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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읽는 어른이 있다. 대형서점 어린이 코너에 가면 어린이 못지않게 어른이 책을 들춰 보는 장면을 흔히 볼 수 있다. 물론 자녀에게 권하기 위해 미리 읽어보는 중일 수도 있지만, 어린이 문학을 좋아해서 직접 읽을 책을 고르는 중일 수도 있다. 물론 어린이 문학은 어린이를 대상으로 삼지만 최근 어른 독자 눈에도 드는 작품이 많아지기에 생기는 현상이다.

내 독서 목록 한 켠에는 어린이 문학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동화든, 동시든, 평론이든 가리지 않는다. 짧지만 압축된 문장을 곱씹으며 숨겨진 의미를 찾다 보면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 든다. 물론 "유치한 걸 왜 읽어?" 하고 물어오는 친구도 있다. 여기서 '유치'는 동화를 (세상에 없을 것 같은) 주인공이 나오고, (상상도 못 할 황당한) 사건이 벌어지고, (미니시리즈 마지막 편처럼 완벽하게) 해결되는 (유치하게 아름다운) 이야기로만 기억하는 데서 오는 오해일 것이다.

물론 모든 어린이 문학이 어른 독자를 만족시키진 않지만, 픽 웃음이 터지거나 핑 눈물이 도는 경험을 주기도 한다. 특히, 잊었던 기억을 불러오거나 현실 속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연결 고리나 방아쇠 역할을 하기도.
 
  종로구 창신동 꼭대기에 사는 몽이는 숨고 싶을 순간이 많다. 벼락 치던 날 나타난 수상한 꼬마가 전해준 건..
▲ 박효미 <7월 32일의 아이> 표지  종로구 창신동 꼭대기에 사는 몽이는 숨고 싶을 순간이 많다. 벼락 치던 날 나타난 수상한 꼬마가 전해준 건..
ⓒ 웅진주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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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작가 박효미의 <7월 32일의 아이>가 그랬다. 작가가 같은 이름으로 낸 동화집에 실린 작품이다. 이야기 구조는 단순하다. 폭력에 시달리는 주인공 아이가 '도깨비 감투'를 갖게 되어 모든 폭력으로부터 몸을 숨길 수 있게 되었다는.

'도깨비 감투'가 언급됐을 때 70년대 중반에 어린이 잡지 <어깨동무>에 별책부록으로 연재된 같은 제목의 만화가 떠올랐다. 신문수가 그린 만화. 연재 당시 거의 모든 어린이에게 지지를 받았던. 도깨비 감투를 쓴 주인공이 못 된 친구나 어른을 골탕 먹인다는 이야기. 이제는 기억도 가물가물한 그 만화가 기억났다.

감투를 쓰면 몸이 안 보인다니! 나에게도 있었으면 하는 상상을 하곤 했었다. 그런데 동화 <7월 32일의 아이>에 나오는 주인공은 지극히 현실적인 의미에서 도깨비 감투가 필요해 보인다.

단순한 씨줄, 이야기 구조라고 했지만 녹록지 않은 사연을 가진 등장인물들이 펼쳐내는 촘촘한 날줄로 엮였다. 우선 제목이 눈에 띄었다. 7월 32일이라니. 7월은 31일까지라는 게 세상의 약속인데. 해리포터가 찾아 헤맸던 '9와 3/4 플랫폼'이 떠올랐다. 무슨 일이 벌어질 게 분명한 설정.

달력을 뜯으니 7월 32일이 열리고, 뭔가 찜찜한 그날, 사건이 시작된다. 집 앞 나무에 벼락이 떨어지자 꼬마 도깨비와 도깨비 감투가 불쑥 나타난 것. 주인공 아이는 몽이라 불린다. 기준재라는 번듯한 이름이 있는데도. 아버지가 몽니 부리는 것으로 동네에서 유명하고, 아들도 남다르게 몽니 궂어 몽이라 불리는 것.

몽이는 폭력과 친하다.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로서. 일용직 아버지는 날이 궂으면 일이 없어 행패, 술 떨어지면 술 사 오라 행패, 라면 제때 안 끓였다고 행패다. 집 나간 엄마가 잠시 들렸을 때는 다리 가랑이 붙잡지 않았다고 기절할 때까지 때린다.

동네 구멍가게 주인도 마찬가지다. 가난한 동네, 가뜩이나 장사 안 되는데 외상으로 소주 달라고? 아이에게 안 했으면 좋을 말들을 뱉어 버린다. 때리는 것만 폭력이 아니란 걸 확실히 보여준다.

목소리만 들어도 오금을 저리게 하는 친구는 이유 없이 괴롭힌다. 졸졸 따라다니면서. 몽이는 맞서기보다는 피하는 게 좋다는 걸 경험에서 배운다. 아버지와 주변 사람과 친구로 은유한 몽이가 사는 세상. 그런 세상으로부터 당하는 폭력에 지친 몽이는 이렇게 읊조린다.
 
제발, 내가 안 보인다면, 아버지 눈에 안 보인다면… (17쪽)
 
이런 몽이 앞에 도깨비 감투가 떡! 진짜 눈에 안 보일 수도 있다니! 아이다운 앙갚음을 시작한다. 소소하게 시작해 차츰 커지는. 해진 부분이 많았을 때 감투를 쓰면 손만 안 보였었는데 도깨비가 수선할수록 안 보이는 부분도 점점 커진다. 안 보이는 부분이 많아질수록 몽이는 점점 대담해지고.

나라도 제일 먼저 구멍가게 주인과 친구를 놀라게 해 주었을 것이다. 몽이는 짜릿하다. 세상으로부터 안 보이는 게 이렇게 마음 편하다니. 가슴에 빵빵한 바람이 든 것 같다.

감투가 필요한 순간이 많아지는 건 그만큼 숨어야 할 순간도 많아진다는 것. 후반으로 달려갈수록 몽이에게 "도망쳐" 하고 외치는 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동화 주인공에게 깊이 빠졌던 것. 사람들이 '동화' 하면 떠올리는 '동화 같은 세상'에서의 그 '동화'가 아닌 동화였다. 다만 진짜 벌어지면 좋았을 그런 동화였다.

몽이를 통해 세상으로부터 폭력을 당하는 아이들을 은유한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 아이들이 세상으로부터, 폭력으로부터 숨고픈 마음을 담고 있는 건 아니냐고, 또 다른 생각도 들었다. 저런 도깨비 감투가 있다면 그 아이들에게 선물하고 싶다는. 동화에서나 가능한 그런 생각.

 
 법이 완벽하게 보호하지 못하는 가정 폭력을 다룬 영화.
▲ 영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포스터  법이 완벽하게 보호하지 못하는 가정 폭력을 다룬 영화.
ⓒ 판씨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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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진짜 선물하고 싶은 아이가 떠올랐다. 줄리앙. 지난해 많은 파문을 일으킨 프랑스 영화 <아직 끝나지 않았다>에 나오는 주인공 소년이다. 줄리앙 부모는 이혼했다. 엄마와 살고 싶다는 아이의 바람과는 달리 법은 아빠와 살게 만든다. 아빠가 줄리앙을 데리고 살려는 이유는 오로지 엄마가 사는 곳을 알아내기 위해서다.

아빠는 엄마를 사랑한다지만 스토킹에 가깝다. 아뿔싸, 마초인 데다 폭력적이기 까지도. 저러다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숨이 멎는 듯한 그 마지막 장면이라니. 나뿐만 아니라 다른 관객들도 그랬을 것이다. 도망치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지만 피할 데는 없었다(관련 기사 : 폭력 아버지 고발한 아이, 판사는 왜 안 들어줬을까).

제목이 더 무서웠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라고? 인상 깊게 남은 영화였는데 <7월 32일의 아이>를 읽다 보니 다시 떠올랐던 것. 줄리앙에게 도깨비 감투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도 문득 들었고. 특히 마지막 단을 읽으며.
 
이따금 온 세상의 구름이 서울 하늘 아래 모이는 날이면 창신동 벼락 맞은 느티나무 아래에 한 소년이 앉아 있곤 했다. 가까이 가면 보이지 않았지만, 번개가 세상을 밝히는 찰나, 그 짧은 순간에 틀림없이 소년의 그림자가 보였다. 소년의 그림자가 어찌나 슬프게 느껴지는지, 그 순간을 얼핏이라도 본 사람이면 꼭 느티나무를 다시 찾아와 소년의 흔적을 찾곤 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림자의 주인을 찾지 못했다. (52쪽)
 
세상 모든 몽이와 줄리앙에게 도깨비 감투가 필요 없는 세상이 되기를.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강대호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와 오피니언뉴스에도 실립니다.


7월 32일의 아이

박효미 지음, 홍선주 그림, 웅진주니어(2017)


태그:#7월 32일의 아이, #동화, #박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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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중반을 지나며 고향에 대해 다시 생각해봅니다. 내가 나고 자란 서울을 답사하며 얻은 성찰과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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