선택한 선수들이 많다(보은상무는 2015시즌까지 드래프트에 참가했다가 2016시즌부터는 드래프트에 참가하지 않고 별도로 지원자를 받아 선수를 선발하기 시작했다-기자 주). 선수들 스스로가 자신의 미래를 생각해서 내린 결정인 만큼 축구에 더 의욕적으로 임하고 상무도 전보다 팀을 더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지 않을까."

- 수원과 인천에서 총 다섯 차례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경험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우승은 언제인가.
"수원에서 우승했던 2010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당시 상위 두 팀만 챔피언결정전에 직행할 수 있는 상황에서 팀이 2위와 3위를 아슬아슬하게 오가고 있었다. 그 때 원하지 않는 중앙 수비 포지션을 봤는데 함께 뛰던 언니들과 수비 관련한 부분에서 마찰이 많았다. 그래서 많이 힘들었지만, 사실 언니들도 나 때문에 많이 힘들었을 텐데 내 얘기를 많이 들어주었다. 이런 부분에 언니들께 감사하다. 정말 모든 선수들이 고생했고, 정말 멋있다고 생각했던 팀이다."

- 인천현대제철이 2018시즌도 우승을 차지하면서 통합 6연패를 달성했다. 한편으로는 오랜 시간 현대제철의 독주가 이어지는 현재의 상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본인의 생각은 어떤지 궁금하다.
"현대제철에서 오래 뛴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조금 조심스럽지만, 사실 현대제철의 독주가 맞다고 생각한다. 끊임없이 좋은 선수들을 영입하고 또 잔류시키기 때문이다. 그만큼 현대제철이 투자를 많이 하기 때문이고, 또 그에 따라 좋은 선수들을 데리고 항상 일정 수준 이상의 경기력을 유지해야 한다는 부담감도 안고 간다.

투자만 잘 이뤄진다면 다른 팀도 충분히 현대제철만큼 할 수 있다. 이번에 경주한수원도 창단 2년 만에 2위까지 올라오지 않았나. 경주한수원이 다른 팀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었으면 한다."
 
 인천현대제철 시절의 조소현

인천현대제철 시절의 조소현 ⓒ 한국여자축구연맹

  
조소현을 얘기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국가대표팀 '캡틴'이다. 조소현은 현재 한국 여자축구 A매치 출전 1위(116경기)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중원에서 활발하게 움직이며 몸을 사리지 않고 헌신적인 플레이를 펼치는 그의 존재는 대표팀에서 대체불가 그 자체다.

- 현재까지 A매치 116경기 20골을 기록하고 있다. 가장 기억에 남은 A매치와 골을 하나씩 꼽아달라.
"2015 FIFA 캐나다 여자 월드컵 프랑스와의 16강전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 우리가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했던 경기였고, 우리나라 여자축구의 현실을 새삼 느끼게 해준 경기였다. 경기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월드컵에서도 프랑스를 만난다고 하니 정말 기다리기 힘들다.

골은 미국과의 친선경기(2013년 6월 15일, 1-4 패)에서 넣은 중거리 슛 골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내가 세계 최강 팀과 붙어서도 골을 넣을 수 있다는 것을 느낀 경기였다. 이 때의 경험 덕분인지 중요한 경기나 강팀을 만났을 때 경기력이 잘 나오는 것 같다."

"여자선수도 결혼 후 선수생활 할 수 있다... 은퇴 후엔 행정가 꿈꿔"
 
 조소현은 4년 전 좌절을 안겨준 프랑스를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다

조소현은 4년 전 좌절을 안겨준 프랑스를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다 ⓒ 대한축구협회

  
- 본인을 비롯해 여자축구를 이끌었던 88년생 세대 선수들이 어느덧 베테랑이 되었다. 88년생 세대와 지소연-이민아 세대 이후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있다. 이에 대한 생각은. 그리고 눈여겨보는 후배가 있다면.
"90년생 후배들도 어느덧 서른이 되었다. 좋은 선수들이 계속해서 끊임없이 나와야 하는데, 가뭄에 콩 나듯 나오는 것 같다. 어린 선수들이 전보다 많이 들어오긴 했지만 지금보다 더 많아야 한다. 그리고 어린 선수들 사이에도 분명 경쟁이 필요하다. 우리 88년생 세대가 그랬다. 잘하는 언니들도 정말 많았고 또래들도 많았기 때문에 항상 보이지 않는 경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선수들이 많이 없다보니 그런 경쟁들이 잘 이뤄지지 않는 듯하다. 윤덕여 감독님의 고충을 어느 정도 알 것 같다.

눈여겨보는 후배는 있는데, 그냥 뒤에서 조용히 응원할 생각이다. 이름을 직접 언급하면 그 친구가 부담스러워할 테니까."

- 현재 한국 여자축구에서는 결혼과 선수생활을 병행하기가 어려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결혼과 선수생활에 대한 본인의 생각은. 지금까지 만난 동료들 가운데 기혼자가 있다면 이들에 대한 얘기도 들려주면 좋겠다.
"아직까지는 팀에 결혼한 동료는 없었다. 다른 팀에는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웨스트햄에서 만난 동료들은 내가 오래 만난 남자친구도 있고 결혼도 약속한 사람이라고 하니까 빨리 결혼하라고 한다. 동료들이 한국은 결혼해서 축구하는 사람 없냐고 물을 때면 나는 없다고 대답한다. 동료들은 그게 신기한지 왜 결혼한 뒤에도 축구 안 하냐고 묻더라.

나는 결혼한 이후에도 안정적으로 선수생활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임신을 해도 조금만 시간을 주고 믿고 기다려주면 선수들은 그에 맞게 준비해서 돌아올 수 있다. 지난 캐나다 월드컵을 같이 뛰었던 (황)보람 언니가 결혼과 출산으로 잠시 은퇴했다 이번에 다시 선수로 복귀했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기뻤다. 외국에서는 흔한 일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렇지 않은데, 언니가 정말 힘든 결정을 내렸다. 분명 다시 축구를 하기 위해 정말 많은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언니라면 금방 예전과 같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보람 언니가 복귀해서 좋은 활약을 펼친다면 다시 한 번 고정관념을 깨는 셈이니까 열심히 응원하고 싶다."

- 팬 입장에서는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모든 선수는 언젠가 은퇴하는 날이 온다. 은퇴 이후의 삶을 생각하고 있는지. 그리고 은퇴한 뒤에는 어떤 선수로 기억되고 싶은지 궁금하다.
"JS파운데이션의 박지성 이사장님처럼 은퇴한 뒤에도 대표팀의 영원한 캡틴으로 기억되고 싶다. 팬들이 나를 정말 중요할 때 '이 선수가 있었으면 달랐을 텐데'라고 생각해줬으면 한다. 팬들과 동료 선수들, 지인들에게 정말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이고 멋진 사람으로 남고 싶다.

은퇴 이후에는 박지성 이사장님처럼 행정가를 꿈꾼다. 그분이 가는 길이 곧 내가 가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한 번도 대화하거나 만나본 적도 없지만 나의 미래에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분이다. 내가 박지성 이사장님을 보며 행정가의 꿈을 키우는 것처럼 후배들 중에서도 분명 나를 보며 꿈꾸는 친구들이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런 후배들에게 좋은 길을 만들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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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청춘스포츠 6기 윤지영
축구 해외축구 여자축구 웨스트햄 조소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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