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아침에 눈을 떠보니 9시. 유치원 등원 버스를 타려면 집에서 9시 10분에 나가야 하는데 동글이는 아직 꿈나라다. 오늘 오전에는 독서모임도 있고, 부동산에서 집보러 온다고도 했는데 어젯밤 쌓아둔 설거지는 그대로고 거실은 난장판이다. 아이 보내고 혼자 치우려 미뤄뒀던 일이 9시 기상으로 꼬여버렸다.

'차로 얼른 등원을 시킨 후에 집을 정리할까? 하루 결석할까? 아니 오늘 6세 반 마지막 수료식이지. 어쩌지...'

여러 가지 플랜B를 그리며 침대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왔다. 눈앞에 안방에선 암막 커튼 때문에 보이지 않았던 새하얀 세상 밖 풍경이 펼쳐졌다.

망했다.

차로 부리나케 데려다 주고 오려던 계획이 날아갔다. 집을 내놓은 지 한 달이 넘었는데 집보러 오는 사람이 없다. 오늘 집보러 오는 이가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 1명인데 지금의 집안꼴은 대략 난감이다. 남편을 깨웠다. 집안 정리를 부탁하고(얼마나 진전이 있을지 미지수지만) 아이를 준비 시킨 후 차에 시동을 걸었다.

질퍽질퍽한 눈으로 인해 15분 정도 거리에 있는 유치원을 오고가는 시간이 40분 이상이 소요될 것 같았다. 집에서 9시 30분에 나왔으니까 집에 오면 10시 30분이 조금 안 될 거고 11시 전에 집을 정리할 수 있을지 불안한 마음에 운전대를 잡은 손에 식은땀이 났다. 

좌회전을 하기 위해 신호대기를 하는 동안 간밤에, 아침에 온 카톡을 보며 답을 보내고 있었다. 동글이가 등원 버스 타는 곳에 오지 않으니 아는 엄마가 전화도 하고 카톡도 남겼다. 그 외 부재중 메시지가 여러 건 이었다. '동글이 9시에 일어나서 자차로 가고 있어요.' 바쁘게 엄지손가락을 움직이고 있는데 뒷좌석에 있는 동글이가 말을 건다.

"엄마, 잠깐만 귀기울여봐."
"지금 엄마 운전 중이잖아. 나중에."(실은 카톡 중이면서. 아이도 다 아는데)


7살이 되면서 대부분의 글자를 깨우친 아이는 지나가면서 보이는 '김쌤수학, 아파트분양, 판타지움, 할인마트'를 읽으며 하나하나 묻는다. 이번엔 또 무슨 간판을 보고 질문하나 싶은 마음에 심드렁하게 답했다. 운전과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신호가 바뀔 때까지 핸드폰을 하다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차가 다시 달리는 순간 아이가 말했다.

"엄마, 눈 내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 눈 밟는 소리는?"
"......"
(하얗게 눈덮인 월드컵 경기장 잔디를 바라보며)
"저기 가서 눈 밟고 싶다."


좌회전을 하는 차가 영화처럼 느린 동작으로 움직이는 느낌을 받았다. 질척이고 미끄러운 도로에 짜증을 내며 까맣게 변한 눈만 바라보던 시선이 아이의 말로 인해 눈 쌓인 소나무 가지로 옮겨갔다. 신호대기하는 동안 아이는 눈이 내리는 걸 듣고 있었구나, 눈 밟고 걸어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었구나 싶은 생각에 미안했다. 아이 마음에 귀 기울여 주지 못한 것에 대한 사과를 유치원 끝나고 같이 눈을 밟자는 짧은 약속으로 대신했다.

집으로 돌아와 집안정리를 마치고 독서모임에 10분 지각한다는 메시지를 보낸 뒤 부동산 중개인을 맞았다. 

어른들은 자꾸 잊는다
 
<엄마, 잠깐만!> 표지
 <엄마, 잠깐만!> 표지
ⓒ 한솔수북

관련사진보기


오전 일정을 모두 마치고 집에 돌아와 점심을 먹은 뒤 차를 마시며 한숨 돌렸다. 정신없이 바빴던 4시간 동안 내게 중요한 건 무엇이었을까? 우리 집이 잘 팔리기 위해 정리해야 하는 일이 아이 말에 귀 기울이는 일보다 먼저였던 게 후회됐다. 유치원 하원 후에 아침에 아이 말에 귀 기울여 주지 못한 걸 사과하고 그림책 <엄마, 잠깐만!>을 읽어줬다. 

초록색 외투를 입은 엄마가 시계를 보며 아이에게 '빨리 가자'고 말한다. 아이는 엄마 손을 잡고 있지만 몸이 엄마와 반대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다. 뒤에 있는 강아지가 궁금한 아이는 아예 주저앉아 "엄마, 잠깐만. 강아지야 안녕" 인사한다. 

지하철 역으로 가는 동안 아이는 공사장 레미콘 차도 궁금하고, 공원에 있는 거위도 궁금하다.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서 메뉴판에 나와 있는 아이스크림 맛을 하나하나 다 살펴본다. 엄마가 '빨리 가자고' 재촉하지만 아이의 호기심은 수족관 물고기, 화단에 나비까지 뻗어 간다. 시간에 맞춰 빨리 가야하는 건 엄마의 사정일 뿐 아이는 지나가다 마주치는 모든 게 궁금하다.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아이는 혀를 내밀고 비를 맛본다. 아이에게 우비를 입힌 엄마는 아이 손을 잡고 뛴다.

역 안으로 지하철이 들어오고 엄마가 "빨리! 빨리!"를 외치며 빗속을 가로질러 열차를 타려고 하는 순간 아이가 외친다.

"엄마, 진짜로 진짜로 잠깐만요!"

열차 문 바로 앞에서 엄마는 걸음을 멈추고 처음으로 아이가 바라보는 곳을 본다. 그곳에는 비가 그친 뒤 떠오른 무지개 한 쌍이 있다. 엄마와 아이가 나란히 무지개를 바라보는 얼굴이 클로즈업 된 가운데 엄마가 "그래, 우리 잠깐만"이라고 말한다.

아이보다 한발 앞에서 "빨리빨리"를 외치며 종종 걸음 치는 엄마가 평소 나를 보고 그린 건 아닐까 싶을 만큼 꼭 닮았다. 아마 어린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 중 하나가 "빨리빨리"일 것이다. 시간에 쫓겨 바쁜 부모와 달리 세상 모든 게 궁금한 아이들의 엇박자를 그린 <엄마, 잠깐만!>.

이 그림책은 굵은 테두리 선에 둥글둥글한 형태, 단순한 색과 배경으로 그려졌다. 인물 행동에 집중할 수 있는 그림이다. 화려하지 않은 그림에 짧은 글로 이루어져 있지만 아이와 엄마의 서로 다른 행동이 긴장감을 준다. 어른은 '빨리 가서 열차를 타야는데 저 엄마는 애를 혼내지도 않고 대단하네' 싶은 마음으로 보고, 아이는 그림책 속 아이를 따라 이것저것 궁금해 하며 본다. 그리고 마지막 장은 어른과 아이 모두 무지개를 보며 미소 지으면 책을 덮는다.

또 <엄마, 잠깐만!> 그림책은 단순한 그림 속에 소소한 재미가 숨겨져 있다. 그 중 아이가 어항 속 물고기를 바라보는 장면은 아이 왼쪽 눈이 열대어 눈과 겹쳐져 있다. 아이 눈 위치에 물고기 눈을 놓아 아이가 물고기에 푹 빠져 있음을 그림으로 보여준다. 이때 아이 옷 색깔과 열대어 색도 같다. 물아일체의 경지에서 물고기를 바라보고 있다는 걸 말하는 것 같다. 

생각해보면 세상에 나와 모든 게 처음인 아이들이 주위 사물들이 궁금하지 않다면 그게 더 이상하다. 그런데 어른들은 자꾸 잊는다. 

오늘 아침에도 동글이는 자기 유치원 가방을 든 엄마 뒤에서 걸었다. "빨리 오라"며 등을 보여주는 엄마, 귀 기울여 달라는 말에 "나중에"라고 하는 엄마. 삶에서 보고 듣고 느껴야 할 걸 지나치는 엄마를 멈춰 세워 준 동글이. <엄마, 잠깐만!>의 아이는 엄마에게 무지개를 보여줬고, 동글이는 눈이 내리는 소리를 들려줬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는 걸 아이를 통해 다시 한번 되새겨 본다.

엄마, 잠깐만!

앙트아네트 포티스 글.그림, 노경실 옮김, 한솔수북(2015)


태그:#엄마 잠깐만, #앙트아네트 포터스, #WAIT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