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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택배 상자> 예로부터 한동안 조용하면 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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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택배 상자>


예로부터 한동안 조용하면 어디선가 작당모의를 하고 와서는 무언가 계획을 꾸미고 얼추 그럴싸한 목표치까지 설정해서 입이 근질거리는 어느 날 통보를 하기 일쑤였는데 그 버릇 아직도 개한테 못 줘서 틈만나면 이 생각 저 생각하느라 여느 부모님들이 바라는 상과는 거리가 멀게 살아가고 있다.

이게 좋고 그건 너무 싫은데 어떡하겠어 나는 그냥 세상 물정 모르고 살래 라고- 이제 더 이상 대놓고 뻔뻔하게 얘기 하지 않는 눈치는 생겼다고는 하나 간간히(여전히) 속을 한 번씩 뒤집는 말들에 수화기 너머로 엄마의 이마 치는 소리가 들린다.

밥은 잘 안 해먹고 다닌다더니 어디서 뭘 좋은 걸 먹어서 살이 자꾸 찐다냐, 고작 일주일 안 했던 카톡에 요즘 재미 좋나봐 통 연락이 없네, 돈 좀 아껴써라 그래서 어떡할래? 하는 잔소리의 끝에는 항상 필요한 것들을 묻고 며칠 뒤면 현관 앞에 스티로폼 박스가 와 있다.

다진 파와 무, 디포리 서너마리, 호박죽, 김치, 누룽지, 무말랭이, 견과류, 감말랭이, 북어포. 누룽지랑 북어 같이 넣고 끓이면 돼. 대파는 냉동실 넣어 놓고 끓을 때 넣으면 되고. 요새 무가 싸고 맛나. 니가 좋아하는 북어포 가득 넣었다. 청국장도 외갓집에서 만든거야. 무 하나 사서 북어국 끓여 먹고 남으면 무국 끓여먹으면 되는데.

스프링 노트를 대충 찢어 날려 쓴 메모에는 다 넣고 물만 부으면 되는 초간단 레시피와 쿠킹 포인트가 적혀있다. 원룸에서 청국장을 어떻게 끓이냐고 퉁명스런 말들을 내뱉었던 나는 봉지에 다섯번 싸고 그걸 또 신문으로 감싸진 한 주먹 되는 청국장 콩을 한동안 들고 바라보다가 냉장고에 넣었다.

음식을 해 먹는 것에 대한 귀찮음을 최소화 해주기 위한 배려는 대충이 아니라는 걸 뽁뽁이와 신문으로 몇 번씩 싸고 또 싼 흔적에서 안다. 머리 굵어진 딸이 여전히 말을 안듣고 제 맘대로여도 추운 날에는 뜨끈한 걸 먹고 다녀야지 자꾸 빈 속에 나가면 골병든다, 냉동실에 오래두지 말고 꼭 해먹어라, 나한테는 몇 번이고 말해야 직성이 풀린다고 했다.

다 알려주고도 노파심에 또 전화로 이것 저것 알려주고는 서울은 위라서 여기보다 훨씬 더 춥겠지? 나는 대구가 여름에 아무리 더워도 겨울에 서울만큼 추우면 대구가 차라리 좋다. 늙어서 추운 건 이제 더더욱 싫어. 암튼 끊는다. 잘 살아~

주말에 창문 다 열고 청국장을 끓여보려 한다. 대파도 넣고 무도 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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